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정파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건국 이후 가장 큰 손해를 끼친 테러 공격을 벌였습니다. 민간인 1,200여 명을 학살했고, 200명 넘는 이스라엘 사람을 납치해 인질로 잡아갔으며, 이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명백한 전쟁범죄였습니다. 하마스가 테러 공격을 감행한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정치학자 아마니 자말 프린스턴대학교 공공정책 대학원장과 이스라엘계 미국인 정치학자 케렌 야르히밀로 컬럼비아대학교 국제정책 대학원장이 함께 쓴 칼럼을 번역하고 나서 덧붙인 해설의 제목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였습니다.
그 후로 1년 반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올해 초 포로 교환을 전제로 한 휴전에 가까스로 합의했지만,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워 보이던 휴전 협정은 이번 주 이스라엘의 대규모 가자 공습으로 사실상 완전히 깨졌습니다. 약속을 어긴 쪽이 누구인지 잘잘못을 따지며 책임 공방을 벌이는 양측을 보면, 안타깝게도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바로 저 '공통분모의 실마리'도 찾기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간의 신뢰가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 불신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 하면, 아주 기본적인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시각과 이해부터 양측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쟁이나 분쟁 지역의 많은 역사가 그렇듯 실체적 사실보다 어느 편에 유리하게 해석될 만한 사실의 조각들을 매끄럽게 추리고 짜맞춘 설명인지가 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이러다 보니, 상대방이 말하는 역사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일축하고, 결국 공통분모를 찾기 위한 대화는 물꼬도 트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활동가들이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 "노 아더 랜드"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서안지구(West Bank)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실 그대로 화면에 잘 담아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특정 세력의 정치적인 견해만 반영한 프로파간다로 실체적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미국에서 양측의 종전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이 이 영화를 평가한 칼럼을 번역했습니다.
칼럼에도 언급됐듯 정치적인 견해 차이와 친이스라엘 단체들의 압력 때문에 이 영화는 미국에서 대체로 외면받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다른 영화처럼 대형 배급사가 앞다퉈 계약을 맺자고 하거나,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에 어렵잖게 입점해 상영할 법도 한데, "노 아더 랜드"는 유독 심기가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몇몇 독립 영화관에서 영화를 틀어주는데, 제가 사는 뉴저지주 프린스턴의 동네 영화관에서도 이번 주까지만 "노 아더 랜드"를 상영하길래, 저도 영화를 봤습니다.
오늘은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나눠보려 합니다. 다만 제 개인의 정치적인 견해는 최대한 빼고, 이 글과 지난 글의 제목처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라는 더 근본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가 서로를 조금도 믿지 못하는 양측이 공통분모를 찾고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제 생각을 위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르겠어...", "글쎄...", "나야 모르지..."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삶
정확히 횟수를 세보진 않았지만, 영화에서 감독이자 서사의 주인공인 바젤 아드라가 대화 중에 가장 많이 내뱉은 말은 (아랍어를 영어로 번역한 자막 기준) "I don't know"였습니다. 맥락에 따라 "글쎄, 잘 모르겠네.", "나야 모르지...", "낸들 알겠어?"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바젤의 모습에선 평생 몸에 밴 일종의 무기력함이 엿보입니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당장 바뀌는 건 없다, 어차피 저들은 계속해서 우리 마을을 파괴하려 할 테고, 안타깝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는 태도가 보입니다.
그런 바젤의 모습은 보는 저도 괜히 힘이 빠지게 했는데, 한편으로 만약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젤이 무턱대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담았다면 작위적으로 연출한 티가 났을 겁니다. 평생 이스라엘이 쳐놓은 유무형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무기력함을 화면에 잘 담은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기본에 충실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억지로 희망을 말하거나 선동적인 장면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젤은 열의에 찬 유발 아브라함을 달래며 에둘러 핀잔을 줍니다. 유발은 계속되는 이스라엘군과 정부의 차별, 정착민들의 폭력에 분노하며 자기가 더 부지런히 취재하고,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더 많이 써서 세간의 관심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자책합니다. 그러자 바젤은 이렇게 말하죠.
"유발, 너를 보고 있으면 아주 열정이 넘쳐. 어쩌면 그래서 문제일지 몰라. 마치 열흘만 바짝 노력하면 이스라엘의 점령이 끝날 거라고 믿고 자기 자신을 쥐어 짜내는 것 같거든. 벌써 수십 년간 이어진 폭력이야. 아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당장 이 상황을 바꿔낼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없을 거야."
이 말에 유발은 자기가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면서 되묻습니다. "뭐든 할 수 있는 건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럼 어떡해야 하는데?"
그러자 바젤은 다시 말합니다. "나도 모르지. 그렇지만 너무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붓진 말라고... 그러다 지쳐 떠나면 안 되니까. 오래 갈 싸움이고, 버티는 것도 중요해."
