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민주수호 예비역장병단(대민장) 더불어민주당 지지선언 포스터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선고 이틀 뒤인 지난 6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예비역 장교 90여 명이 모여 대선 작전을 짰습니다. 12·3 계엄군의 잔상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예비역 군인들이 어떤 직업군보다 빠르게 우르르 대선 판에 뛰어든 것이라 "참 염치없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여의도 식당 회동 인원들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도 나돌았습니다.
마침내 어제(15일) 국회 의원회관의 450석 규모 대회의실에서 민주당의 예비역 빙산이 모습을 드러낼 참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수호 예비역 장병단, 즉 대민장의 출범이 예정됐었습니다. 하루 앞둔 그제 갑자기 취소됐습니다.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어 출범식을 무기 연기했다", "민주당 지도부가 예비역들의 집단행동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등 대민장 출범식 취소 이유에 대한 분석이 분분했습니다.
예비역들이 벌떼처럼 민주당에 모여들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민의힘은 예비역 장교들에게 철저히 외면받고 있는 것도 팩트입니다. 예비역들은 민주당을 '되는 집'으로 찍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예비역 장교들, 특히 예비역 장성들은 대선 때면 무리 지어 대선 캠프에 투신합니다. 정치와 가깝다는 교수, 법조인, 기자보다 훨씬 일찍, 압도적으로 많이 군집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만 벌어지는 기현상입니다.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 안보 이미지 강화 효과와 결집된 표를 챙기기 위해 예비역 군인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낙하산 일자리를 무더기로 안겨줍니다. 해당 기관의 능력자들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낙하산 일자리를 꿰찬 예비역들을 통해 권력의 정치가 군에 이식됩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이 맞은 비극이 바로 12·3 비상계엄입니다.
그들 앞에 펼쳐지는 낙하산 일자리들

예비역들이 선택한 캠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예비역들의 낙하산 일자리 천국이 펼쳐집니다. 캠프의 권력서열 1위는 통상 국방부 장관을 차지합니다. 차관, 정책실장, 대변인 등 국방부의 고위직도 캠프의 예비역 몫입니다. 이들 서넛만으로도 안보실과 협력해 현역 장교들의 인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습니다. 잘 싸우는 군인보다 연줄에 강한 군인에게 진급의 기회를 줍니다. 보훈부, 병무청, 경호처, 안보실의 넘버 1, 2의 자리도 캠프의 예비역 장성들에게 돌아갑니다.
군과 국방부 유관 기관도 캠프 예비역들이 점령군처럼 장악합니다.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 국방연구원, 국방기술품질원, 국방기술진흥연구소, 신속원, 전쟁기념관, 국방홍보원, 정신전력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현역 때 경력은 따지지 않고 자리를 나눕니다. 각 기관의 수장뿐 아니라 주요 직위들도 캠프 출신 예비역들이 맡습니다. 캠프의 예비역들은 방위산업진흥회, 항공우주산업협회 등 방산 유관 단체에도 내려가 고위직에 앉습니다.
한참 더 있습니다. 군 관련 학술단체들도 캠프 예비역들이 독식합니다. 방산업체들은 사외이사나 고문 자리를 캠프에 상납합니다. 예비역 장군들은 해당국 언어도 모르고 외교적 감각도 없으면서 외국 대사 2~3 자리에 기용됩니다. 김용현이라는 뒷배 믿고 유난히 예비역 장성들이 기승을 부린 윤석열 정부에서는 호주, 콜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나이지리아, 동티모르, 피지 등에 예비역 장군들이 대사로 나갔습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예비역 몫의 자리만 대충 헤아려도 50개 이상입니다. 2~3년 임기 만료 뒤 교체를 감안하면 약 150개 자리까지 가져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월 500만 원 이상 연금이 보장되는 예비역들이 대다수이지만 각각 기관의 인사권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권력 놀음에 맛들려 낙하산 일자리를 소망합니다.
군 관련 골프장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태릉, 남수원, 처인, 동여주 등 골프장의 사장은 예비역 준장이, 골프장의 이사는 예비역 중·대령이 틀어쥡니다. 이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자리도 많습니다. 예비역 장군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캠프발 낙하산 일자리는 물경 300~400개 이상입니다. 이에 기생하는 민간인 낙하산 일자리는 부지기수입니다.
KAI 대표이사에는 왜 예비역이?

