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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메모리의 성공 경험이 독이 됐나'…삼성 파운드리에는 빛이 들까

지난해 10월 8일,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전영현 부회장이 주주와 투자자 등을 향해 반성문을 썼다. 2024년 3분기 잠정 실적을 발표한 당일이었다.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을 끼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삼성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는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 복원"을 제시했다.

전영현 삼성전장 DS부문장, 사과문

한 달 뒤인 지난해 11월 15일, 삼성전자는 이사회를 열고 "항후 1년간 총 10조 원의 자사주를 분할 매입하는 계획을 의결했다"고 발표했다. 4년 5개월 만에 주가가 4만 원대로 내려앉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실적 부진에 따른 주가 하락으로 불만이 많은 주주들을 달래기 위한 방안이었다.

10조 원 중 3조 원은 주식을 소각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기술 개발이나 M&A 등에 투자할 수 있는 3조 원을 허공에 날려 보낸 셈이다. '근원적 기술 경쟁력 복원'이라는 삼성전자의 첫 번째 과제와는 충돌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HBM이 좋아지고, 파운드리에서 tier 1(최우수) 고객을 확보하면 삼성전자 주가는 자사주 소각을 하지 않아도 올라갈 것"이라고 평했다.

메모리 반도체, HBM과 관련한 이야기는 앞선 취재파일에서 살펴봤다. 이번에 반도체 위탁생산, 파운드리에서 삼성전자의 현실과 과제를 살펴보자.
▷ [취재파일] "성능 개선보다 비용 절감"…메모리의 절대 강자 삼성전자는 왜 위기를 맞았나
 

"생산 능력이 고객 수용 충족시키지 못해"…영업이익률 45.7%의 TSMC

타이완 TSMC (사진=연합뉴스)

지난 1월 16일, 타이완의 파운드리 업체 TSMC가 2024년 4분기 및 2024년 연간 실적을 발표했다. 2024년 매출은 전년도보다 30% 증가한 900억 달러, 우리 돈 131조 원이 넘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는 메모리, 시스템(설계), 파운드리까지 모두 하지만 지난해 매출은 TSMC보다 적은 111조 원 수준이었다.

더 놀라운 건 TSMC의 영업이익률이다. 지난해 영업이익률을 45.7%로 100원어치를 팔면 50원가량 남는 장사를 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반도체 전체 영업이익이 15조 원 정도로 영업이익률은 13.6%이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시스템 부문 등 세부적 영업이익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데, 증권가에선 TSMC와 업태가 같은 파운드리 부문에서 4조 원가량의 적자가 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차이는 TSMC의 압도적 시장 장악력 때문이다. 지난해 4분기 기준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7.1%에 달했다. 엔비디아,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자사의 반도체를 생산해달라고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다. 웨이 저자 TSMC 회장은 지난 1월 실적 발표회에서 "TSMC의 생산 능력이 고객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도권을 TSMC가 쥐고 있다 보니 45.7%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도 확실한 1등"…하지만 더 커진 격차

불과 6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2019년 1분기 TSMC의 시장 점유율은 48.1%로 절반에 못 미쳤다. 당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9.1%였다. '67.1% vs 8.1%'이었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TSMC와 한번 겨뤄볼 만한 상황이었다. "(2030년까지)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확실한 1등을 하도록 하겠다"는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의 말은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재용 삼성 회장

그런데 왜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부진을 거듭하고 있을까. 트렌드포스의 조앤 치아오 애널리스트는 메모리 반도체에서의 성공이 파운드리 시장에서 독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조앤 치아오는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운영하던 방식을 파운드리 사업에도 적용을 했는데, 이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무슨 말일까.

앞선 취재파일에서 살펴본 대로 (범용) 메모리는 일반적인 공산품에 가깝다. 정해진 규격대로 대량 생산해 싸게 공급하는 게 이 시장의 일반적 운영 원리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치킨 게임'이 벌어졌던 것도 이 시장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고객의 요구나 피드백을 세심하게 고려한 유인이 크지 않다.

파운드리는 시장의 성격이 다르다. 조앤 치아오는 "파운드리 시장은 단순히 기술력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파운드리 시장에선) 고객의 피드백을 듣고 그 요구에 맞춰 기술력을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기술이 앞서거나 안정적인 것만이 성공의 요소가 아니라, 고객과의 소통과 피드백 반영이 필수적이다"는 것이다.
 

"파운드리는 서비스업에 가까워"…파운드리가 설계 업체에 도움주기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등에서 30년 넘게 일한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의 설명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김 교수는 "파운드리 산업은 서비스 산업에 가깝다"고 말한다. 파운드리는 반도체를 설계한 회사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산업인데, 이 과정에서 설계 회사의 요구사항을 잘 반영하는 게 파운드리 산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파운드리 업체가 설계 회사의 요구 사항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파운드리 업체 쪽에서 오히려 설계 회사에 조언을 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이종호 서울대 교수는 학회에서 만난 타이완의 한 대학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TSMC 자문역이기도 한 교수의 이야기다.

