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엔 조금은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바로 '조력사'입니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 '미래 사회 대비를 위한 웰다잉 논의 경향 및 과제'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82%)이 '조력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력사는 환자가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직접 투여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찬성한 이들은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불필요하다'(41.2%), '자기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27.3%)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현재 기준 일부 미국 주와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등에서는 조력사를 허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선 2022년에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폐기된 바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해당 이슈와 관련해, 이번 주엔 우리의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SDF가 만난 남유하 작가는 올해 초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사계절, 2025)』라는 에세이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엔 SF 소설 작가이기도 한 남 작가가, 어머니 故 조순복 씨를 스위스에서 떠나보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책에서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나서부터, 어머니와 나눈 매우 사소한 대화들까지도 모두 기록했다'고 적으셨는데요. 어떤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을까요.
남유하 작가: 저는 엄마와 정말 가까운 사이였어요. 제 직업이 작가이니까 잘하는 게 글을 쓰는 일밖에 없고, 엄마와의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책에도 썼듯이 엄마와는 작지만 소중한 추억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억이라고 하면 제가 어렸을 때 소통이 서투른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한테 놀림을 받으면 놀림을 받는 건지도 모르고 집에 오곤 했어요. 집에 와서야 다시 생각해 보고 막 분해서 울곤 했거든요. 그러면 엄마가 항상 "괜찮아, 너는 특별한 아이라서 그래"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그런 엄마 덕분에 저는 제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평소에 소설을 쓸 때에도 죽음에 관한 테마를 많이 다뤄왔어요. 왜 제가 그렇게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게 생각했을까 고민해 봤는데요. 엄마는 암에 걸리시기 전에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셨어요. 그래서 항상 '우리 엄마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주무시고 계시면 코 밑에 거울을 대서 김이 서리는지 확인할 정도였거든요. "엄마 안 아프게 내가 커서 의사가 될게" 이런 말도 자주 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죽음이 삶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Q. 어머니가 편찮으시게 된 이야기를, 가능한 선에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인터뷰 시작 전, 인터뷰이에게 힘든 상황에선 언제든 인터뷰를 중단할 수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남 작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해당 이슈의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남유하 작가: 2009년, 엄마가 65살 되던 해에 유방암 2기 판정을 받으신 뒤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하셨어요. 그 이후로 10년 동안 쭉 검진받으시면서 완치 판정까지 받았는데요. 완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엄마가 더는 아프지 않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겨서 정말 저희끼리는 축제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1년 뒤에, 그러니까 2020년에 그 암세포가 뼈로 전이됐다, 말기라고 하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앞에서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의미가 없더라고요. 제가 그때 보좌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의원실에서 펑펑 아이처럼 울었고요. 그 이후에도 암 전이가 되고 나서는 말기니까 거의 죽음이 가까워진 거잖아요? 그 당시에 『나무가 된 아이』라는 동화집을 내면서 「뇌 엄마」라는 작품을 넣었는데요. 거기에서 엄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렇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그 상황을 그리면서 제 자신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가족들 모두 절망적인 심정이었어요. 뼈로 전이된 암이 굉장히 통증이 심각하거든요. '칼로 콱콱 찌르는 듯한 통증'이라고 했어요. 엄마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주무시다가도 그 통증에 소리를 지르시면서 깨어날 정도였어요. 특히 엄마는 통증이 너무 심하셨고, 약을 꾸준히 복용하셨음에도 전이가 2차, 3차로 이어졌어요. 뼈에서 위, 폐, 나중에는 피부까지 암세포가 전이돼서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러면서 엄마가 죽음을 상상하기 시작하셨어요. 자살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요. 다행히 엄마와 제가 가까운 사이여서 그 생각을 저와 대화로 나눠주셨던 거죠.

Q. 가족 입장에선 어머니가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셨을 때는 말려야 할지 공감해야 할지, 난감했을 것 같은데요.
남유하 작가: 정말 혼란스러운 날들이었어요. 엄마가 너무 힘들어지니까 "내가 극단적 선택을 하면 아빠는 뒤처리를 못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시엔 정말 실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엄마, 그럼 내가 해줄게"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네가 어떻게 알고 집에 올 건데?" 하시면서 암호를 만들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문자를 보내면 제가 가서 뒤처리를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죠. 엄마는 제가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지 않을까 걱정하셨거든요. 이후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이 발견되면서부터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나는 엄마를 절대 혼자 고립된 상태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러던 중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딸, 엄마 스위스 갈까?"
