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휴전을 중재하며, "팔레스타인 일대를 중동 최고급 휴양지로 개발하겠다"고 말한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말로 주권주의(sovereigntism)라는 개념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주권주의는 백인, 기독교 중심의 보수적 가치관에 반하는 국제주의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를 경멸합니다. 세계화도 미국인의 삶에 이로울 게 없다며 싫어하는 주권주의자들은 영토의 확장을 통해 자원을 확보하는 일처럼 금전적인 이득과 직결되는 제국주의적 팽창이 아니면 다른 나라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 자체를 반기지 않습니다. 이 개념을 소개한 칼럼을 쓴 럿거스대학교 역사학과의 제니퍼 미텔슈타트 교수가 파나마 운하를 다시 소유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보고 주권주의를 떠올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대선 후보 시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24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장담하던 트럼프는 이달 초 기존 미국 정부가 보여준 것과 아주 다른 기조로 가득한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처음부터 3년 전 일방적으로 침략당한 뒤 막대한 희생을 감내한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러시아와 직접 협상 테이블을 차리는 듯한 인상을 주며 국제 사회의 우려를 자아냈던 트럼프는 전쟁을 끝내는 방법과 내용 면에서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계속 요구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월요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년을 기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규탄하며 종전을 촉구한 UN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이어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은 따로 상정해 통과시킨 UN 안보리 결의안에서 러시아의 침공 사실을 쏙 빼놓고 공허한 평화를 촉구합니다. 20세기의 전통적인 주권주의자들이 무덤에서 나와 UN에서 활동하는 미국을 본다면 그 자체로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재무제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동맹이나 우방국도 바로 내팽개치는 모습이나 자신이 속한 나토(NATO)의 안보에 중요한 사안인 만큼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던 건데 갑자기 여기에 가격을 매겨 5천억 달러 상당의 희토류를 포함한 자원으로 미국에 꿔준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트럼프의 모습은 영락없는 주권주의의 화신 같았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발의한 UN 결의안에 반대한 나라들은 러시아와 북한, 벨라루스, 니카라과 등 18개 국가에 불과한데, 이 몇 안 되는 나라 명단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오르면서 국제 질서 전반에 커다란 소용돌이가 몰아쳤습니다. 전쟁을 바라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가 180도 돌변했고, 이제 우크라이나는 푸틴의 주장을 마치 대리인처럼 고스란히 읊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게 생겼습니다. 미국이 지원을 끊으면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는 우크라이나의 사정을 고려하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건 국제 사회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 말고는 별로 없습니다.
"(푸틴한테) 전화 한 통 걸면 전쟁 끝낼 수 있다"고 말하는 당시 대선 후보 트럼프를 향해 상대 후보 카멀라 해리스는 "트럼프가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푸틴한테 굴복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 대통령 앞에 동맹국을 무릎 꿇리는 식으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트럼프의 행보를 보면, 해리스의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은 듯합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는 "미국이 UN에서 던진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투표"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을 규탄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사회와 외교 무대에서 어떤 기조로 정책을 펴는지 자세히 분석하는 건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만나기라도 한다면 한반도 정세가 또 한 차례 요동칠 테니, 미국의 외교 정책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나라의 정책을 분석하는 단계에서는 명백한 사실과 사실을 비틀고 왜곡하는 주장의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을 두고 '실시간 역사 왜곡'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거짓 주장을 펴는 쪽은 어딘지 가려낼 줄 알아야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과의 관계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푸틴 같은 독재자와도 금전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계산이 서면 얼마든지 거래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첫 번째 임기를 거치며 실제로 확인된 성향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전쟁의 역사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쓰겠다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친 건 놀랍습니다. UN에서 통과된 두 결의안, 즉 전체회의에 상정돼 93개국의 찬성으로 통과된 결의안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15개 이사국 가운데 10표밖에 얻지 못한 미국판 '반쪽짜리 결의안'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당장 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죄로 만든 푸틴의 세계관을 그대로 투영한 듯 미국의 안보리 결의안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로 희생된 이들을 애도한다"고만 쓰여 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 "원래 러시아 영토인 돈바스 일대에서 러시아 민간인을 향해 테러를 일삼는 네오나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특별군사작전을 편 것"입니다. 이를 전쟁으로 부르고 여기에 반대하는 건 러시아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서구 언론의 공작에 놀아나는 것이므로 죄가 된다고 푸틴이 말했는데, 느닷없이 트럼프가 여기에 동조한 겁니다.
"사실과 허구의 구분, 참과 거짓의 구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체주의가 싹을 틔우는 데 가장 중요한 자양분임을 꿰뚫어 본 한나 아렌트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제약된 러시아에 미국이 더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백악관 기자단 구성과 출입 문제를 놓고 AP통신과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사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본연의 역할을 했을 뿐인 언론사를 길들이려는 것도 민주주의 정부보다는 전체주의 정권에서 자주 있는 일입니다.
브렛 스티븐스가 칼럼에서 예로 든 바츨라프 하벨의 통찰은 '앞서가는 복종'에 관해 이야기한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의 지적과도 통합니다. 스나이더 교수는 20세기에서 얻은 20가지 교훈을 책 "폭정"에서 정리했는데, 첫 번째 교훈으로 꼽은 1장의 제목이 "미리 복종하지 말 것(Do not obey in advance)"입니다. 첫 문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은 보통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권력을 얻는다. 억압적인 정권이 무엇을 원할지 지레짐작한 개인들이 요구받기도 전에 알아서 순종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체제에 알아서 복종하는 시민들은 독재자에게 힘을 준다.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힘은 시민의 자유를 찍어 누르는 억압적인 폭력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실을 외면하고 거짓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거짓으로 쌓아 올린 평행우주를 지탱하고 있다는 겁니다.
분석보다 더 어려운 대책 마련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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