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7일 방송된 '두 발의 총성, 그리고 11명의 목격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윤도현, 배우 오대환, 조수향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들의 죽음
때는 1984년 4월 2일 아침. 전남 진도에서 김 양식업을 하던 마흔네 살 허영춘 씨는 하루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혀. 새벽녘에 이상한 꿈을 꿨거든. 군대 간 큰아들이 나타나서 '아버지'라고 부르더래. 깨고 나서도 영 불안하고 느낌이 안 좋아. 그래서 일찍 일을 접고 저녁식사를 마쳤을 때였어. 갑자기 마을 방송이 들려와.
"아아 허영춘 씨. 언능 와서 전화 좀 받아보쇼"
우체국에서 급한 전보가 왔다는 거야. 전보 내용을 듣는 순간, 허 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허원근, 귀대 중 사망'


허원근은 허 씨의 큰아들이야. 나이는 22살. 6개월 전 입대해서 강원도 최전방 GOP에서 근무하고 있었어. 내일이면 첫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던 중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게 된 거야. 허 씨는 황급히 택시를 타고 아들이 근무하는 부대로 향했어. 전남에서 강원도까지 수백 킬로나 되는 길을 밤을 새워 달려갔다고 해.
다음날 아침, 부대에 도착한 허 씨는 헌병대장을 붙잡고 "우리 애가 왜 죽었단 말입니까?"라고 물었어. 돌아오는 대답은 충격적이야.
"아직 조사중에 있는데... 허 일병이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허 씨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아들이 자살할 이유가 없었거든. 원근이는 밝고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해. 양식업을 하는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수산대에 진학한 기특한 아들이야. 그런 애가 자살이라니?
아들이 사망한 날은 첫 휴가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고 했잖아. 이미 다른 병사들에게 휴가복도 빌려놨다고 해. 자기가 휴가 나가면 대신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주겠다고 약속도 했대. 그런 애가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고? 이게 이해가 되니?
허 씨는 아들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기로 했어. 그런데 시신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어.

"모포를 벗기고 보니까 총을 세 방을 맞아 있었어요."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아들의 몸에는 총상이 세 군데 남아 있었어. 오른쪽 가슴, 왼쪽 가슴, 그리고 머리.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두부손상. 총알이 빠져나온 왼쪽 머리는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비참한 모습이야. 헌병대장은 허 일병이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어.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자기 몸에다 세 발을 쏠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을 하니까 거기서 안 싸봤으니까 모르겠다는 거죠."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허 씨는 아들이 자살했다는 말을 절대 믿을 수 없었어. 허 씨는 가해자를 처벌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으니 용서하겠다, 그러니 내 아들이 자살했다고만 하지 말아달라… 그렇게 군 헌병대에 부탁했어.

"그때 내 아들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군인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무기가 칼 하고 총이다. 사람은 언제나 순간적인 생각에서 사고를 저지를 수가 있다. 자살만 아니라고 하면 나는 그대로 여기서 물러나겠다. 처벌을 원치 않겠다'…"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 믿을 수 없는 조사 결과
사건 발생 후 약 한 달이 지나자 군 헌병대의 수사결과가 나왔어. 군 헌병대는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결론을 내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어.
"중대장 전령으로 근무하던 허원근은 평소 중대장의 가혹행위와 폭력, 괴팍한 성격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여 몇 차례 보직을 변경하여 소대로 배치해 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이로 인해 허원근은 군 복무에 심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군 헌병대 조사 내용 中
당시 헌병대가 수사한 내용을 알려줄게. 소대 소총수로 배치된 허원근은 중대원들로부터 평판이 좋았다고 해. 181cm 훤칠한 키에 근무태도도 성실해서 중대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대. 그래서 눈에 띄었던 걸까? 허원근은 일병 진급을 앞두고 중대장 전령으로 발탁이 됐다고 해. 하지만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어. 중대장은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었거든. 장교든 사병이든, 걸핏하면 폭행을 하고 얼차려를 줘. 한번은 실탄이 장전된 M16소총을 들고 병사들을 죽이겠다며 소동을 피운 적도 있었대. 허 일병은 그런 중대장의 전령으로 남은 군생활을 보내게 된 거야.
허 일병이 사망한 날 아침, 중대장은 전투복 다림질이 이상하다고 허 일병을 심하게 꾸중했다고 해. 게다가 철모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고 눈앞에서 허 일병의 사수를 폭행하기까지 했대. 그러자 심한 압박감을 느낀 허 일병이 자살을 결심했다는 거야.

군 헌병대가 밝힌 그 후의 상황은 이래. 허 일병은 M16 소총을 들고 몰래 내무반 밖으로 나왔대. 그의 손에는 실탄이 든 탄창이 들려 있었어. 중대본부에서 30m 정도 떨어진 폐유류고로 향한 허 일병은 M16 소총을 오른쪽 가슴에 대고 탕! 쐈다고 해. 하지만 바로 죽음에 이르지 않자 다시 소총을 왼쪽 가슴에 대고 탕! 쐈다는 거야. 두 발을 쏘고도 의식이 있던 허 일병은 다시 소총을 머리에 대고 탕! 그렇게 세 방을 쏴서 자살했다는 거야. 이게 가능한 일일까?