마치 주변 사람을 향해 "서두르지 말자, 쉬지도 말자"고 다독이며 독려하는 바젤 아드라의 모습은 무기력하기 쉽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 끈기와 용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공감의 문제
마사페르 야타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마치 게임 속 NPC(Non-Player Character, 게이머가 조종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에 일종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캐릭터) 같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군과 정착민들은 마사페르 야타와 거기 사는 사람들을 걸리적거리면 철거해 버리고, 버튼 하나 눌러서 가볍게 지우면 그만인 존재처럼 대합니다. 그런데 당연히 이들은 NPC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죠. 사람이니까 당연히 삶의 터전이 눈앞에서 무너지고, 사랑하는 가족이 총에 맞고 군홧발에 밟히면 악을 쓰며 저항합니다. 영화 속 몇 안 되는 격정적인 장면은 NPC 취급받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표출한 날것의 감정을 담았습니다.
과학적 사실을 이해하고 판별하는 건 지능과 사고력의 영역입니다. 오늘날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멍청이 취급을 받을 겁니다. 코로나19 초기 "살균제를 직접 인체에 주사하면 이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아이디어 차원이지만, 한 번 검토해 보는 거 어때?"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미국 대통령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 사람의 지능 수준을 우려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은 과학적인 사실과 달리 어느 편에 서서, 즉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안을 두고도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사실에 비하면 옳고 그름,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도 더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나와 우리가 얽혀 있는 역사가 아니라, 철저히 남의 나라 역사를 제삼자로서 접할 때는 어느 한쪽에 더 많은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하며 역사를 이해하곤 합니다.
강자와 약자가 비교적 명백하게 나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강자의 논리를 떠받들고, 강자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쪽 편을 드는 것이 옳고, 어느 쪽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다만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NPC 취급을 받던 게 그리 옛날 일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러한 공감의 쏠림 현상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합니다.
이에 관해서도 영화 속에서 바젤은 인상적인 말을 합니다. 바로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인종청소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고통을 겪은 유대인들이 왜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괴롭히는 걸지 일종의 자문자답을 하는 장면입니다. 바젤은 "(유대인이) 끔찍한 고통을 끝내 극복해 낸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야. 약자로 처절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 약자를 헤아려주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이 힘으로 우리를 제거하고 제압하려 해도 우리는 절대 이 땅을 떠나지 않을 거고, 끝내 살아남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가장 위대한 캐릭터: 유발 아브라함
사실 바젤 아드라의 행동은 보다 보면, 또 가만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무기력하기 쉬운 상황이지만, 또 자신의 공동체와 삶의 터전을 파괴하러 오는 이스라엘군, 정착민들과 매일 같이 대치하다 보면 저항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별로 없기도 합니다. 내가 바젤 아드라였다면 과연 이렇게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아마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젤 아드라의 삶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발 아브라함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녹색 차량 번호판을 단 이등 시민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 노란색 차량 번호판을 단 일등 시민 이스라엘 사람이니까요. 유발은 자기 차를 타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법의 보호를 받는 자유로운 시민이죠. 그에게 누구도 '이등 시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협박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발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바젤은 이렇게 확 타올랐다가 이내 시들해지면 어쩌나 걱정해 '열정이 넘친다'고 에둘러 핀잔을 줬는데, 적어도 지금까지 몇 년을 같이 지내며 바젤과 의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된 유발은 사실 저로서는 감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절대 못 했을 겁니다. 유발 아브라함의 용기는 그런 수준입니다.
이스라엘 정부와 극우 성향 인사들은 유발 아브라함 같은 사람에게 배신자, 반역자란 낙인을 찍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과 연대 덕분에 하마스에 붙잡혀 간 이스라엘 인질을 조건 없이 조속히 석방하라는 그의 외침은 다른 누구의 말보다도 울림이 큽니다. 적어도 유발 아브라함을 향해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고 NPC처럼 파괴되고 지워질 때 당신은 어디서 무얼 했냐고, 침묵도 동조라고 비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유발은 자신을 향해 유대인의 배신자, 반역자라고 비난하는 동료 이스라엘 시민을 향해 "그렇지 않다, 나야말로 이스라엘을, 유대인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고 맞받아칩니다.
이쯤에서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노 아더 랜드"는 공교롭게도 2023년 10월까지 촬영한 내용을 가지고 편집해 만든 영화입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얼마 뒤 하마스가 테러 공격을 감행했죠. 영화에 드러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이 힘겹고 불공평하다고 해서 10월 7일 테러 공격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영화는 그런 논리를 만드는 데 엉뚱하게 쓰이면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폭력을 가하는 이들과 그들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심지어 네타냐후 총리와 하마스는 한편이 됩니다. 그 기준을 정확히 가려내는 데 이 영화가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공통분모'는 바로 참혹한 일을 겪어도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고,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숭고한 삶에 있습니다.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이들은 이를 파괴하려는 모든 움직임과 획책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런 싸움이 벌어진다면, 기꺼이 유발 아브라함이나 바젤 아드라의 편에 서서 전 세계의 양심적인 이들과 평화를 위해 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배신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이웃과 평화롭고 안전하게 공존하는 길을 만들어 나가는 선각자에 가깝습니다. 오늘 글은 바젤 아드라와 유발 아브라함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짧게 남긴 수상 소감을 번역하며 마무리합니다. 먼저 바젤 아드라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