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방송과 기사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Q. 오늘 처음으로 소개해주실 영화는 “승부”네요. 세계 최고의 바둑 승부사들의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정 앵커 혹시 한국 바둑의 첫 전성기가 언제쯤인지 아십니까?
보통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으로 얘기들을 하죠. 그럼 그때 한국은 물론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입니다. 둘 다 ‘國手’ 칭호를 받은 바둑 천재들입니다. 영화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 시절을 그린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이창호가 10살 때 당시 서른 세살이었던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갑니다. 내제자는 스승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배우는 제자를 가리킵니다. 바둑계의 독특한 문화죠.
그런데 조훈현 집에 들어갈 때만 해도 입단도 못했던 이창호가 불과 4년 뒤에는 스승을 처음으로 한번 이깁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최고위전에서 스승을 꺾고 우승을 거머쥡니다. 이때 이창호의 나이가 15살, 조훈현은 37살이었습니다. 당시 조훈현은 바로 전해인 1989년 세계 최고의 기전인 제1회 응씨배에서 우승한 세계 최강자였습니다.
영화 ‘승부’는 이 실화를 영화적으로 살짝 가공했습니다.
Q. 조훈현 국수가 응씨배에서 우승하고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에서부터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도 했던 게 생각나네요. 그런데 이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면서요?
네, 이 영화는 사실 4년 전에 이미 촬영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넷플릭스가 2023년에 스트리밍하기로 돼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연 배우인 유아인 씨가 마약 관련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게 되면서 공개가 무기한 미뤄졌습니다. 결국 넷플릭스가 스트리밍을 포기하면서 다른 배급사가 넘겨 받아 극장에서 개봉을 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큰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Q. 현역 시절에는 조훈현 9단은 ‘戰神’, 이창호 9단은 ‘돌부처’라고 불렸잖아요. 결국 이 영화는 두 천재 기사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렇죠. 조 9단은 이병헌 배우가, 이 9단은 유아인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 다 아주 잘 했습니다. 이병헌 배우는 요즘 ‘연기의 신’으로 불리잖아요. ‘연기의 신’이 ‘바둑의 신’의 사소한 습벽까지 비슷하게 재현했습니다. 또 제자에게 지는 스승의 심정도 잘 표현했습니다.
이병헌:
자기가 맡은 역할의 심정이 어떨까를 가장 긴 시간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처럼 실존 인물이 계시는 경우에는 만나 뵙고 실제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고 그 질문의 답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습과 생각과 마음 가짐과 여러 가지 것들을 저는 따로 관찰을 하면서 그 캐릭터를 좀 찾아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유아인 배우도 과묵한 이창호 9단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겉으로 분출하는 연기는 오히려 쉽고 속으로 삭이는 연기가 어떻게 보면 더 어렵다쟎습니까. 뚱한 표정과 애 어른같은 어투까지 이창호 9단을 연기하는 유아인을 보면 확실히 배우적 재능은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유아인 씨 출연을 두고 ‘편집 없이 정면 돌파’ 같은 표현들을 쓰는 기사들이 나오는데, 이건 어불성설이죠. 이병헌 · 유아인 투톱 영화인데 그 중 한 명을 어떻게 편집을 합니까. 개봉을 안했으면 안했지. 말이 안되는 거죠.
Q. 그런데 이 영화는 바둑을 몰라도 볼만 합니까. 보는데 지장은 없습니까?
바둑 몰라도 지장 없습니다. 일단 감독이 바둑을 못둡니다. 이병헌씨도 못둡니다. 촬영 준비하면서 아들과 오목 두면서 연습했다고 합니다. 바둑의 수싸움은 그래픽이나 편집으로 보여주는데 이게 괜찮게 나왔습니다. 김형주 감독은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고 결국엔 이기는 이창호 바둑같은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정적일 수 밖에 없는 바둑 이야기를 그림의 이야기로 이끌어가는 편집의 힘도 큽니다.
Q. 자, 다음 영화로 가보죠. “백설공주”가 개봉했네요. 이 영화도 구설이 좀 있었던 영화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일단 이 영화 “백설공주”는 디즈니의 실사 뮤지컬 영화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 들어있는 “백설공주”는 디즈니가 88년 전에 만든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입니다. 우리가 아는 백설공주의 외모나 의상 모두 그 애니메이션에서 말미암았습니다. 그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독일 동화이기 때문에 백설공주는 당연히 백인이겠죠.
그런데 이번 실사 영화가 입길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백설공주가 백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고편에 ‘싫어요’가 쏟아지고, 배우들은 언론 인터뷰에 잘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개봉했던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 때와 같은 논란입니다. 그때 인어공주 역을 흑인인 할리 베일리가 했었습니다.
이번엔 라틴계 배우인 레이첼 지글러가 백설공주 역을 맡았습니다. 피부색은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백설공주의 원래 제목이 ‘스노우 화이트’, 즉 눈처럼 하얗다는 거잖습니까. 레이첼 지글러가 확실히 그렇지는 않죠. 21세기에 나온 이번 영화에서는 눈보라를 뚫고 태어나서 강인하다는 식으로 ‘스노우 화이트’를 해석했습니다.