M16소총은 총신이 길어서 스스로 가슴을 쏘는 자세를 취하기도 힘들어. 그리고 이게 위력이 엄청나. 총기의 위력은 '줄(J)'이라는 단위로 표기하는데, 권총의 위력이 3~400줄이면 M16소총은 1800줄에 달한대.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총기인 거지. 총을 쏘면 반동도 셀 텐데, 반동과 격통을 이겨내고 여러 번 자기 몸을 겨냥하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헌병대에서는 가능하다는 입장이야. 몸에 여러 방을 쏴서 자살한 사례가 여럿 있다는 거야.
허 씨는 모든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어. 처음 부대를 찾아갔을 때에도 이상한 일이 있었거든. 아들의 시신을 보고 나오는 허 씨에게 지나가는 병사가 이런 말을 했대.
"아버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어제 총소리는 두 방 밖에 안 들렸는데 어떻게 총상이 세 군데입니까?"
자기는 분명히 총소리를 두 번 들었다는 거야. 병사의 말을 듣고 중대본부로 달려간 허 씨는 그곳에서 이상한 걸 목격했다고 해.

"가서 중대장실 안에서 피를 발견했고 문짝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봤고. 바닥에는 또 흥건히 물이 고여 있고. 나와서 우측으로 이렇게 보니까 바로 그 옆에 피가 상당히 큰 덩어리가 거기 있었어."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아들이 근무했던 내무반 바닥은 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대. 그리고 문짝에 남아있는 검붉은 핏자국, 내무반 막사 바깥에서는 핏덩어리까지 목격했다고 해.
"그래서 삽으로 떴어. 떠서 봉투에 담았어요. 헌병 대장이 담았는데, 그 자료가 반드시 기록돼 있어야 하는데 없더라고요."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헌병대에서 조사해보겠다며 핏덩어리를 수거해갔지만 수사기록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어. 사단 헌병대, 군단 헌병대, 군사령부 헌병대가 사건을 조사했지만, 모두 자살로 결론짓고 말았어.
아버지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허 씨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약속해. 반드시 네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겠다고.
▲ 아버지의 싸움
그후 허 씨는 생업을 내던지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해. 홀로 법의학 공부를 하면서 의문점들을 다시 조사했어. 그럴수록 확신은 강해져. 내 아들은 절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거. 허 씨는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진정서를 썼어. 대통령, 국방부장관, 군사령관, 사단장 등 떠올릴 수 있는 사람 모두에게 보냈다고 해. 내 아들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어달라고. 정말 평범한 개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거야. 결과는 어땠을까?
이때가 1984년이야. 1980년 이후 전두환 군부정권이 장악하고 있을 때였어. 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은 1980년 한 해에만 군에서 사망한 사람이 무려 970명이야.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 전사자가 148명이었다고 해. 전쟁도, 전투도 없이 한국에선 한 해 천 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죽어간 거야. 그중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391명. 하루에 한 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어.
이런 상황에서 이미 자살로 결론이 난 아들의 죽음을 밝혀달라고 아버지가 요청하는 거야. 허 일병의 죽음은 그들이 보기에 수많은 숫자 중에 '1'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철저한 무시와 냉대. 침묵을 강요당했던 이 시기가 허 씨는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해. 그때의 심정을 적은 글이 있어.
"진즉이 땅에 묻고 잊고서 살았다면 오늘같은 모진 수모 당하지 않았겠지. 안쪽에 모셔놓고 면담을 거절할 때 너무나 비통하고 너무나 서글퍼져."
-허영춘 씨 일기 中
그 후 허 씨는 거리로 나섰고, 오랜 투쟁이 이어졌어.

"이런 죽음들이 숱하게 많이 있거든요.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왕 우리 자식들은 죽었지만 더 이상은 죽여선 안된다, 외치고 다녔죠."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그 외침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을까? 1990년 육군 범죄수사단이, 1995년 육군본부 법무감실이 허 일병 사건을 재조사를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야. '허 일병의 죽음은 자살이 틀림없다' 모두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어. 하지만 아버지 허 씨는 포기하지 않고 탄원을 멈추지 않았어. 그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의 협박까지 이어졌다고 해.

"'백번 천번 탄원해라' 그 정도로 얘기하면서 '너 몸에 지장 있을 거다', '생명에 지장 있을 거다', '몸조심해라', '입조심해라'... 이건 국가가 국민에게 할 얘기는 아니죠."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시간이 흘러 1998년. 아들이 세상을 떠난지 14년이 흘렀어. 어느새 머리가 허옇게 센 허 씨가 국회 앞에 섰어. 그 곁에는 30여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였어. 이들은 모두 군부정권 시절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이야. 자식들 중 누군가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고, 또 누군가는 군대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어. 이들이 바라는 것은 자식의 명예회복, 그리고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야. 대부분 6~70대 노령인데, 한겨울 칼바람 부는 거리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한 거야.
기한은 정해지지 않았어.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농성을 이어가기로 했어. 살을 에는 강바람에 떨다가 흐드러지는 벚꽃이 피었다 졌어. 한낮의 뙤약볕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맛비도 견뎌야 했어. 보도블록 위 가득 낙엽이 쌓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해. 오늘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농성에 나선지 1년이 훌쩍 넘었을 때, 마침내 이분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돼.

