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출 공화국…세계 2위 가계부채 비율, 끊임없이 통화정책 '발목'
우리나라 가계의 빚(부채)은 경제 규모(국내총생산·GDP)를 고려할 때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 수준인 것으로 국제기관들의 조사에서 확인됐습니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로 상징되는 과도한 주택 투자 열기에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는 정책까지 더해져 GDP 대비 가계대출 비율이 계속 90%를 웃돌면서 경제 성장과 통화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올해 역시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등으로 2∼3개월 후 가계대출이 급증하면 한국은행이 경기 침체에도 기준금리를 낮추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16일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Global Debt)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1.7%로, 세계 38개국(유로 지역은 단일 통계) 중 2위를 기록했습니다.
비율이 더 높은 국가는 캐나다(100.6%)가 유일했습니다.
한국은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 이래 2023년까지 100%를 웃돌면서 약 4년간 '세계 최대 가계부채 국가'의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국민계정 통계 기준연도 개편 등으로 2023년 말 비율이 갑자기 93.6%로 크게 하향조 정되면서 순위가 2위로 내려왔습니다.
지난해엔 2∼3분기 가계대출 급증세가 4분기에 진정되면서 비율이 91%대까지 낮아졌습니다.
가계부채비율은 지난해 1.9%포인트(p) 떨어졌는데 이는 38개국 중 네 번째로 큰 하락 폭입니다.
다만 전체 신흥시장 평균(46.0%)이나 아시아 신흥시장 평균(57.4%)은 물론 세계 평균(60.3%)을 여전히 크게 웃돕니다.
가계 빚이 수년간 국가 경제 규모의 90∼100%에 이르는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은의 '가계신용 누증 리스크 분석과 정책 시사점' 연구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신용비율(3년 누적)이 1%p 오르면 4∼5년 시차를 두고 GDP 성장률(3년 누적)은 0.25∼0.28%p 떨어집니다.
더구나 가계신용이 늘어나면 3∼5년 시차를 두고 '경기 침체'(연간 GDP 성장률 마이너스)가 발생할 가능성도 통계적으로 커졌습니다.
특히 가계신용 비율이 80%를 넘는 경우, 중장기뿐 아니라 단기 시계에서도 소비 위축 등으로 성장률이 하락하고 경기 침체 발생 확률은 더 높아지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80%를 넘어가면 경제 성장이나 금융안정을 제약할 수 있는 만큼, 이 비율을 90%를 거쳐 점진적으로 80%까지 낮추는 게 목표"라고 여러 차례 강조 했습니다.
가계부채 증가세가 안정되지 않으면 물가와 성장 등에 초점을 맞춰 통화정책을 펴기가 어려워집니다.
지난해 8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가 역대 최장 기록인 13연속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할 당시에도 주요 배경은 치솟는 수도권 집값과 가계대출 등 금융 불안이었습니다.
정치권과 시장 등에서 2분기 역성장(-0.2%) 등으로 선제적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금통위는 금리까지 낮춰주면 집값과 가계부채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8월 금리인하 실기론에 이 총재와 한은은 당시 가계부채 위험이 경기 위험보다 더 컸다고 일관되게 설명합니다.
금리 인상기에도 막대한 가계부채는 큰 짐이 됩니다.
물가 등이 빠르게 올라 기준금리를 올리고 싶어도, 가계 이자 부담 급증과 대출 부실 우려에 머뭇거리게 됩니다.
올해도 가계대출과 집값 불안이 한은 통화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금융권 전체 가계대출 잔액(1천672조 원)은 1월보다 4조 3천억 원 증가했습니다.
지난 1월 10개월 만에 9천억 원 줄었다가 한 달 만에 다시 늘었습니다.
기준·시장금리와 함께 대출금리가 떨어진 가운데 작년 말까지 가계대출을 조 여온 은행권이 연초 각종 대출 규제를 풀었고, 이사 철까지 겹쳤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달 들어서는 그만큼 빠르게 늘지 않고 있습니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3월 13일 현재 가계대출 잔액은 737조 868억 원으로, 2월 말(736조 7천519억 원)보다 3천349억 원 늘어나는 데 그쳤습니다.
2월 증가 폭(3조 931억 원)의 약 10분의 1 수준입니다.
이달 들어 13일까지 이들 은행에서 취급된 주택구입자금 용도의 신규 주택담보대출(1조 9천268억 원)도 영업일 수를 고려해 지난달 전체(7조 4천878억 원)와 비교하면 다소 증가 속도가 더뎌졌습니다.
하지만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이후 서울 집값이 다시 오르고 거래도 늘어나면서 2개월 안팎의 시차를 두고 가계대출이 급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최근 서울과 경기 지역 주택시장에서 실제로 거래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며 "금리가 낮아진 가운데 공급 부족 불안 심리도 있고, 하반기 대출 규제 강화(스트레스 DSR 3단계) 전에 집을 사려는 수요도 많다. 따라서 가계대출이 감소세로 전환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경고했습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토허제 완화 이후 실제 계약을 앞둔 대출 상담이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두달 정도 뒤 잔금을 치를 시점에 가계대출이 뚜렷하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토허제 완화나 지난해 2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두 달 연기를 부동산 경기를 살리기 위한 정책 결정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정책은 가계대출을 부추기면서, 은행에 가계대출 증가 억제를 동시에 주문하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만약 우려대로 5월쯤부터 본격적으로 가계대출이 빠르게 불어나고 집값도 뛰면, 한은 금통위가 2분기나 3분기 추가로 기준금리를 낮추는 데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한은도 최근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서 "금융 여건이 완화되는 가운데 은행들의 가계대출 관리 조 치 완화, 서울 일부 지역의 토허제 해제 영향 등이 주택가격 상승 기대와 가계부채 증가세를 자극할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 했습니다.
박종우 한은 부총재보 역시 "서울 일부 지역 토허제 해제 영향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2월 서울 아파트 거래량이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늘어난 측면이 있다"며 "아파트 거래가 늘면 한두 달 시차를 두고 가계부채 증가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우려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