Q. 그런데 디즈니가 반발이 큰 데도 불고하고 대중들의 기존 인식과는 다른 이미지를 자사의 캐릭터에 지속적으로 보여주려는 이유는 뭔가요?
디즈니는 근래에 이른바 ‘PC’라고 불리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왔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인종, 성별, 종교 등에 대해 차별적인 표현을 하지 말자는 신념이나 사회 운동을 말합니다. 바람직한 거죠. 이러한 추세를 디즈니가 자사의 콘텐츠에 반영한 겁니다. 물론 PC 입히기가 지나치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런데 디즈니가 단순히 이런 신념만으로 장사를 하진 않겠죠.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관객과 시청자들을 분석했을 겁니다. 분석해보니까 디즈니 캐릭터에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도입하는게 장기적으로 더 큰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결론이 나왔겠죠. 실제로 그런 식의 분석들이 나와 있습니다.
Q. 라틴계의 유색 인종 배우가 연기하는 “백설공주” 실사 영화는 어떻습니까?
일단 줄거리가 제가 어렸을 때 봤던 “백설공주”와는 좀 다릅니다. 실사 영화에서 백설공주는 자신을 구해 줄 왕자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자유와 공정을 추구하는 용기있는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왕자도 안 나옵니다. 흡사 로빈후드같은 도적단 두목이 백설공주의 파트너입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마녀 왕비에 맞서 싸웁니다. 새로운 시대의 백설공주의 탄생입니다.
주연인 레이첼 지글러의 노래 솜씨는 이미 스필버그의 첫 번째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검증이 됐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노래 하나만큼은 흠잡을 데 없습니다. “백설공주”하면 일곱 난쟁이 캐릭터가 중요하죠, 이번 영화는 실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일곱 난쟁이는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백설공주와 붙을 때 이물감이 느껴집니다.
저는 동화와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본 지 하도 오래되고 이제는 큰 흥미가 없어서 백인 배우가 하든 흑인 배우가 하든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굳이?’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중요한 건 새로운 시대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새로운 백설공주를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일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Q. 다음 영화 소개해주실 영화는 얼마 전 열렸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작이라면서요?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작 “플로우”라는 영화입니다. 이번 97회 아카데미는 최초가 많았습니다. 최초의 흑인 의상상 수상자가 나왔고, 최초의 도미니카 출신 미국인 아카데미 수상자가 배출됐습니다. 브라질 최초의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작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 “플로우”는 라트비아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의미가 더 큰 게 미국의 픽사나 드림웍스같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명가를 제치고 받은 장편 애니메이션상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픽사는 “인사이드 아웃2”를, 드림웍스는 “와일드 로봇”을 후보로 올린 바 있습니다.
Q. 어떤 내용이길래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까
일종의 문명의 몰락 이후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지구에 대홍수가 덮친 뒤 살아남은 고양이 한마리가 골든 리트리버 한마리, 카피바라 한마리, 여우원숭이 한마리, 뱀잡이수리 한마리와 함께 낡은 배를 타고 어디론지 항해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심지어 류와 종도 다릅니다. 성격도 다릅니다. 한배를 타긴 했지만 서로를 타자화던 이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는 게 이 영화의 재미입니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종이면서 극심하게 서로 반목하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우화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는 대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음악과 짐승의 갸르릉하는 소리 등 현장음만 나옵니다. 동물을 의인화하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80년대 히트곡 중에 이태원의 ‘솔개’라는 노래가 있죠,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이라는 첫 소절 가사가 문득 떠오르는 영화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림체도 정교하지 않습니다. 무료 소프트웨어를 쓴 저예산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동물의 움직임과 몸짓이 지극히 실제적으로 보인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Q. 다음 영화로 가시죠. “고독한 미식가”가 영화로도 개봉했군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드라마죠. 10년 동안 시즌 10까지 나왔습니다. 주인공 고로상을 연기하는 마츠시게 유타카가 이번에는 출연, 각본, 감독까지 일인삼역을 하면서 영화를 내놨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혼밥하고, 일본 도쿄에서 혼밥하고, 한국의 거제도에서도 맛있게 혼밥합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국물 맛을 꼭 다시 맛보고 싶다는 한 일본 노인의 부탁을 받고 궁극의 국물을 찾아나선다는 이야기가 뼈대입니다. 살짝 스포를 하자면 한국 사람들이 술 먹은 다음날 한 그릇 시원하게 들이키는 ‘00 해장국’의 국물이 궁극의 국물맛을 내는데 일조합니다.
Q. 마지막으로 그 밖의 볼만한 영화들 소개해주시죠
한국 영화 한 편과 할리우드 영화 한 편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강하늘 주연의 한국 영화 “스트리밍”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유튜브 난장판을 빗댄 범죄스릴러물입니다. 구독자수 1위 스트리머가 라이브 방송을 켠 채 연쇄살인범을 쫓는 이야기입니다. 시청자는 자극을 좇고, 스트리머는 돈과 명성을 좇다가 가는 끝은 어디인지, 강하늘이 원맨쇼를 펼칩니다.
다음은 “블랙 백”입니다. 26살에 칸 영화제 최연소 황금종려상을 받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최신작입니다. 제작진이 화려한 첩보물입니다. 마이클 패스빈더와 케이트 블란쳇이 첩보 기관에서 일하는 부부로 나오고, “쥬라기 공원”과 “미션 임파서블” 등을 쓴 데이빗 코엡이 각본을 썼습니다. 남편이 내부 배신자를 쫓는데, 용의자 중의 한 명이 부인입니다. 화려한 액션보다는 머리 속 수싸움을 펼치는 심리 스릴러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