422일간의 투쟁 끝에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거야. 유가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 안았어.
▲ 총상은 세 곳, 탄피는 두개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만들어져. 의문사위에 조사관으로 지원한 김학선 씨에게도 사건이 맡겨져. 바로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이야.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출범했을 당시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그 당시 조사관 김학선이라고 합니다. 이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면 원인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가지고, 부모님의 한과 죽은 자의 한을 어떻게든지 풀어주고 싶다…"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김 조사관과 팀원들은 국방부로부터 허 일병 사건에 대한 자료들을 요청했어. 막상 자료를 받고 보니 양이 엄청나. 보통 사건은 캐비닛 한 개 정도의 분량인데, 허 일병 사건은 캐비닛 세 개 정도 분량이야.
이 자료들은 그 당시 헌병대 수사기록 중 일부야. 김 조사관은 먼저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어. 그런데 보면 볼수록 물음표가 생겨.
"읽어보다 보니까 그 사건 기록철에 모순점이 너무 많이 발견이 되는 거예요. 장소, 시간, 그리고 당시 허원근 일병과 같이 근무했던 중대본부 요원들의 진술들, 기록들이 차이가 있고. 이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다 보니까 모순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도 지울 수가 없었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김 조사관은 당시 헌병대 수사기록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

헌병대원이 사건현장을 그린 그림이야. 허 일병의 시신에 남은 총상이 세 군데야. 세 발을 쐈다면 탄피도 세 개가 있어야 하잖아. 하지만 이 그림에는 허 일병의 시신 옆에 탄피가 두 개 그려져 있어. 다른 헌병대원이 그린 그림에도 탄피는 두 개야.

다른 기록도 마찬가지야.

'당시 의문점. 총상은 3개인데 탄피는 2개 회수'
이 점은 수사기록 상에도 의문점으로 기록돼 있어. 사건 당일, 늦은 밤까지 주위를 정밀 수색했지만 나머지 한 발의 탄피는 찾지 못했대. 부대 안에서 탄피가 없어진다는 건 엄청난 사건이야. 관련자 모두가 징계를 받는 중대한 실수야.
여기서 혹시 생각나는 거 있지 않아? 사건 다음날, 부대를 찾은 허 씨에게 지나가던 병사가 뭐라고 얘기했지? 분명히 총소리가 두 발 들렸다고 했잖아. 김 조사관은 총소리에 관련된 진술을 찾아봤어.
"경계 근무중이던 상병 000외 1명의 진술에 의하면, 동일 10시 50분경 변사장소 부근에서 M16 소총 총성이 약 30초에서 1분 간격으로 2발이 들리는 것을 청취할시, 근무호에 투입되었던 000 역시 총성 2발이 30초 간격으로 났다는 상황보고가 들어옴으로써 중대 상황실에 상황 보고."
다른 중대원들도 총성은 두 발이었다고 진술한 거야. 그뿐만이 아냐.

"한참 간격을 두고 났어요. 총소리가... '핑' 소리가 나고, 나중에 총소리가 또 났어요. (두 발 정도로 기억을 하는 거예요?) 네."
-당시 중대원

"순찰하던 도중 총소리를 들었고 두 번 정도 들었거든요. 제가 듣기로는 두 번 들었는데..."
-당시 중대원
사건 당일 오전 총성을 들었다는 부대원 대부분이 총성은 두 발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어. 시신은 세 발을 맞았는데 총성은 두 번, 현장에 남은 탄피도 두 개야. 부검의사는 사건 발생 이틀 후까지도 탄피가 두 발만 발견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 하지만 수사기록 뒷부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어.
'현장에서 유류된 탄피가 자살자 좌우 50cm 범위에서 발견되므로 동일 장소에서 3발이 발사된 것이 입증'
정밀수색을 했어도 발견하지 못했던 세 번째 탄피. 하지만 어느 순간 탄피가 세 발이 발견됐다고 적혀 있어. 50cm 범위 안에서 세 발 모두 발견됐다는 거야. 누가, 언제,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기재돼 있지 않아.

"그 당시에 찾지 못한 탄피를 이후에 어떻게 어디에서 찾았다고 기록을 가지고 근거를 제시했는지, 굉장히 믿기가 어렵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타나. 허 일병이 발견된 현장의 사진을 보여줄게.

허 일병은 세 군데 총상을 입고 사망했어. 그중 머리 왼쪽은 크게 손상됐어. 이 경우, 시신 주변에는 뼛조각과 살점들이 흩어진다고 해. 그런데 현장을 찍은 사진은 이상하리만치 깨끗하지 않아?
"당시 헌병대가 찍은 사진에 의하면 바닥에 피가 없어요. 다른 사망사건들은, 주변에 검붉은 흙, 핏자국이 이렇게 보이거든요. 그런데 허 일병 같은 경우는 아주 깨끗해요."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헌병대 수사기록에는 '사망자의 두부 좌전방 30cm~1m 일대에 골편이 산재해 있는 바, 동 장소가 사건현장임이 입증되었다.'라고 적혀 있어. 하지만 사진을 보면 산재해 있다는 뼛조각은 보이지 않아. 그러면 도대체 헌병대는 무엇을 보고 이렇게 기록한 걸까?
허 일병의 시신에도 물음표는 남아있어. 이 사진을 봐볼래.

시신을 발견한 직후, 촬영한 사진이라고 해. 허 일병의 가슴에 남은 두 군데 총상이 보이지? 왜 색깔이 다를까? 의문사위는 당시 부검의를 만나 이 사실에 대해 물어봤어. 당시 부검의는 자신이 시신을 봤을 때에는 양쪽 다 검은 색에 가까웠다고 진술해. 발견 직후 촬영한 사진은 자신도 처음 본다는 거야. 이어서 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내.
"아마도 오른쪽의 색이 검은 이유는 오른쪽이 먼저 총상이 형성이 되었고 이후 수시간 후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부검할 때 찍은 사진은 사망한지 이틀이 지난 후에 찍은 것인데, 건조현상에 의해서 색깔이 비슷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당시 부검의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오른쪽 총상을 입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왼쪽 가슴과 머리에 총상을 입었을 수도 있는 거야.
▲ 목격자들
두 발의 총성, 두 개의 탄피, 그리고 사건현장이라고 보기엔 너무 깨끗해보이는 사진과 부검의의 진술까지. 물음표가 너무 많지. 이제 당시 상황을 알고 있을 사람을 만날 차례야. 바로 허 일병과 같은 내무반에서 함께 지냈던 중대본부원들. 같이 생활했을 그들이, 이 사건의 전말을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근데 중대본부원들이 허 일병 사망 직후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고 해.

