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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존경을 받은 '영원한 스승' 위해…명품 술 빚은 후손들 [스프]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영원한 스승 공자 가문의 가양주 '공부가주' - 산둥·취푸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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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공자의 고향인 취푸 성곽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자립했고, 40세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만사를 이해했고, 70세에 마음이 쫓는 대로 행할지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从心所欲, 不逾矩)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말년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한 말이다. 여기서 스물은 약관, 서른은 이립, 마흔은 불혹, 쉰은 지천명, 예순은 이순, 일흔은 고희라는 새 연령대에 들어섰을 때 나이를 묘사하는 표현이 비롯됐다.

공묘(孔廟) 정문인 영성문(櫺星門)은 공자를 하늘처럼 존경한다는 뜻이다.
물론 《예기》에 나오는 스무 살에 어른으로 갓을 쓰는 성인이 된다는 약관(弱冠)이 더해졌다. 또한 당대 시인 두보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예부터 사람이 70세를 살기는 어렵다(人生七十古來稀)'로 고희가 완성됐다. 회고대로 공자는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 이상을 달성하려 애썼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춘추시대 말기로, 주(周)대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주 왕실은 이름뿐이었고 제후는 유명무실해졌다. 각국에서는 권문세족이 가신을 거느리고 실권을 잡았다.

공묘의 2번째 문인 성시문(聖時門). 1415년 명나라 때 세웠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노(魯)나라였다. 노 조정도 세 권문세가(三桓)가 실권을 잡고 군주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전횡했다.

본래 공자 가문은 송(宋)의 귀족이었다. 하지만 공자의 6대조 때 궁정 반란을 피해 노로 피난을 왔다. 공자가 태어날 때 가문은 기울어 아버지는 하급 무사였다.

당시는 신분과 관직이 세습됐다. 따라서 공자는 하급 관료밖에 되지 못됐다. 보통 하급 관료의 자제는 의식 집전(禮), 악기 연주(樂), 활쏘기(射), 수레 몰기(御), 글 읽기(書), 숫자 세기(數) 등 육예(六藝)를 익혀 관련 직종에서 일했다.

1504년 명나라 때 재건한 규문각(奎文閣)은 공자와 관련 서책을 보관했다.
그래서 공자는 청소년기에 육예를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문학(詩), 역사(書), 외교(禮), 예술(樂) 등 고급 학문을 부단히 공부했다. 서른에는 일정한 명성을 얻어 학문적 이립을 달성했다.

공자는 이런 성취를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눈을 돌렸다. 평소 삼환의 전횡을 지적하며 정치적 견해를 쏟아냈다. 이에 제(齊) 경공이 노에 왔을 때 공자를 방문해서 천하 대사를 함께 논했다.

마침 공자를 위시한 신진 세력의 지지 속에 노 소공은 삼환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결국 공자도 뒤따라갔다.

공자가 제자에게 강학을 펼쳤던 장소인 행단(杏壇)
제 경공은 공자를 환대하며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물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정명(正名)론은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사회 성원 각자가 자신의 본분에 맞게 행동해야 국가 질서가 확립된다고 여겼다.

다만 일방적인 순종만 강요하지 않았다. 인과 예를 지켜야 하고, 각자의 본분을 못 지키면 그 책임을 감수한다고 지적했다. 제 경공은 공자를 중용하려 했으나, 줄곧 권신의 반대에 부딪혔다.

1724년에 재건한 대성전(大成殿)은 중국 고대 3대 건축물로 꼽힌다.
세월이 흘러 공자는 마흔이 넘고 소공이 객사하고 정공이 즉위하자, 44세에 노나라로 귀국했다. 그리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위해 학당을 열었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자가 무엇인지 고민했었다. 임금은 단순한 위정자가 아닌 예와 덕을 갖춘 현인으로써 군자라고 결론지었다. 공자는 이런 군자가 나오려면 떠받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 아래에서 파격적인 조치였다. 공자 학당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설 학교였다.

