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1월 들어 본격적인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자연스레 따뜻하고 달달한 군것질용 간식들이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붕어빵, 군밤, 호떡, 군고구마 등등. 그중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검붉은 빛이 도는 팥죽을 빼놓을 수 없다. 봄, 여름이 되면 제철에 나는 과일을 챙겨 먹듯이 '동지 팥죽'이라 하여 겨울이 되면 팥죽이 생각나곤 한다.
'동지 팥죽' 먹기는 우리의 오랜 풍습으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을 참조해 볼 때 옛날 '동지(冬至)'라는 중요한 절기에 아이들이 역병에 걸리지 않도록 붉은색의 팥으로 죽을 쑤어 그 기운으로 액운(厄運)을 쫓고 벽사(辟邪)하기 위하여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여름에는 녹두, 겨울에는 홍두(夏天綠豆,冬天紅豆)"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중국인들이 '붉은 콩'이라고 일컫는 홍두(紅豆, 홍더우)가 바로 팥이다. 우리도 재래시장이나 대형마트에 가보면 팥을 적두(赤豆) 혹은 적소두(赤小豆)라고 표기하여 팻말을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붉은색을 뜻할 때 대체로 '붉을 홍(紅)'자를 주로 쓰고, 적(赤)은 홍(紅)에 비해 보다 검붉은 색상인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중국의 일상생활에서 팥을 지칭할 때 통칭하여 모두 홍더우(紅豆)라고 하며, 중국식 팥죽도 '홍더우저우(紅豆粥)' 또는 '홍더우탕(紅豆湯)'이라고 부른다.
중국 사람들이 아침 식사로 즐기기도 하는 중국식 팥죽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팥죽보다는 좀 더 묽고 율무나 땅콩, 흑미, 백합뿌리(百合) 등을 부재료로 넣어 함께 조리하기도 한다. 홍더우(紅豆) 라고 불리는 식물은 중국 명대(明代)의 이시진(李時珍)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4가지 종류나 된다. 츠샤오더우(赤小豆), 홍더우커우(紅豆蔲), 샹쓰쯔(相思子), 하이홍더우(海紅豆) 등이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당대(唐代) 시인 왕유(王維)의 <그대를 그리며(相思)>라는 시가 있다. "홍두가 남녘에서 자라나는데, 봄이 왔으니 몇 가지 올라왔겠지요(紅豆生南國,春來發幾枝); 그대 더 많이 따주기 바래요, 그것이 가장 서로를 생각나게 하니까(願君多采擷,此物最相思)".
왕유가 시에서 그리는 대상은 여성이 아닌 친한 벗 이구년(李龜年)이다. 이구년은 그 시대 최고의 음악가였고, 당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가 꽃놀이를 즐길 때 음악가로 참여하여 시선(詩仙)인 이백(李白)이 즉흥시 세 수를 짓자 바로 곡을 붙여 연주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남쪽으로 유랑하였고,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쓰촨(四川) 땅에서 그를 만나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위의 시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던 왕유(王維)가 서로 헤어져 남녘에 있는 친구 이구년을 그리며 쓴 시이다. 이구년은 여러 사람이 모인 연회에서 친구 왕유가 지은 이 시에 곡을 붙여 연주하였고 청중들은 음악을 듣다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시에 등장하는 홍두는 본초강목에서 분류한 샹쓰쯔(相思子, 상사자)로 추정된다. 광둥(廣東), 광시(廣西), 윈난(雲南) 등 중국 남방과 열대지방에서 생장하는 샹쓰즈는 3-6월 꽃이 피고 9-10월에 밝은 빨간색의 딱딱한 열매가 열린다. 열매는 주로 약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타악기의 재료나 장식용으로 사용된다. 당대(唐代)에는 의복에 장식용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홍두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한대(漢代)에 한 부부가 있어 전쟁터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매일 마을 입구에 서서 슬피 울다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그 자리에서 나무가 자라나 핏빛의 빨간 열매가 맺혔고 이를 그리움(相思)의 의미를 붙여 썅쓰쯔(相思子) 또는 샹쓰더우(相思豆)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 왕유는 시를 통해 대상(紅豆)에 감정을 투사하여 본인의 친구에 대한 그리움의 정감(相思)을 표현한 것이다. 현대 중국에 와서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츠샤오더우(赤小豆)라고 구분해 불러야 할 팥까지 포함하여 모두 다 홍더우(紅豆)라고 통칭하고 있다. 즉, 일상생활에서는 굳이 식물학 도감 분류처럼 세세히 나누지 않고 빛깔이나 생김새도 모두 유사하기에 다 홍더우(紅豆)라 부르고 팥을 봐도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를 그리워하고 애인과의 애정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겨울엔 팥이 좋고, 여름엔 녹두가 좋다'라는 말과 관련해 살펴보면, 전통 의학에서 팥은 성질이 따뜻하고(溫), 심장과 보혈에 좋으며(養心補血), 비위를 튼튼하게(健脾胃) 한다고 본다. 이에 반해 녹두는 성질이 차갑고(凉), 열을 내리고 독을 풀며(淸熱解毒), 더위를 쫓고 진액을 만든다(消暑生津)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실제 과학적 영양 성분은 유사하며, 녹두가 여름에 수확하는 데다가 색깔이 푸른색이어서 시원함을 느끼게 하고, 팥은 붉은 계열의 색깔로 따뜻함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런 말과 식습관이 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 남부인 광시(廣西) 지역에는 '홍더우의 고장(紅豆之故鄕)'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광시의 성도(省都)인 난닝(南寧)이다. 난닝은 소수민족인 좡족(壯族)의 자치구인 광시의 중심 도시이자 인구 900만 명의 대도시로, 당대(唐代)부터 융(邕)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중국 서남부에 위치한 경제와 산업의 센터 역할을 하며 중공업 등 산업을 발전시켰고, 현재는 아세안 각국과의 협력의 교두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여름에는 무덥지만, 일년내내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관광 명승지인 구이린(桂林, 계림)과 가까우며 시내에 위치한 칭시우산(靑秀山) 등 독특한 구릉 지형과 함께 깨끗한 공기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홍더우의 고장'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난닝 시내 곳곳에는 홍더우를 붙인 '홍더우 광장(紅豆廣場)', '홍더우 거리(紅豆風情街)', '홍더우 공원(紅豆公園)' 등을 찾을 수 있으며, 런민공원(人民公園) 인근에는 홍더우 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다. 연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들로, 홍더우(紅豆) 열매를 끼워서 엮어 만든 목걸이, 팔찌 등 기념품을 애정의 표시로 서로 선물하기도 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