"허원근 일병이 사망하고 나서 중대본부 요원들 전원이 헌병대에 일주일 이상 끌려갔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근데 그 끌려갔던 중대원들이 돌아왔는데, 같은 중대에서 근무했던 병사들이 그 친구들 얼굴을 처음에는 잘 못 알아봤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맞아가지고. 얼굴이 부어서."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그들은 약 보름간 헌병대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져. 그리고 허 일병이 자살한 것 같다고 진술했어. 그리고 18년이 지났어.
"뭔가 다른 숨기는 일이 있었으면 지금 시간도 이렇게 흘렀고 민주화도 되고 그래서 이제 자유로운 분위기인데 말을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 당시 소대에 근무했던 주요 참고인들을 불러서 GOP까지 데리고 가서 현장 방문까지 했거든요. 근데 그 결과가 헌병대 수사기록하고 그렇게 큰 차이가 안 나는 거예요. 대체적으로 자기들은 기억은 안 난다고 그러면서, '헌병대 수사 기록이 대부분 맞을 거다', '내가 알기로는 거기 기록에 나와 있는 진술이 맞다' 더 막막해지는 거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이대로라면 18년 전의 수사결과를 반복할 뿐이야.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김 조사관은 다른 방법을 떠올렸어.

"헌병대 수사기록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을 찾아냈죠. 산봉우리에는 중대본부가 있었고 양옆으로는 소대가 하나씩 있었거든요. 그 당시 같이 근무했을 당시 그 소대원들의 명단을 구했어요. 그 사람들을 다 조사하기로 했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그렇게 찾아낸 인원이 200명 가까이 됐다고 해.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 만나서 18년 전 그날의 일을 물어봤어.

"제가 소대에서 근무했던 하사관 한 명을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전혀 헌병대 조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발언이 나왔던 거죠. 그 당시에 총소리가 났는데, 그 총소리 때문에 허겁지겁 중대본부로 뛰어서 몇 명하고 올라갔는데, 중대본부 요원들이 물걸레를 들고 중대본부 안을 청소를 하고 있는데, 핏자국이 있더라. 나는 그걸 분명히 봤다."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헌병대 수사기록에 없었던 새로운 진술이 나왔어. 총성이 울린 그 시각, 중대본부 안에서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게다가 핏자국을 목격했대. 처음에 허 씨가 했던 말 기억 나? 중대본부에 갔더니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고 했어. 그리고 문짝에 핏자국을 봤다고 했잖아. 그것과도 일치하는 증언이야.
당시 중대본부는 GOP라인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어. 거기엔 상수도 시설이 있지 않아. 물을 떠오려면 가파른 계곡 밑까지 내려가서 물지게를 지고 올라와야만 해. 그래서 평소 물청소는 거의 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런데 왜 사건이 발생한 날, 물청소를 했던 걸까? 혹시 중대본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김 조사관은 이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어. "혹시 그날 중대본부에서 물청소하는 걸 본 적이 있나요?"라고 물으니, "아 맞다. 그날 중대본부에 갔더니 다들 전투복 바지를 걷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어요"라며 물청소하는 걸 봤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해.
"헌병의 수사기록에 의하면 그 시간에는 총소리 듣고 찾으러 다녔다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물청소를 하고 있다는 건 뭔가 내무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잖아요."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새로운 증언이 나오며 조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해. 그리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 허 일병이 사망한 전날 밤, 중대본부에서는 한 간부의 진급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있었어. 술자리 참석자는 총 세 명. 중대장과 진급한 중위, 그리고 선임하사. 헌병대 수사기록에는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시고 아무 일 없이 돌아갔다고 적혀 있어.
하지만 수사기록과는 다른 진술을 하는 인물이 나타나. 중대본부 계원 전 모 상병이었어. 또 다른 목격자가 말하는, 그날 새벽의 이야기야.

"원근이가 그 술상을 보고 찌개 같은 거를 준비를 하고. 중대장실 바로 옆에 침상에 앉아있었던 것 같고. '선임하사가 술이 굉장히 많이 취했구나' 그러면서 나뿐이 아니라 다들 좀 불안감을 좀 느꼈었지. 순식간에 욕을 해버리고 때리고 그 말리는 와중에 어느 순간에 손에 총이 들려 있었고. '탕'하는 그런 소리가 한 번 나면서, 허원근이 옆으로 침상 있는 쪽으로 푹 쓰러졌었던 그런 기억. 피가 꽤나 좀 많은 양이, 한방울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뭉쳐가지고 이렇게 나오는... 색깔을 보니까 빨간색은 아니고 색깔이 약간 좀 검붉은 그런..."
-전 상병
전 상병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 당일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 술을 마시던 중대장과 선임하사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고 해. 화가 나서 중대장실을 박차고 나온 선임하사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중대장 전령 허 일병에게 욕을 하고는 폭행을 가했다는 거야. 어느 순간, 선임하사의 손에는 M16소총이 들려 있었다고 해. 그가 개머리판으로 내려치자 허 일병이 왼팔을 들어 막았대. 화가 난 선임하사는 허 일병에게 총을 겨누었고, 실랑이 하는가 싶더니 탕! 그리고는 허 일병이 가슴을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졌다고 해. 중대본부에 있던 전 상병은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했어. 그리고 날이 밝자 중대본부 내무반 안에서 물청소를 했대.