적재적소의 인사가 아닙니다. 대선 캠프에서 뛰었던 예비역 장성들은 "대선 후보와의 관계, 계급과 연공에 따라 예비역 캠프 내 서열이 정해지고, 그 서열 순으로 원하는 자리를 꿰찬다"고 입을 모읍니다. 캠프 출신 예비역의 기용에 법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능력 본위도 아닙니다. 힘의 논리로 알짜를 차지하는 전근대적 방식입니다. 실력으로 진검승부하는 내부 승진, 퀀텀점프를 꿈꾸는 외부 수혈의 기회를 싹부터 자르는 악습입니다. 예비역 낙하산이 장악한 기관에서 성장,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비역 캠프의 낙하산 투하처 중 최악으로 꼽히는 곳이 우주항공 전문 방산기업인 한국항공우주 KAI입니다. KAI의 강구영 대표이사는 김용현 전 국방장관과 임관 동기이자 친구, 캠프 동지입니다. 둘 다 합참 본부장을 끝으로 함께 군문을 떠났습니다. 국방 상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던 김용현 덕에 KAI 낙하산이 가능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입니다.
KAI 낙하산은 대표이사 한 명이 전부가 아닙니다. "낙하산 부대가 비처럼 내렸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공군 인사장교 출신이 KAI 살림을 총괄하는 이사에, 국정원 출신이 윤리경영 책임자에, 패션과 일본어에 정통한 퇴직 언론인이 홍보 고문에 각각 임명됐습니다. 중간 관리자급에도 예비역 낙하산들이 스며들었습니다.
낙하산의 성적표는 초라합니다. KAI의 주가는 강구영 대표가 취임한 2022년 9월 6월 6만 2천 원에서 현재 7만 원 후반대입니다. 같이 폴란드 잭팟을 터뜨린 경쟁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LIG넥스원의 주가가 10배 이상 오르는 동안 KAI 홀로 옆걸음질했습니다. 매출액 상승률도 미미합니다. 이 정도 되니까 낙하산을 숙명으로 여겼던 KAI 임직원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KAI를 살리기 위해, 대한민국 우주항공의 미래를 위해 차기 KAI 대표이사는 진짜 우주항공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디어 KAI 내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민생 살리기를 위하여

몰려드는 예비역을 정치가 흡수하는 1차적 이유는 신속한 결집에 따른 표의 보장입니다. 헌재의 파면 선고 이틀 만에 민주당을 지지한다며 예비역 장교 거의 100명이 모였습니다. 또 며칠 만에 몇 배로 불어난 예비역들이 나설 태세를 갖췄습니다. 그들이 뭉쳐 표 몰이하면 수천표 확보는 기본입니다.
병역 미필 대선 후보는 별들의 호위를 더욱 반깁니다. 별 몇 개씩 단 예비역들을 병풍처럼 세워 놓으면 안보 이미지가 덧씌워집니다. 안보 후광 효과입니다. 실체 없는 이미지일 뿐입니다. 안보는 예비역이 책임질 수 없습니다. 단언컨대 나라를 지키는 것은 현역 장병들입니다. 예비역 장군들 중에 숨은 보석 참군인도 더러 있습니다. 참군인 예비역들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대선 캠프에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삼고초려라도 해서 모셔야 하는 예비역은 캠프 밖에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명심해야 합니다. 순수한 통찰력으로 무장한 젊은 예비역 군인들도 주목해야 합니다.
보수, 진보 막론하고 대선 후보들의 공통 공약은 민생 살리기입니다. KAI,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 국방기술품질원, 방위산업진흥회, 항공우주산업협회 등에 예비역 대신 내외부의 국방과학과 방산 고수들을 기용하면 방산 경쟁력은 해외 전쟁에 기대지 않고도 강화돼 경제에 보탬이 됩니다. 국방부, 안보실, 국방홍보원 등에 적격의 전문가를 수장에 앉히면 안보는 튼튼해집니다. 각 기관의 구성원들은 승진의 희망으로 일할 맛 나고, 능력있는 외부 인사들은 훌륭한 일자리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대선의 승패는 예비역들이 몰고 온다는 몇천 표로 갈리지 않습니다. 그 몇천 표 포기하면 경제와 안보를 뒷받침해 민생을 알뜰하게 챙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군부의 구습, 예비역들의 대선 결집 관행에서 탈피하는 정치 혁신의 노력에 유권자들은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12·3 계엄을 겪었으니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