Q. 작가님이 방금 언급하신 물품들의 경우 기사에 그대로 적을 수 없거든요. 그만큼 작가님이 겪으신 일은 공론화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하물며, 엄마와 딸이 나누는 내밀한 대화에서조차 암호가 필요했을 정도로 허들이 높았네요. 감정적인 힘듦을 차치하고라도 '엄마와 지금 이 대화를 나누는 게 맞는가'라는 자문자답이 이어졌을 것 같습니다.
남유하 작가: 그럼요. 그랬죠. 엄마네 집에 갔다가 집에 차를 타고 돌아올 때는 정말 눈물을 쏟지 않은 날이 없었고요. 그런데 끝끝내 엄마가 스위스 디그니타스(조력사망 기관)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역설적이지만 안도했던 것 같아요. 엄마가 그래도 외롭게 혼자 떠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엄마가 예고했던 그 일이 엄마가 혼자일 때 일어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우리가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줄 수 있게 돼 다행이다라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엄마는 2016년도에 '미 비포 유'라는 영화를 보시고. 남자 주인공이 전신마비라서 스위스 조력 사망기관에 가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셨어요. 그때는 막연하게, "나도 나중에 힘든 일이 생기면 저렇게 가고 싶어"라고 하셨어요. 그러다 통증이 극에 달하면서 그걸 떠올리신 거죠. 해외에선 벨기에, 미국의 몇 개 주, 캐나다 등지에서도 조력사망 혹은 적극적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어요. 외국인도 가능한 나라는 스위스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력사망이 불법이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갔다가 돌아와서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가족, 아빠와 저에게 그건 1%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어요.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줘야 한다. 우리 가족은 하나다, 이런 생각으로 함께하는 마지막 여정에 집중했습니다. 저희는 고통의 시간을 단축한 경우라고 생각해요. 다큐멘터리 <우아한 죽음>에서 제닛이라는 분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요. 의학이 발전하면서 자연적으로 사망할 사람을 살려놓고 있는 것이라면, 어디까지가 신의 영역이냐고요.

Q. 어머니의 결정에 대해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남유하: 아빠는 지금도 동의하지 않고 계세요. "나는 찬성한 게 아니라 반대하지 못했을 뿐이야"라고 하시죠. 저야 일터라도 가 있을 때가 있었지만, 아빠는 24시간 내내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그 모습을 보셨기 때문에 차마 말릴 수 없었던 거죠. 엄마는 절대 죽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어요. 고통을 끝낼 방법이 죽음밖에 없었기 때문에... 디그니타스에 가기로 최종 결정하기까지도 망설임과 번복이 있었어요. 암세포가 뼈로 전이됐을 때 병원에서 남은 수명이 2년 정도라고 했고, 엄마는 의지로 3년을 사셨어요. 하지만 마지막 7월 중순쯤 항암을 중단했을 때는 병원에서도 이제 남은 시간은 2개월 정도라고 했죠.
저 역시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고요. 당시 기관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해서 제가 엄마를 대신해서 이메일을 보냈어요. 엄마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절차를 하나하나 제가 밟아야 했기에 심적 부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이게 정말 잘하는 일일까?", "이게 맞을까?" 계속 반복했어요. 출국 전날에도 엄마에게 "지금이라도 취소해도 된다"고 했는데, 엄마는 "내일 간다. 출국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어요. 원래 2023년 8월 25일 출국 예정이었는데, 7월 말에 하지 마비가 오면서 지금 상태로는 못 갈 수도 있겠다 싶어 8월 3일로 당겼어요. 국내에서 선택지가 있었다면 25일까지 22일 동안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더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갈 체력을 남겨두기 위해 이른 이별을 해야 했어요.
디그니타스에서 조력사망을 하려면 우선 '그린라이트'라는 조력사망 허가를 받아야 해요. 의료 기록 등 여러 자료를 요청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이 선택이 본인의 의사가 맞는지, 어떤 이유로 조력사망을 원하는지 등을 적은 '라이프 리포트', 즉 자기소개서예요. 엄마가 한글로 써주시고, 제가 번역해서 제출했어요. 수정도 많이 했고요. 당사자에게 우울증 병력이 있거나, 정신이 온전 상태인지, 제3자의 개입이 없는지도 엄격하게 봅니다.