"구석구석 피 튀긴 데도 닦고 바닥도 쓸고 침상 같은 데도 좀 닦고. 물청소는 하여간 그때 처음 해봤어요."
-전 상병
근데 전 상병이 한창 바닥을 닦고 있는 그때, 바깥에서 두 발의 총성이 또 들렸다고 해.
"총성을 듣는 순간 찰나에는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보다는 '아무 죄도 없는 허원근이 저렇게 순간적으로 죽고 나서 저렇게까지 되는데, 나도 잘못하면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이성보다는 본능이 지배하면서 움직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 상병의 증언 中
엄청난 공포였을 거야. 전 상병이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한 건 아니야. 첫 진술조사 때에는 사건 당일 아침 허 일병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어. 하지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12번째 조사 때 진술을 바꾼 거야. 그는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했어.

"그날 새벽, 허 일병의 몸에서 튄 피가 내 옷에 묻었기 때문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 상병의 증언 中
전 상병의 증언을 들은 김 조사관은 다른 인물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그 설득하는 과정 중에서 그날 있었던 사실들이 한 꺼풀 한 꺼풀씩 사실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그러자 이 증언을 뒷받침하는 인물이 또 하나 등장해. 중대본부에 관측병으로 파견근무 나와있던 이 하사였어. 이 하사의 진술 역시 전 상병의 진술과 같았어.

조사관 : 발사되고 나서 바로 허원근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죠?
이 하사 : 옆으로 그냥 기대는 식으로 넘어갔던 거 같아요.
조사관 : 피가 튄 것은 기억 안 나세요?
이 하사 : 튄 것은 기억은 안 나지만, 벽이나 이쪽에 자국이 있었던 그런 기억은...
그 후에도 다른 대원들로부터 이 상황을 뒷받침하는 간접 증언들이 쏟아져 나와.

"제가 정확하게 들은 것은 현장에서 그 시체를 옮겼다는 거예요. 옮겨서 위장을 시켰다. 죽은 위치에 시체가 있는 게 아니라, 시체가 발견된 위치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얘기는 제가 정확하게 들었어요."
-당시 중대원

그날 새벽 중대본부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12명. 그중 사망한 허 일병을 제외하면 11명이 있었어. 술파티를 벌인 3명의 간부와 8명의 중대본부원들. 중대장은 사건 이후 강제 전역했고 1999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남은 목격자는 모두 10명. 그중 두 명이 그날 새벽의 오발사고를 증언한 거야. 이 상황에서 나머지 중대본부원들은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분명히 그날 밤에 잠을 잤어요. 거기서 사고가 일어났으면 과연 잠을 잘 수 있었겠느냐. 사람이라면 절대 못 자요."
-당시 중대본부원 A씨
"동료가 총에 맞았어요. 동료가. 자, 분명히 안 죽었단 말이야. 그러면 의무대나 어디로 헬기 불러가지고 보내지. 그것을 조작을 해? 생명이 안 끊어졌는데?"
-당시 중대본부원 B씨
"그거 가지고 총을 쐈다고 하면, 기절할 일 아니에요 사람들이? 그리고 7시간 8시간 방치시켜놨다가 물청소? 이건 진짜 시나리오도 아니고 그런 시나리오를 쓸 수도 없어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나는 지금 되묻고 싶은 사람이에요."
-당시 중대본부원 C씨
그날 새벽,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났다면, 모를 수가 없다는 거지. 그러면, 가해자로 지목된 선임하사는 뭐라고 했을까?

"저는 그날, 총 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총을 쐈다며 제 가정을 파괴하고 살인자의 오명을 쓰게 만듭니까? 이게 될 말입니까?"
-가해자로 지목된 선임하사
그는 절대로 총을 쏜 일이 없다며 극구 부인했어. 사건 당일 새벽,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일은 인정했어. 술김에 소총을 집어들긴 했지만 총을 쏜 기억은 없다고 답했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야. 오발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 총성 조차 듣지 못한 사람들, 총을 쏘는 걸 본 사람과, 총을 쏜 기억이 없는 사람. 이중에 누군가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는 게 분명해.
▲ 진실게임
2002년 9월 10일, 의문사위는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발표했어.
"허 일병 사건 재조사에 착수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고 당시 내무반에서 총기 오발사고가 있었고 허 일병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밝혔습니다…(중략)… 중대장실에서 술자리 도중 문을 박차고 나온 선임하사 노 모 씨가 술에 취해 내무반 사병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도중 총탄이 발사됐다는 것입니다. 이후 허 일병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부대 안 폐유류고 창고 옆으로 옮겨졌고, 그후 누군가가 쏜 총탄 두 발에 의해 허 일병이 살해됐다는 것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입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허원근은 총에 맞아 중대장실과 가까운 침상 쪽으로 기대어 쓰러졌습니다. 허원근이 쓰러져 오른쪽으로 기댄 상태에서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김준곤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사건 당일 새벽, 중대본부 내무반 안에서 총기 오발사고가 있었고 이를 자살사고로 은폐하기 위해 두 발을 더 쏴서 허 일병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한 거야. 이뿐만이 아냐. 의문사위에서는 84년 당시 작성된 헌병대 수사기록이 조작된 정황을 포착해.
'1984년 당시 수사에서 헌병대는 허원근이 4월 2일 오전 9시 50분경에 자살하였고 중대장은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수사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대대 상황실은 이미 4월 2일 새벽에 허원근의 사망 보고를 받았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연대본부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의문사위 조사 내용 중
헌병대 수사기록에 따르면, 총성이 들린 시간은 오전 9시 50분. 중대장이 보고받은 것은 오후 1시 30분이라고 적혀 있어. 하지만 당시 대대 상황실에서 근무하던 장교는, 그날 새벽에 이미 허 일병의 사망 사실을 보고 받았다고 증언했어.

