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막스 베버는 저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국가를 "물리적 강제력 혹은 폭력을 독점하는 정치 결사체"로 정의했습니다. 오늘날 국가는 대부분 폭력을 독점하는데, "강제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 국가"가 되려면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보통 몇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군대와 경찰, 사법 기관 등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 기관이나 정부 조직은 법과 규범, 관습의 제약을 받습니다. 아무리 공권력이라고 해도 무한정 허락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입니다. 군을 지휘하고 명령을 내리는 궁극적인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군대는 계급과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삼는 조직이지만, 동시에 군이 궁극적으로 '충성'해야 하는 대상은 (군 통수권자가 아닌) 국가와 그 나라의 헌법입니다. 대통령이 국가의 바탕인 헌법을 준수하는 한 군 통수권자의 명령을 따르는 게 곧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 되지만,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하고 어기거나 헌법에 어긋나는 명령을 내리면 군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첫 번째 임기 마지막 해에 국방장관,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 장성들과 격한 마찰을 빚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 들어 드디어 군을 향해서도 칼을 빼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국방부 장관이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던 피트 헥세스를 국방부 장관에 앉힌 데 이어 군 장성도 '트럼프식 인사'를 비켜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시작은 지난달 21일 "금요일 밤의 학살"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의 학살"
지난달 21일 트럼프 대통령은 군 고위 장성 6명을 해고했습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느닷없는 대거 직위 해제였으며, 트럼프의 많은 인사 조처가 그렇듯 구체적인 해임 사유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해고된 장성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바로 찰스 Q. 브라운 주니어 합참의장이었습니다. (이름과 중간 이름의 약자를 따 통칭 "CQ 브라운")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3월, 당시 공군 태평양 사령관이던 CQ 브라운 중장을 대장으로 승진시키며 공군참모총장으로 지명했습니다. 이후 6월, 상원의 승인을 거쳐 8월에 공군참모총장이 됐죠. 이어 2023년, 바이든 대통령은 신임 미군 합참의장으로 CQ 브라운 대장을 임명했습니다. 흑인 남성 최초로 공군참모총장에 오른 브라운 총장은 역시 흑인 남성 최초로 미군 합참의장이 됐습니다. 당시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도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남성 국방장관이었으므로, 국방장관과 군 합참의장이 둘 다 흑인인 것도 최초였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CQ 브라운을 합참의장으로 임명할 수 있던 건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앞서 브라운을 합참의장 후보(인 공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해 줬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금요일 밤의 학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5년 전 본인의 인사를 결과적으로 뒤집었습니다. 공군참모총장 후보를 백악관 집무실로 불러 지명하는 행사를 열면서까지 CQ 브라운의 업적을 치하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4년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않은 합참의장에게 '함량 미달'이란 낙인을 찍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해고 사실을 짧게 통보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프렌치는 직무를 수행할 역량이나 자질에 문제가 있기보다는 트럼프가 대통령 본인에게 충성하지 않는 군 장성들을 골라 해고해 버렸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CQ 브라운의 경우 공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씨 사망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모든 언론이 지적합니다. 백인 경찰의 과도한 폭력적 업무 집행에 무기도 소지하지 않던 흑인 민간인이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사망하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구조적인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는데, 이때 공군참모총장 지명자 신분이던 CQ 브라운은 5분 남짓한 분량의 영상을 올렸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씨 사망 사건에 대한 의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건 피하면서도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보이지 않는, 때로는 노골적이던 차별과 부조리를 담담하게 지적한, 울림이 무척 컸던 메시지였습니다.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CQ 브라운이 당시 공군참모총장으로서 메시지를 낸 것보다도 군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당시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에 동조하는 모든 군 장성에게 격노했다고 분석합니다. 2020년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기도 했지만, 11월 선거를 앞둔 시점이기도 했죠.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시위가 세를 불릴수록 자신의 재선 가도에 불리하다고 여긴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 현장에 군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제압하고 질서를 유지하려 했는데, (자신이 임명한) 마크 애스퍼 국방장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이 결사적으로 여기에 반대하자 이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자비 없는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애스퍼, 밀리는 이미 해고돼 없지만,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고 백악관에 와서 보니 당시에 조지 플로이드 씨의 사망에 대한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던 군 장성이 합참의장이 돼 있으니, 트럼프로서는 CQ 브라운이 당연히 군 내에서는 '해고 1순위'였을 겁니다.
CQ 브라운 합참의장과 함께 리사 프란체티 여성 최초 해군참모총장, 그리고 군 법무관들까지 대거 해임됐습니다. 헥세스 국방장관이 오랫동안 문제 삼아 온 'DEI 인사 되돌리기'를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고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정부 요직을 채울 것이며, 군도 예외가 아님을 선포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 통수권자를 국가로 동일시할 수 있을지를 두고는 논쟁이 불가피하지만, 어쨌든 트럼프는 '내가 곧 국가이므로, 군은 통수권자인 내게 충성해야 한다.'라고 선언하고, 기선 제압에 나선 셈입니다.
"금요일 밤의 학살"이 정당했는지를 두고는 한동안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므로, 법적, 절차적으로는 문제 될 게 없지만, 의회는 청문회를 열어 정부에 해임 사유를 따져 물을 수 있으며, 상원은 후임자 임명을 미루거나 인준하지 않는 식으로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 의원 중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운털 박힐" 각오를 하는 사람이 몇 명은 있어야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CQ 브라운의 후임 합참의장으로 지명한 댄 케인 전 공군 장교에 관해 살펴보면, 트럼프가 원하는 인사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케인은 CQ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공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입니다. 다만 브라운 의장과 달리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 뒤 군수 업체 및 투자 회사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민간인 신분입니다. 앞서 합참의장에 오를 수 있는 '승진 대상'이 정해져 있다고 했는데, 내규를 어기고 이미 퇴역 장성인 케인을 합참의장으로 '특진'하려면 마찬가지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