스위스까지의 여정은 하루하루가 편안한 순간이 없었습니다. 13시간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엄마는 약을 많이 드시니까 물도 마셔야 하고, 비행기에서 화장실에 갈 때도 장애인 화장실이 없어서 턱이 있는 일반 화장실로 조그마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 했어요. 그때 허리에 통증이 다시 오고... 그런 부가적인 고통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엄마는 스위스 도착 후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으셨어요. "빨리 가고 싶다." 당시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라고까지 말씀하셔서 책 제목도 그렇게 정했어요. 고통이 너무 극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가 원하셨던 마지막 소원을 이뤄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Q. 당시 선택에 대해 후회는 없으신가요?
남유하: 엄마의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존중한 것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다만 스위스라는 낯선 나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에, 머물게 된 호텔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미리 확인하지 못한 것, 갑작스러운 하지 마비 때문에 휠체어 준비를 제대로 못한 것, 낯선 동네이다 보니 마지막 저녁에 드시고 싶다고 하셨던 수프를 쉽게 찾지 못한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너무 후회돼요.
Q. 안락사, 존엄사, 의료조력사 등의 개념어 중에서 어떤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남유하: 안락사는 나치를 연상하게 만들어 거의 쓰지 않고요, 존엄사는 조금 모호해요. 모든 죽음은 존엄한데, 특정 죽음만 존엄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조력사망'이나 '의료조력사'가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적합하다고 봐요. 반면, 최근 대니얼 카너먼 사례 이스라엘 출신 심리학자·경제학자이자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1]처럼 특별한 질병 없이 죽음을 선택한 경우는 '선택사'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1]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1] 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사망 이유가 지병이 아닌 조력사망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카너먼의 사망 당시에는 구체적인 사망 원인과 병명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의 오랜 지인인 제이슨 츠바이크 월스트리트저널(WSJ) 칼럼니스트는 최근 카너먼이 스위스의 조력사망 지원 시설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Q. 쉽지 않은 얘기를 책으로 쓰셨는데요.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셨을까요.
남유하: 엄마가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을 도와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나처럼 힘들게 스위스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사명감을 갖고 말하고 있어요. 실제로 지금도 그런 제약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국회에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어 있지만 계류 중이고, 척수염 환자분이 헌법소원을 냈는데도 진척이 없습니다. 저는 이 책이 사회적 논의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착한 법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와 함께 관련 스터디도 하고 있고요.
저희 가족에 대한 기사에 댓글이 1천 개 정도 달린다면 995개 정도는 공감해 주는 내용이었어요. 불편한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조력사망의 필요성에 공감하세요. 암으로 고통받고 있다, 국내에도 꼭 도입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었어요. 최근에 보건사회연구원에서 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2%가 조력사망을 찬성한다고 하더라고요. 평균 수명은 연장됐지만, 건강이 배제된 수명의 연장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점에서 공감이 커진 것 같아요. 제 책을 읽은 친구들이 '이건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자는 이야기'라고 말해주었어요.
예전에는 죽음을 완전한 이별, 단절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서 책을 쓰고,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엄마의 이야기를 계속 듣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엄마가 좋은 말씀을 옆에서 해 주시는 것 같고, 엄마는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연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스위스에서는 공동묘지가 마을 중심에 있고, 죽음을 터부시 하지 않아요. 반면, 우리는 평소에도 장례식장을 나서면 죽음을 그곳에 두고 오는 것처럼 행동하잖아요. 언젠가 제가 겪은 일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려 했더니, '우리, 슬픈 이야기 하지 말자'고 하더라고요. 우리 사회는 죽음을 자꾸 상자 안에 넣어두려는 경향이 있어요. 웰 다잉, 사전연명의향서도 중요하지만,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한 장면이라는 인식이 필요해요.


SDF 다이어리는 SBS 보도본부 미래팀에서 작성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우리 사회가 관심 가져야 할 화두를 앞서 들여다보고, 의미 있는 관점이나 시도를 전합니다. 한 발 앞서 새로운 지식과 트렌드를 접하고 싶으신 분들은 매주 수요일 발송되는 SDF 다이어리를 구독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