"(새벽) 1시 반에서 2시 사이 그쯤에 제가 연락을 받은 것 같고요. 2시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게 그때 근무교대 시간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날의 그거는 말하자면 저한테는 굉장히 큰, 자주 없는 일이었으니까. 전 또 처음 겪었던 일이었고. 새벽에 왔다가 갔는데 그러고 나서 바로 대대장이 '1호차 대기시켜라'."
-당시 대대상황실 근무자
대대장의 운전병은 그날 아침 대대장을 태우고 사건 현장을 방문했다고 진술했어.

"도착은 동이 틀 정도 됐고요. (대대장이 그렇게 일찍 나간 경우가?) 잘 없습니다. 그때 부대에 복귀하니까 아침식사를 다 끝낸 상태였고요."
-당시 대대장 운전병
연대장 역시 아침 일찍 허 일병의 사망 보고를 받았다고 증언해. 이 증언들이 사실이라면, 수사기록에 적힌 내용은 조작됐다는 얘기가 돼.
의문사위의 발표는 엄청난 충격을 불러오게 돼. 허 일병이 사망한지 18년 만에 자살이 타살로 뒤집혔어.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겠다던 아버지의 약속은 이뤄진 걸까?

"새벽 4시에 일어나 생각을 해본다. 무슨 죄가 크기에 좌측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죽지 않고 살아보겠다고 8시간이나 견디며 그 고통을 견디었는데 구조는커녕 확인사살을 하고 말았다니. 이대로 묻어둘 수 없는 괴로움, 어쩔 것인가?"
-허영춘 씨 일기 中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 의문사위의 발표에 국방부가 즉각 대응에 나섰거든. 국방부는 특별진상조사단을 구성해서 허 일병 사건을 전면 재수사하겠다고 발표해.

"국방부는 지난 20일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허원근 일병 사망 사고 조사 결과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하여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결과를 국민들께 소상히 밝힘으로써 일말의 의혹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문사위는 그동안 조사했던 자료를 국방부에 넘겨주고는 해산했어.
▲ 국방부의 재조사
국방부 특조단은 재수사에 착수한지 3개월 후, 수사 결과를 발표해.

"조사 결과. 첫째. 허원근 일병은 자살하였습니다. 둘째 의문사위원회에서 허일병 사건을 타살로 발표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 정수성, 국방부 특조단장
국방부 특조단은 다시 허 일병 사건은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린 거야. 의문사에서 제시한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명했어.
먼저 사건당일 총소리가 두 번이었다는 진술에 대해, 한 발은 못 들었던 거라고 해명했어. 우측 가슴의 총상은 총구를 몸에 대고 쐈기 때문에 소리가 작았을 거라는 거야. 총상의 색깔이 다른 것은, 총구를 몸에 대고 쏜 것과 조금 떨어져서 쏜 것 때문이라고 밝혔어.
사건 현장에 혈흔이 적은 것 역시, 허 일병이 옷을 여러겹 껴입고 있어 피가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거야. 그리고 평소 하지 않던 물청소를 한 이유는 이거래.

"그때 대대장님 오신다 그럴 때 높으신 분들 오면 청소하는 거는 그거는 예의 아닙니까? 수건 갖다가 테이블 위에 닦고 그런 청소지. 물청소라고 피를 닦고 한 그런 기억은 전00 상병만 있을 뿐이지. 우리 대원들은 전혀 없어요."
그동안 타살 정황을 뒷받침하는 많은 진술들이 있었잖아. 하지만 특조단 조사 이후, 대부분 진술을 번복했다고 해.
"대대장 운전병 배 모씨가 의문사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사전 각본에 짜여진 유도질문에 대답한 것이 물의를 일으키게 되어 정말 죄송스럽다고 진술하였습니다."
- 정수성, 국방부 특조단장
그밖에 중대본부에서 핏자국을 봤다고 진술한 중대원들도 대부분 착각이었다며 말을 바꿨어. 진술을 번복한 대대장 운전병. 그는 왜 진술을 바꾼 걸까?

"내가 거기에 대해서 내가 무슨... 뭐라고 얘기를 드릴 수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너무 가볍게 생각해가지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 점에 대해선… 내가 내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게 남들에게 부끄럽고"
-대대장 운전병 배 씨
국방부에서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을 때 배 씨는 거절했다고 해. 그러자 당시 대대장이 직접 배 씨를 찾아왔다고 해. 그의 설득으로 특조단의 조사를 받았다는 거야. 그후 배 씨는 진술을 번복했어. 그날 새벽 오발사고를 목격했다고 진술한 두 명의 목격자 중 한 명인 이 하사도 진술을 번복했어.

"이00 하사를 우리가 다 조사할 때는, 자기는 어떤 경우에도 중대 내무반에서 총격사실은 없었고 허원근이 죽은 것은 못 봤다, 확실히 우리에게 얘기했고…"
-정수성, 국방부 특조단장
10명의 목격자 중, 전 상병을 제외한 9명이 그날 새벽 아무 일도 없었다고 증언한 거야. 전 상병은 국방부의 조사 요구에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고 해. 이제 그는 오발사고가 있었다고 증언하는 유일한 목격자야.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는 그렇습니다. 그 사실만큼은 제가 누구하고 얘기해도 아닌 건 내가 죽지않는 한 어차피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오로지 믿음이 그겁니다. 내가 안 본 게 왜 그렇게 생생히 생각날 것이며… 일단 제일 서글픈 게 저 혼자라는 게 서글프고요. 혼자 좀, 유일하게 협조하는 사람이 저 혼자라는 것들이 사실은 그 친구들 이해가 되면서도.."
-당시 중대본부원 전 상병
특조단이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내린 근거는 또 있어. 재수사 결과 발표 3일 전, 국방부는 법의학자 토론회를 열었어. 토론 주제는 'M16 소총으로 스스로 세 발을 쏠 수 있는가?' 였어.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법의학자들을 불러 토론회를 연 거야.

