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전체주의 통치의 이상적인 주체는 신념에 찬 나치나 신념에 찬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의 구분, 참과 거짓의 구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 말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과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근본적인 속성을 실로 날카롭게 꿰뚫어 본 통찰입니다.
전체주의는 획일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을 모든 구성원에게 강요하며, 그 주장은 과학적인 사실에 앞섭니다. 그러므로 전체주의가 성공하려면 '사상적으로 무장이 잘 된' 홍위병들 이전에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실과 의견의 경계가 흐려지다 보면 사람들은 판단 능력을 잃게 되고 사실과 허구, 참과 거짓이 어지럽게 뒤섞인 세상에서 선전과 선동에 능한 세력이 집권하게 됩니다.
전체주의의 대척점에 선 체제나 원칙은 무엇일까요? 민주주의 안에서도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인정하는 다원주의가 그럴 테고, 사실과 의견 또는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게 해줄 기준으로는 과학적 사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과 기관은 다원주의 원칙을 토대로,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특히 꼭 그래야 하는 기관이 있다면 바로 언론입니다.
요즘엔 잘 쓰이지 않는 말 같지만, 언론을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부를 때 언론이 짊어진 사명이자 기본적인 의무는 바로 사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건 물론이고, 사실과 의견의 경계도 명확히 보여주는 겁니다.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는 사회는 그래서 전체주의라는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작습니다.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아주는 언론이 일종의 방파제이자, 보루 역할을 하는 거죠.
기술의 발달로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전통적인 언론의 영향력은 분명 줄었습니다. 뉴스를 접하는 매체와 통로가 다양해졌고, 무엇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소셜미디어가 대체한 수많은 역할 중에는 (소셜미디어 기업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전통적인 언론의 역할도 있습니다.
아마도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람들이 세상에 접속하는 (가능하면 유일한) 통로가 되고 싶지만, 즉 소비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싶지만, 반대로 거기에 따르는 책임은 최대한 지지 않고 싶을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땅 짚고 헤엄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같을 테니, 그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언론의 역할을 사실상 대체하거나 최소 나눠 맡게 된 소셜미디어가 언론이 져야 할 책무를 등한시한다면 그 소셜미디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나아가 전체주의에 길을 터준 기업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집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관심을 가졌지만, 특히나 유권자들의 표심에 촉각을 곤두세운 건 미국 기업들과 언론사 사주들일 겁니다. LA타임스의 패트릭 순숑과 워싱턴포스트의 제프 베조스가 일찌감치 꼬리를 내리고 지지 후보를 밝히는 관행을 깬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언론은 아니지만, 세계 인구의 절반이 매일 접속해 사용하는 소셜미디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왓츠앱을 소유한 메타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메타의 창업주 CEO 마크 저커버그는 언론의 책무를 다하는 길과 권력에 잘 보이는 길 가운데 후자를 택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메타의 팩트체크 기능을 대폭 없애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실 트럼프가 선거에서 이겨 백악관에 복귀하는 게 확정된 뒤 발등에 가장 큰불이 떨어진 기업이 바로 메타였습니다. 지난 19일 법원 판결에 따라 미국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된 틱톡을 다시 살려낸 (본인 표현을 빌리면) "구세주 트럼프"가 원래는 틱톡이 밉지만, 틱톡을 금지하는 데 주저했던 이유로 뭘 들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페이스북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이렇게 말했었죠.
"틱톡에는 좋은 점도 있고, 물론 문제도 많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미국에서 틱톡을 금지하면 페이스북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거 아닌가요? 페이스북이야말로 미국인의 주적인데 그 꼴은 못 봅니다!"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중 하나는 페이스북의 팩트체크 기능이었습니다. 시계를 더 앞으로 돌려 2016년 대선으로 가보죠. 당시 페이스북이 느슨하게 관리하던 이용자 데이터가 대거 유출됐고,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기업이 8천700만 명의 데이터를 무단으로 수집, 분석해 선거에 활용했죠. 가짜 뉴스가 퍼지고 유권자들의 표심이 영향을 받았는데도 페이스북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 페이스북은 엄청난 비판에 시달렸고, 이용자 데이터를 더 엄격히 관리하고, 가짜 뉴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도 더 큰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합니다.