대성전 앞에서 공자를 향해 제를 올리는 중국 여성
공자는 권문세족의 자제부터 천민의 아들까지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커리큘럼은 육예와 고급 학문, 군자학이었다. 이처럼 종합 학술 교육을 진행하는 학교는 공자 학당이 유일했다.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정공은 공자에게 벼슬을 내려 52세에 출사했다. 공자는 공정하고 명료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 덕분에 2년 만에 나라에서 벌어지는 각종 형사 사건을 총괄하는 대사구에 올랐다.

공자는 조정에 나가 회의에 참석하면서 삼환의 국정 농단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정공도 소공과 같은 허수아비라는 현실에 분노했다.

대성전 안에 모셔진 공자상. 청대에 공자의 모습을 상상해서 만들었다.
그래서 공자는 삼환을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실권자인 계 씨와 친분을 쌓았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삼환의 근거지인 삼도(三都)를 허물 계책을 이행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삼환 스스로 2개의 성을 무너뜨리도록 했다. 그러나 공자의 계략을 눈치챈 삼환은 반격했다. 계 씨도 공자에 대한 신임을 거두었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고 암살 위험까지 대두되자, 공자는 어쩔 수 없이 55세에 제자를 데리고 열국주유(列國周遊)에 나섰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처음 방문한 위(衛)나라에서 공자는 국빈 대접을 받았다.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자공이 심은 나무가 아직 남아 있다.
위 영공은 공자가 노에서 받은 녹봉과 똑같은 식량을 내렸다. 하지만 공자는 정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또한 권문세족의 견제와 시기를 당했다.

결국 영공마저 공자를 경원시하자, 다른 나라에 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59세부터는 조(曺), 송(宋), 정(鄭), 진(陳), 채(蔡), 엽(葉), 초(楚)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를 펼쳤다.

군주는 공자를 융숭히 접대했다. 하지만 나라의 실권을 군주가 아닌 권문세족이 쥐고 있었다. 권문세족의 과두정치를 타도하고 군주권을 확립하자는 공자의 주장은 심한 견제를 받았다.

사후에 성인으로 추존된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의 정문인 공림문
게다가 공자는 군주도 높은 인과 예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고 강조해서 환영받지 못했다. 향락과 안일에 젖어있던 군주에게 공자는 그저 말 많은 노인네였다.

67세 때 아내가 병사하자, 이듬해 공자는 14년 동안의 열국주유를 마쳤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공자는 후학 양성과 고전 정리에 정력을 쏟았다.

비록 열국주유는 실패했지만, 견문을 높일 수 있었고 명성을 방방곡곡에 떨쳐 제자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공자는 제자를 가르치고 남은 시간은 고급 학문의 교육서를 정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공림 한복판에 자리 잡은 공자의 묘. 가장 크고 거대하다.
《논어》는 그 과정에서 공자와 제자의 언행을 기록하여 편찬한 책이다. 이에 따라 《시경》, 《서경》, 《예기》, 《악기》를 편찬했고 《역경》, 《춘추》의 기초를 닦아 '육경'을 완성했다.

기원전 479년 공자는 노환으로 73년의 생애를 마감했고, 취푸 북쪽 쓰수이(泗水) 가에 묻었다. 훗날 주변에 공자의 후손까지 묻히면서 공림(孔林)으로 규모가 커졌다.

공자 사후 공 씨 가문은 취푸에서 양조한 술을 제사상에 올렸다. 공부(孔府)를 방문하는 고관대작이 많아지자, 명대부터 직접 빚은 가양주(家釀酒)로 대접했다.

공 씨 가문이 살았던 공부의 살림집 정전 내부
청대에는 공자를 존경했던 건륭제가 취푸를 8차례나 찾아 공부에서 술을 즐겼다. 이에 따라 공부의 가양주는 황실로 진상되는 술이 됐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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