"수많은 총기 자살하는 사람들이 가슴을 표적으로 하지 않는 이유,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는 상당히 편한 자세를 원하는데, 굉장히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두 발을 쏜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면에서는 인정을 합니다. 단지 그것이 굉장히 특이하다. 드문 일이다.
-이윤성 교수

"최초의 부검 감정 결과를 번복할 만한 새로운 사망 상황이나 사실이 없으며 법의학적으로도 자살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만한 소견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허 일병 사망원인은 다발성 총창이며 사망의 종류는 자살 추정이라고 판단을 합니다."
-이상한 교수
"부검 소견, 시체에 나온 소견을 가지고서는 그것으로 자살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조 지나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상한 소견들이 많은 이 시체 소견을 가지고 자살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쉽게 애들 말로 오버하는 거다 하는 생각이죠."
-이윤성 교수

"총알의 방향이 아주 낮게 들어가는 거죠. 누운 상태에서 낮게 들어가 줘야 하는데. 먼저 타살이었더라면 엎드려서 쏴줘야하는 그래야 설명이 됩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타살보다는 자살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황적준 교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자살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도 힘들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윤성 교수
6명의 법의학자 중 1명은 결론을 유보했어. 부검기록과 사진만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의견이야. 하지만 나머지 5명은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 국방부는 법의학자들의 의견을 자살의 근거로 내세웠어.
▲ 진실을 밝혀라
2기 의문사위가 출범하며, 당시 허 일병 사건을 재조사하겠다고 나섰어. 2기 의문사위의 조사가 한창이던 어느날, 마침내 두 국가기관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나게 돼.

때는 2004년 2월 26일, 대구에 있는 한 공원에서 세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어. 한 남자가 "당장 내놔!", "기록 가져와!" 라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고 맞은편의 두 남자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어. 그런데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아. 갑자기 '탕!' 총소리가 울려 퍼졌어. 흥분한 남자가 기록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더니, 품에서 가스총을 꺼내 쏜 거야. 가스총을 쏜 사람은, 군 검찰수사관 김 상사. 그를 진정시키던 두 남자는 의문사위의 조사관들이야.

한시간 전에 김 상사의 집을 방문한 의문사위 조사관들이 어떤 자료들을 가져갔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 상사가 바로 쫓아왔어. 김 상사는 조사관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그리고 허공에 가스총을 쐈어. 자료를 돌려주지 않으면 죽는다고 외치며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기까지 했다고 해. 어떤 자료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D.B.S라는 제목을 붙여서 파일을 이렇게 하나 해놨더라고요. D는 DIRTY고요. B는 BLACK, S는 SECRET인가?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까 타살 정황을 쭉 모아놓은 자료예요."
-의문사위 조사관
D.B.S는 DIRTY BLACK SECRET. 더럽고 검은 비밀이라는 뜻이야.

"당시 육과수로 감정의뢰된 소총이 허원근 일병의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상태. 게다가 당시 접수공문 및 접발대장상의 총번 수정 흔적이 있고 총기감식결과를 믿을 수 없음."
-'D.B.S 파일자료' 중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헌병대는, 현장에서 발견된 M16소총과 탄피에 대한 감정을 의뢰했어. 그 결과 현장에 있던 허 일병의 총기에서 발사된 탄피가 맞다고 발표했어. 이건, 허 일병이 자기 총으로 쐈다, 자살했다는 증거라는 거야. 근데 여기엔 깜짝 놀랄 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어.

이건 육군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증거품 서류야. 감정을 의뢰한 총기 번호가 굵은 글씨로 수정돼 있어. 증거와 관련된 중요한 서류잖아. 총번을 수정한 이유가 뭐였을까?