"예전에 애플에서 TSMC에 휴대전화 들어가는 AP로 추정되는 제품을 설계해서 생산을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생산했더니 제품에 불량이 발생했다. TSMC가 분석을 해봤더니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통상적인 회사면 애플에 설계를 다시 해 오라고 할 텐데, TSMC는 자사의 엔지니어를 애플에 보내 도와줘도 괜찮겠냐고 제안했고 애플이 수용했다. 이후 설계를 수정해 TSMC가 해당 제품을 생산했다고 한다."

애플
 

여러 빅테크 업체와 협업으로 학습한 TSMC, 삼성 파운드리의 가장 큰 장벽

위탁생산 업체인 TSMC가 설계 회사인 애플에 설계와 관련해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건 다양한 빅테크 기업의 제품을 생산하며 터득한 노하우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 엔진 설계자보다 오랫동안 엔진을 생산하거나 수리해 본 사람이 더 전문성을 가질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른바 경험을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의 결과다.

파운드리 산업에서 고객사와의 협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세계적 리서치 기업 가트너의 애널리스트 토마스 치앙은 SBS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파운드리 산업에서 중요한 3가지 요소로 '인재 관리'와 '기술 로드맵 집중'과 함께 '고객사와 함께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을 꼽았다. 글로벌 한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면 당장 매출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경쟁력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제일 중요한 과제는 글로벌 고객사 확보다. 삼성 파운드리의 과거 고객이었던 애플이나 퀄컴 등은 모두 TSMC로 옮겨갔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반등하기 위해서는 미국 빅테크 업체들과의 트랙 레코드(영업실적)를 조금씩 만들어 내고 그것을 통한 신뢰를 시장에 줘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노 센터장은 "삼성한테는 최소한 4, 5년 정도는 더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삼성 파운드리에는 지정학적 이슈로 기회가 있다"

4, 5년이나 더 필요하다면 삼성전자는 그냥 파운드리 사업은 접고 메모리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는 SMIC 등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가 급속도로 시장 점유율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중국 정부를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을 머니 게임에게 이길 수 있을까. 합리적인 질문이다.

문제는 HBM으로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과거에 비해 성장성이 떨어지고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해서는 큰돈을 벌기 힘들다는 의미다.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큰돈을 벌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서 삼성전자는 엔비디아나 퀄컴 등에 비해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 삼성전자에 있어 파운드리는 그나마 해볼 만한 시장이다. 가트너의 토마스 치앙에 따르면 파운드리는 2023년부터 2028년까지 연평균 12%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이기도 하다.

파운드리는 삼성전자 입장에서 기회가 될 수 있는 산업이기도 하다. 트렌드포스의 조앤 치아오 "삼성 파운드리에게는 지정학적 이슈로 인한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미국 고객들이 TSMC에만 의존하는 걸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이완에 위치한 TSMC가 중국과의 양안 갈등에 따른 영향으로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진 않을지 미국의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TSMC에 대한 의존이 가속화됐을 때 TSMC가 가격을 높게 불러도 따라갈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미국 기업들이 보안 문제 등으로 중국 기업에 생산을 의뢰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여러모로 고객들 입장에선 삼성 파운드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생산라인 (사진=삼성전자 제공, 연합뉴스)

"메모리 반도체 성공을 위해서라도 파운드리는 필요하다"

메모리 반도체에서의 반등을 위해서라도 삼성 파운드리는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트렌드포스의 엘리 웡은 "삼성전자 메모리 부문이 HBM 여파로 단기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삼성 파운드리와 협력하면서 경쟁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SK하이닉스는 현재 TSMC와 협업하면서 AI 반도체 시장 호황의 결과를 누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HBM 최신 제품을 엔비디아에 납품할 수 있게 되더라도 TSMC가 삼성전자 HBM과 엔비디아 GPU를 합치는 작업, 즉 패키징 작업을 순순히 맡아줄까. 삼성전자 입장에선 자사 파운드리에 맡겨 AI 가속기 완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AI 가속기를 적시에 더욱 빠르게 공급할 수 있지 않을까. 엘리 웡의 이야기는 이런 차원이다.

물론, 이런 기회 요인이 현실이 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기술력 확보다. 더 정확히는 삼성 파운드리가 제품의 수율을 높이는 것이다. 현재 삼성 파운드리의 TSMC에 비해 가장 열세에 있는 건 완제품 생산 비율, 즉 수율이 낮기 때문이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글로벌 빅테그 기업들을 고객으로 확보하지 못한 영향이 크지만, 수율을 높여 경제성이 올라간다면 빅테크 기업들이 다시 삼성 파운드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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