4년 뒤 2020년. 11월 대선을 10개월 앞두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창궐합니다. 팬데믹과 백신 등 공중보건에 관한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퍼졌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문제의 가짜 뉴스나 음모론을 차단하기는커녕 때론 두둔하고 직접 입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방역과 공중보건의 총책임자로서는 실격이었죠. 선거가 가까워져 오면서 전통적인 언론은 물론이고, 소셜미디어도 게시물에 대한 사실 여부를 엄격히 따져 딱지를 붙였는데,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그대로 실어 문제가 되는 경우는 트럼프 캠프 쪽이 아무래도 많았습니다. 공화당 내에서는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민주당과 가까운 좌편향 매체들이어서 보수적인 콘텐츠를 표적으로 삼아 검열한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죠.
결정타는 1월 6일 의사당 테러 사건이었습니다. 헌법기관인 의회에 폭도들이 난입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자, 모든 기업이 1월 6일 테러를 두둔하는 모든 이들과 재빠르게 "손절"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운영하는 빅테크 기업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폭력을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며 에둘러 폭력을 두둔하거나 있던 일을 부정하는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아직 일론 머스크가 인수하기 전이던) 트위터가 먼저 칼을 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을 퇴출했고, 페이스북도 뒤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계정을 금지했습니다. 마이크를 빼앗긴 트럼프는 격분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발언과 행보가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하는 모든 이들은 "표현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는 이들이므로, 헌법의 적이고 곧 미국의 적이라는 논리가 그렇게 완성됐습니다.
틱톡에 쌓인 게 많던 시절에는 틱톡 금지법에 찬성하던 트럼프는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 댄스의 지분 15%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갑부 제프 야스의 정치적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틱톡 금지법에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가 볼 때 트위터는 자신의 최측근이 된 일론 머스크가 사들였으니 걱정이 없고, 이제는 페이스북을 길들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트럼프의 취임 기금(inauguration fund)에 100만 달러씩 내면서 당선인을 만나러 오던 기업 CEO 중엔 저커버그도 있었습니다. 저커버그는 회사의 명운을 걸고 최소한 트럼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카드를 내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꺼내 든 카드가 팩트체크 기능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우선은 미국에서 시행하는데, 미국이 당연히 메타에 가장 중요한 시장임을 고려하면 다른 나라에서도 금방 비슷한 정책을 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 때문에 마지못해 한 걸까?
저커버그나 페이스북, 그 모기업인 메타가 특별히 "나쁜 기업"이라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원래 기업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끼니를 거르고 잠을 줄여가며 우리 회사 플랫폼에 거의 중독된 거나 다름없이 사용하는 고객을 마다할 소셜미디어 기업이 과연 있을까요? 끝없이 더 많은 이윤을 내려는 소셜미디어에 고객의 관심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제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게 가짜 뉴스든, 계속해서 도파민을 뿜어주는 선정적인 콘텐츠든 상관없습니다.
그런 기업의 본성이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으므로, 이를 정부가 규제하고 시민사회가 감시하고, 언론이 견제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때 미국 기업들은 특히 "표현의 자유"라는, 무려 수정헌법 1조에 명시된 거창한 구호 뒤에 숨어 규제와 감시, 견제를 피하려 합니다. 이번에 팩트체크 기능을 축소하겠다고 한 저커버그의 발표에도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메타의 사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과 거짓, 사실과 허구를 엄격히 구별하는 데 일조하는 언론의 역할이나 책임은 메타의 사명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아전인수로 해석한 표현의 자유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대목입니다.
팩트체크 기능이 사라지면 새라 차타가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끔찍한 피해가 나타납니다. 폭력을 부추기는 짜깁기한 영상, 가짜 뉴스와 혐오 발언이 아무런 제지 없이 퍼져 실제로 끔찍한 폭력으로 이어진 건 영화나 소설에 나올 법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이미 미얀마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현실이 됐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데 결정적인 매개체가 된 가짜 뉴스의 온상이 페이스북이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