"이 총하고 탄피가 현장에 있던 거예요. 사고자 총, 이것만 의뢰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비교 감정을 해보니까 이 탄피가 이 총에서 안 나갔어요.
-지장현, 당시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담식 팀장
현장에 있던 M16 소총과 탄피를 감정해보니까, 총과 탄피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거야. 이 말은 즉, 총알이 허 일병의 M16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라는 거야.
"우리가 전화로 그 쪽 수사관에게 '이 탄피가 당신들이 의뢰한 탄피가 이 총에서 안 나갔다' 이렇게 연락을 해줘요. 이 총에서, 사고자 총에서 안 나갔으니. 다시 한 번 재수사 해봐… 수사해보니까 여기에 7~8명이 같이 근무하다 한 사람이 죽었어 일곱 사람의 나머지 총이 있다 이거죠. 그래서 그 나머지 총을 추가로 의뢰한 거예요. 처음에 의뢰된 총은 어느 총인지 모를 거예요. 저도 몰라요. 저기 번호가 안 남았으니까. 처음에 그러니까 사고 총이라고 의뢰했던 총이 어떤 총인지 지금도 몰라요 저도."
-지장현, 당시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담식 팀장
감정을 맡긴 증거품 서류의 총번이 수정된 이유. 혹시 현장에 있던 탄피가 허 일병의 총기가 아닌 다른 총기에서 발사된 것이 아닐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 일병의 총번을 수정한 게 아닐까? 국방부 툭조단은 단순한 행정상의 착오라고 해명했어. 하지만 DBS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의뢰를 요청한 M16 소총은 허일병의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2기 의문사위는 허 일병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를 타살로 발표해. 국방부 특조단의 발표내용을 2년 만에 다시 한번 뒤집은 거야.
▲ 여전한 고통
이를 바탕으로 2007년 4월, 허 씨는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서, 형사 책임은 물을 수가 없어. 그리고 3년 후, 1심 법원의 판결이 선고돼.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의 죽음을 타살로 인정했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자살로 조작했다고 판단한 거야. 법원이 이렇게 판단한 근거가 있어. 헌병도 수사 기록에 시간적 모순이 있었어. 이 모습을 밝혀내는데는 연대장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해.
헌병대 수사기록에 적힌 허 일병의 사망시각이 오전 9시 50분. 하지만 법정에 증인으로 선 연대장은 이렇게 증언했다고 해.
"허 일병 사망 당일 오전 7시경 출근하여 의자에 앉으니 곧바로 1대대장이 보고를 왔는데, 그때 하는 말이 '중대장 전령이 자살했다'는 보고였습니다. 내가 군 생활하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한 사건이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9시 50분이 되기 전에 이미 총격이 있었고, 이걸 숨기기 위해 자살로 보고했다는 거지. 중대에서 대대, 대대에서 연대로 보고가 이뤄졌을 테니, 연대장이 기억하는 9시 50분보다 더 앞선 시간에 사건이 있었다고 봐야해. 헌병대 수사기록 속 허 일병의 사망 시각은 조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1심 재판부는 그날 새벽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총격이 있었고, 몇시간이 지난 후에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두 발을 더 쐈을 거라 판단했어.
"헌병대는 초기에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수사를 시작하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초기의 수사 방향을 변경하여 이 사건사고의 진상을 알면서도 은폐하기로 하여 결국 망인의 사인을 자살로 처리하였다고 판단된다."
-1심 판결문 中
재판부는 허 일병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어. 지난 26년간 유가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인정한 거지.
하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걸까? 아니. 피고측, 대한민국의 항소로 이 사건은 고등법원으로 올라가. 2013년 2심 판결이 선고돼. 그런데 판결이, 또 뒤집어졌어. 항소심 법정은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본 거야.
항소심 재판부는 참고인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어. 1, 2차에 걸친 의문사위, 국방부 특조단. 반복된 조사를 거치면서 유입된 정보로 기억의 오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같은 사건을 두고 판결이 정반대로 나온 상황이야. 결국 허 일병 사건은 대법원에 판단을 맡기게 돼.
2015년 9월 10일. 마침내 대법원의 판결이 선고돼. 허 씨는 법정에 앉아 판결을 기다렸어. 아들을 잃은지 어느덧 31년이 흘렀어. 길고 긴 싸움의 종지부가 찍히는 날이야. 대법원의 판결은 어땠을까?
"허원근이 타살되었다는 점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들과 이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들만으로는 허원근이 소속 부대원 등 다른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그렇다고 하여 허원근이 이 사건 사고 발생일 오전에 폐유류고에서 스스로 소총 3발을 발사하여 자살하였다고 단정하여 허원근의 타살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
-대법원 판결문 중
쉽게 이야기하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는 거야. 31년동안 자살이냐 타살이냐 공방이 이어졌는데, 대법원이 내놓은 최종 판단은 '알 수 없다'였어. 당시 헌병대의 부실한 수사로 이제는 진실을 밝히기 어렵다는 거야.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고 10년이 지난 지금. 허 씨는 군대 가기 전 큰아들과 함께 지은 집에서 지내고 있어. 지금 그는 어떤 마음으로 지내는지 만나봤어.


"자식 잃은 슬픔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국민한테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잖아요. 죽였으면 죽였다, 잘못했다, 미안하다라고 해야지. 어느 놈이 잘못했다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와. 어떤 누가 내 아들한테 총을 쐈는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까. 세상 살아보니까, 아버지 죽고도 살고 엄마 죽고도 살고 자식들 죽고도 사는데, 제일 가슴 아픈 것이 자식들을 낳아 먼저 죽게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움을 견디는 것 같아요. 자식들은 죽고 보니까 지금도 늘 눈물이 난답니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요."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올해 4월은 허 일병이 세상을 떠난지 41년이 되는 달이야. 아들과 함께 지낸 시간보다 아들을 잃고나서 보낸 시간이 훨씬 더 오래됐어. 만약 살아있다면 환갑이 넘었을 아들은, 여전히 22살 앳된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아있어. 41년의 세월동안 8번의 조사가 있었고 세 번의 재판이 있었어. 9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에도 아들의 죽음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있는 상황이야. 아들의 몸에 남아있던 총상처럼 아버지의 가슴에 뚫린 구멍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어.
1980년부터 92년까지 군대에서는 해마다 평균 620명이 사망했다고 해. 그럼 지금은 어떨까? 군 인권센터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군에서 사망한 자는 397명. 한해 평균 70~80명 정도라고 해. 지금도 1주일에 1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있는 거야. 과거에 비해 많이 줄긴 했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이 여전히 목숨을 잃고 있어.
국방의 의무가 있다면, 국가는 군 복무중인 자식을 건강하게 돌려보내야 할 책임이 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공정하고 투명하게 수사해서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 해. 만약 유가족이 의문을 갖고 있다면 그 의문을 정성껏 풀어주는 것도 국가가 해야 할 의무가 아닐까.

'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