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멜라 폴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최근에 내가 완벽하다는 말을 들었다. 완벽이란 나와는 거리가 먼, 내가 과거에 도달한 적도, 미래에 도달할 일도 없는 경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말이다.
나에게 이토록 관대한 평가를 내린 이는 두 사람이다. 한 번은 길을 가다 낯선 이와 부딪혀 사과했더니 돌아온 말이었고, 한 번은 딸이 옷을 사러 간 가게에서 만난 지나치게 쾌활한 점원들의 말이었다. "아니에요, 완벽하신데요!" 딸이 옷을 입어보러 들어간 피팅룸 앞에서 지친 X세대는 좀 앉아서 쉬어야겠다고 푸념 조로 말하자 돌아온 말이었다. 실은 "그렇게 하세요"면 충분할 상황이었다.
완벽하다는 말은 약간 어이없을 정도로 전염성이 있었다. 이후 나는 이메일 하나에 답장할 때도 무릎 반사처럼 "완벽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예전 같으면 X세대 감성에 어울리는 다소 무심한 표현, 그러니까 "괜찮네"라거나, "오케이" 정도로 답했을 내용에도 말이다.
이제는 우리의 AI 친구들조차 조금 더 적극적인 표현을 독려하는 것 같다. "어제 만나서 반가웠어"라는 지인의 이메일에 지메일은 좀 더 활기찬 답장을 제안한다. "나도 너무 반가웠어!"라거나 "어제 진짜 즐거웠지!" 같은 식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챗봇도 우리에게 배운 대로(!) 끊임없이 감격하고 흥분한다.
세상 모두가 완벽하거나, 완벽하지 않아도 "좋은(good)" 상태인 것 같다. 내가 사회성을 발휘하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 표정 관리에 실패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다. "아냐, 좋아!(No, you're good!)"
"좋은" 정도는 다들 하는 것이니, 이미 "좋아"는 영 연방에서 감사 인사에 대한 대꾸로 사용하는 "천만에요(No worries)"나 미국인들이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괜찮아요(That's OK)"를 대체해 버렸다. 나아가 "괜찮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good"은 종종 다음과 같이 좀 더 광범위한 선언으로 쓰이기도 한다. "다 좋아요(It's all good)."
하지만 정말 다 좋고, 다 괜찮은 것일까?
이처럼 꿋꿋하게 밝고 긍정적인 겉치레에서 어느 정도 방어적인 면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런 최근의 긍정 언어에서는 거의 억압적인 무언가가 느껴진다. 열정적인 태도에서 진정성이 느껴질 때조차도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괜찮거나, 최소한 문제는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한다. 큰 문제가 아닌 존재가 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완벽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다 좋은" 수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 동료에게 이 같은 최근의 언어학적 틱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더니, 동료는 일종의 수동적인 공격일 수 있겠다고 답했다. "누가 너한테 '다 좋아요'라고 하면 그건 '이 멍청한 할망구'라는 뜻이야. 신발이 예쁘네요, 아줌마 신발치고는. 이런 뜻이지."
"다 좋다, 다 괜찮다(It's all good)"는 대부분의 미국식 토착어와 마찬가지로 흑인 문화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뉴요커 기사에 따르면 이 표현이 인기를 얻게 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노래는 M.C. 해머의 1994년 히트곡 'It's All Good'이다. 이제는 모든 이들이 이 말을 쓰는데, 때로는 상당히 나쁜 상황에 관한 대화를 차단해 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한때 일상적인 수다는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은" 중립적인 맹탕으로 수렴되곤 했다. 사람들은 늘 상태가 "좋았(fine)"다. 실은 전혀 좋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분조차 아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늘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곤 했다.
오늘날 현실 세계는 드라마 '블랙 미러'의 '추락(Nosedive)' 편과 비슷한 악몽이 되어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일상적인 교류를 실시간으로 기기에 입력하고 평가당하는 세상이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호감성 점수를 쌓고, 이 점수로 고용 기회와 같은 사회적, 경제적 대가를 치른다. 실제로 우리도 이제 우버 기사에게 음악 소리 좀 줄여달라고 했다가 별 한 개를 받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어딘가에 기록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적정 수준의 예의를 넘어선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