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업무 스트레스도 만만찮은데 '갑질'까지 당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와 함께 여러분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립니다.
A 씨는 마케팅팀에서 일했다. 맡은 프로젝트의 성과도 나쁘지 않았고, 업무에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회의 자리에서 팀장은 종종 "넌 왜 그렇게 둔하냐", "감이 떨어지는 편이니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보통 여자들이 기본 센스가 있던데..."와 같은 말을 던졌다. 직접적인 욕설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뉘앙스는 매번 A 씨의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A 씨는 결국 인사팀에 이 상황을 문제 삼았다. 인사팀은 자체조사를 실시했지만, "악의는 없었다", "업무상 지적이었을 뿐"이라는 해명에 머물렀다. "법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고, A 씨는 팀장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야 했다. 이후 A 씨는 팀장이 A 씨가 본인을 불편해할 것이라며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팀원들 사이에서도 거리감이 커졌다. 결국 A 씨는 계획에도 없던 퇴사를 해야만 했다.
이 사례는 특별하지 않다. 직장갑질119가 2024년에 실시한 직장인 1,000명 대상 설문조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후 신고를 했다고 밝힌 비율은 10.3%에 불과했다. 나머지 89.7%는 침묵하거나, 조직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법이 존재하지만, 그 법이 보호해 주지 못하는 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2019년부터 시행되었고, 사용자는 괴롭힘 사실을 인지할 경우 즉시 조사하고, 가해자에 대한 조치 및 피해자 보호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신고 이후 조직이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나 분위기를 갖추고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A 씨 사례처럼 법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는 회색지대는 더욱 어렵다. 현재의 법적 판단 기준에서는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를 이용할 것,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설 것,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요건을 충족해야만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보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에 이를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순간, 법적 구제의 문은 닫힌다. 현실에서는 신고된 행위가 부적절한 행위라고 하면서도 "직접적인 욕설이 아니니까", "업무 지시였으니까", "악의가 없었다니까"라는 논리로 사안이 종결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명확하게 증거도 있고, 확실하지 않으면 신고해 봤자 별 소용이 없다거나, 오히려 회사 생활이 힘들어진다는 간접경험들도 쌓여간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조직과 동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조직은 법의 기준보다 더 적극적인 '조직 내 기준'을 세워나가고 행동해야 한다.
조직은 '합법'보다 '건강한 관계'를 기준 삼아야 한다. 법이 괴롭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직은 더욱 유연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불쾌감', '일방적 의사소통', '공개석상에서의 모욕' 등은 법적 요건을 충족하지 않더라도 명백히 부적절한 조직행동이다. 인사팀이나 관리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있다손 치더라도, "법적으로는 문제없다"는 식의 처리가 아니라 해당 행동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피해자의 심리적 안전은 어떤 상태인지를 살펴 그에 부합하는 조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동료는 방관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괴롭힘 상황에서 다수의 동료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회피적 태도를 취하거나, 더 나쁘게는 피해자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직 내 안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료의 침묵도 책임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팀 내에서 반복적으로 모욕적 발언이 있었다면, 한 사람이라도 "그 말은 부적절했던 것 같다"는 피드백을 주었더라면 피해자는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료는 피해자의 고립을 막아줄 수 있는 첫 번째 보호자다.
침묵을 강요하는 조직은 사람을 잃는다. A 씨는 '버티지 못해서' 떠난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조직이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괴롭힘 그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문제를 겪었을 때 조직과 동료 누구도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감정이다.
괴롭힘 금지법은 분명 진일보한 장치다. 하지만 그 법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조직이 법 이전에 사람을 본다는 태도가 필요하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만들어졌음에도 침묵을 선택하는 피해자들을 용기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오히려 살펴봐야 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