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대한씨름협회 신임 회장
제44대 대한씨름협회장에 당선된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67) 신임 회장이 점진적인 개혁으로 씨름 저변을 확대하고 추락한 위상을 다시 세우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준희 회장은 지난해 12월 21일 제44대 대한씨름협회장 선거에서 총 224표 중 140표(62.50%)를 얻어 류재선 후보(50표·22.32%), 황경수 현 회장(32표·14.29%)을 크게 압도하고 당선됐습니다.
그는 오는 16일부터 4년간 씨름협회를 이끌게 됩니다.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언론과 만난 이준희 회장은 "내 생각보다 많은 표를 얻어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만큼 기대가 많다는 것이니 제대로 부응할 수 있을지 어깨가 무겁다"며 취임을 일주일 앞둔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준희 회장은 1980년대 이만기, 이봉걸과 함께 '3이(李) 시대'의 중심에 섰던 스타 선수입니다.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7회에 올랐던 그는 지도자와 협회 경기운영본부장 등을 지낸 뒤 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이준희 회장과 함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이만기 인제대 교수는 "고생길이 훤하다. 잘하는 건 당연하고, 못하면 무능하다고 비판받을 것"이라며 걱정과 애정이 섞인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고 이준희 회장은 전했습니다.
한국 씨름의 제 1과제는 지속 가능한 스포츠 종목으로서의 씨름입니다.
이준희 회장은 씨름의 위상이 추락한 원인은 복합적이라고 봤습니다.
먼저 선수들의 덩치는 커졌으나 기술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이준희 회장은 "10년 전에 규칙을 개정해서 몸무게 140㎏ 이상은 감량해야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하고, 체급 내 기술 씨름을 유도했다"며 "예전엔 110㎏ 정도 선수들이 많이 움직이면서 상대의 무게 중심을 무너뜨리려 애썼는데, 선수들의 체중이 증가하면서 움직임이 적어지고 툭 밀면 넘어지는 단조로운 경기가 늘었다"고 짚었습니다.
야구, 축구, 배구 등 다양한 프로 스포츠에 밀리고, 생활체육 참여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이 회장은 "예전엔 동네 모래판에서 그냥 하던 게 씨름이었고, 대중도 본인이 하던 운동이기 때문에 더 애정을 갖고 스포츠 씨름을 향유했다. 이젠 경제력이 좋아지면서 다양한 스포츠에 다 참여하게 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요새 생활체육에서 씨름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많이 참여하긴 쉽지 않다"며 "매트에서 하면 발가락이 꺾이거나 마찰에 의한 화상 등 부상 위험이 있고, 씨름판을 마련해 놓기도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비해 급격히 줄어든 씨름의 인기와 입지를 회복하는 게 이준희 회장의 당면 과제입니다.
이 회장은 씨름 저변을 확대해 장기적으로 씨름을 즐기는 인구층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초·중·고 저변을 확대하고 서울과 제주엔 대학팀도 신설해야 한다"는 이 회장은 "지금보다 학생 선수층이 줄어들면 더욱 가분수 형태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며 "그들이 모두 실업팀으로 가지 않더라도, 학창 시절 씨름을 경험해본 이들이 민속씨름 팬으로 유입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은 실업팀과 민속씨름 경기를 주로 본다. 경기력이 화려해야 고정 시청층을 확보하고 새로운 팬을 유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프로화 시도도 계획 중입니다.
이 회장은 "지금은 각 시도에 속한 19개 실업팀이 있다. 세미프로 형태인데, 내년부터는 완전히 프로로 시도해보려고 한다"면서도 "기업을 확보하는 게 분명 쉽지는 않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준희 회장은 현역 시절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지 않고, 깔끔한 경기 매너를 보여줘 '모래판의 신사'로 불렸습니다.
그는 1980년대에 보여준 모래판 신사로서의 품격이 40년이 훌쩍 지난 2025년 씨름판에도 존재하길 바랐습니다.
이 회장은 경기 진행 방식, 대회 운영 등 다양한 부분에서 변화를 원했다며 특히 협회 임직원과 선수·지도자 등이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회장은 "대회 현장에 가보면 어린 학생 선수들에게 성난 어투로 친절하지 않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문제의식을 드러냈습니다.
이어 "요샌 집마다 아이를 하나, 많아야 둘 낳아 키운다. 씨름 대회에 나온 아이 하나를 보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온 가족이 다 오는데, 자기 자식이 그런 대우를 받으면 누가 씨름을 시키고 싶어 하겠냐"고 반문하며 "서로 존중하고 친근하게 하는 문화가 정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회장은 마지막으로 전격적이고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점진적이고 부드러운 변화를 유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회장은 "예측가능한 일을 할 거다. 전격적인 결정은 내리지 않을 것"이라며 "화려했던 선수 생활과는 다르다. 협회를 겉만 번지르르하게 운영하는 게 아니라 내실 있고 알차게 운영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습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