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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복종한다…트럼프 2기 행정부서 펼쳐질 섬뜩한 미래" [스프]

[뉴욕타임스 칼럼] The Chilling Consequences of Going Along With Trump by M. Gessen

0218 뉴욕타임스 번역
 

* M. 게센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나의 부모는 1978년 폴란드를 방문했다. 두 분의 첫 해외 여행이었다. 모스크바의 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여행 소감을 끊임없이 들려주셨는데,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관광지가 아니라 폴란드에서 본 밥 포시 감독의 영화 '카바레'였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다음과 같다.

세 친구가 주말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 수면 부족과 숙취에 시달리고 복잡한 애정사에 정신이 팔린 세 사람이 길가 커피숍에 잠시 들렀다가 히틀러 청소년 단복을 입은 10대 소년을 만난다. 갈색 바지를 하얀 반 스타킹 안에 넣어 입은 소년은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곧 단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더 모여들자 어느새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손님이 일어나 함께 노래를 부르고 주인공들은 자리를 피한다. 마음속에서 나치즘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 순간 자신들이 소수이며 지금까지 알던 삶은 끝임을 실감하게 된다. 커피숍 손님들이 다 함께 부르던 노래는 "내일은 나의 것(Tomorrow Belongs to Me)"이었다.

어머니가 영화 '카바레'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을 때 고작 11살이던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부모님이 실제로 카바레를 방문해서 소련 체제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은 걸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몇 년 후 그 영화를 직접 보고 나서야 나는 어머니 말씀에 동의하게 됐다. 그 장면은 전체주의적 지도자를 따라 열을 맞추는 사회에 사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 명장면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실제로 그런 기분을 겪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정권을 잡았을 때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상상도 하지 못한 무서운 속도로 체스 말들을 집어 올리고 있는 체스판 위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에 살고 있는 지금 역시 비슷한 기분인데, 모든 것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 같다. 내가 느낀 변화는 선거 전에 이미 시작됐다. LA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한다는 칼럼을 싣지 않기로 했을 때가 그랬다. 마크 저커버그가 대선을 "문화적 전환점(cultural tipping point)"이라 부르며 메타의 운영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ABC 뉴스가 트럼프의 어이없는 소송에 수백만 달러를 내놓았을 때, CBS도 비슷한 고려를 할 때도 징조가 보였다. 가장 최근에는 병원에서 미성년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치료를 중단하고, 여러 대학과 기업이 다양성 정책을 없애기 시작했을 때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현재 몇몇 대학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지침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프로그램을 부지런히 재편하고 있다.

나는 단순히 새로 들어온 관료들의 결정에 따라 백악관이나 질병관리본부 같은 정부 부처 홈페이지에서 몇몇 페이지가 삭제된 사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개인이나 사기업이 선제적으로, 심지어는 자의에 따라 취한 조치를 말하는 것이다.

예일대학교의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를 "앞서가는 복종(anticipatory obedience)"이라고 부른다. 2017년 그의 저서 '폭정: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On Tyranny: Twenty Lessons from the Twentieth Century)'에 등장한 첫 번째 교훈은 바로 "미리 복종하지 말 것"이었다. 스나이더에 따르면 억압적인 정부의 요구를 예측하고 실제로 지시가 나오기도 전에 그 요구에 순응하는 것은 "권력에 무엇이 가능한지를 알려주는 셈"이다.

스나이더의 지적은 물론 옳다. 그러나 그의 경고 때문에 미리 복종하는 것은 일견 비이성적인 행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 경험상 사람이나 기관이 알아서 복종할 때는 그것이 공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기보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논리에 따른 행동인 경우가 많다. 그 논리는 다음 다섯 가지 중 하나, 또는 여럿이 중복으로 해당한다.

첫 번째는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는 주장이다. 2004년 나는 300여 명이 사망한 학교 인질극 당시 푸틴의 조치에 반기를 들었던 한 남성에 대한 기사를 편집한 적이 있다. 제목을 어떻게 뽑을지 고민 중이었는데, 한 간부가 내 책상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가 이 기사를 냈다가는 편집부 전체가 일자리를 잃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내가 알기로 당시 대통령실은 우리 출판사의 편집권에 대해서 위협은커녕 비판한 적도 없었다. (당시 나를 말리던 간부는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러시아의 위대한 사회학자 유리 레바다는 "집단적 인질 잡기(collective hostage-taking)"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집단적 처벌에 대한 지속적이고 확실한 위협 때문에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집단적 인질 잡기가 특별히 사악한 이유는 서로 다른 가치관들을 경쟁시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상사는 기사 한 편의 가치와 수백 명의 생계라는 가치를 나란히 놓고 판단할 것을 요구한 셈이다. 그 기사는 결국 나가지 못했다.

두 번째는 "집단적 인질 잡기"와 사촌 격인 "더 큰 목표"라는 논리다. 2012년 겨울, 러시아에서는 15만여 명의 시민들이 푸틴의 3선 야망과 부정 선거에 항의해 시위에 나섰다. 당시 여배우 슐판 카마토바는 진보적 지식인들과 다른 의견을 내며, 푸틴을 지지하고 나섰다. 카마토바는 당시 소아암 환자들을 돕는 단체를 설립해 운영 중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비판에 맞서 "병원 하나를 더 지을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자신의 존엄이란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미성년자 트랜스젠더 치료를 중단한 미국의 병원 관계자들 역시 비슷한 논리로 무장했으리라 추측한다. 환자들을 위해서는 연방 정부의 지원이 꼭 필요하고, 이를 위해 특정 집단의 환자들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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