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때는 2024년 11월 10일 일요일. 고양이에 몹시 진심인 초등학교 5학년 둘째를 위해 온 가족이 인천 옹진군 영흥면 '고양이역' 카페를 방문했다. 둘째의 하루 아니 일주일 치 행복 총량을 가득 채운 후 오후 5시에 서울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운전 중 차창 밖으로 어마어마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초의 지구에서나 볼 법한 광활한 갯벌 한 가운데에는 성경 속 최초의 인류 아담처럼 섬 하나가 고독하게 솟아 있었다.
이미 자동차는 그곳을 스치고 지나 수 분이 지났건만 지금 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내와 눈빛을 교환한 후 차를 돌려 무작정 섬으로 향했다. 마침 갯벌 가까이에 영업을 마친 조개구이집 주차장이 있어서 잠시 차를 대었다. 귀찮아하는 아이들은 차에 두고서 아내와 나는 (옷을 입었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된 듯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갯벌로 무작정 향했다. 그때 찍은 사진이다.
그날의 시각적 만족감과 포만감은 극한에 달했다. 시간 날 때마다 사진을 찾아보며 감동을 되새기는 일이 며칠간 계속됐을 정도니까. 하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슬슬 시각 자극에 익숙해지고 물리기 시작하자 문득 그날 차를 주차했던 조개구이집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조개구이를 먹어줘야 하는 시즌이 됐구나. 인천까지 다시 가는 건 좀 오버다 싶어 집에서 가까운 장소를 물색하다가 영등포역 인근 '하와이조개'를 발견했다.
11월 29일 오후 5시 30분. 가족을 이끌고 하와이조개에 들어선 나의 손에는 해산물과 영혼의 동반자라 불리는 '루이 자도 샤블리'가 들려 있다. 샤블리는 프랑스 부르고뉴 북부 샤블리 마을에서 생산되는 샤르도네(Chardonnay)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특유의 청량한 산도와 조개껍데기를 핥는 듯한 미네랄 풍미는 샤블리를 다른 샤르도네와 구별 짓는 특징이다.
그나저나 목섬 갯벌을 거닐며 태초의 분위기를 만끽했다고 깝죽댔지만 기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건 고작 20만 년 전이다. 오늘 불판 위에 영접할 조개님께서는 무려 5억 년 전에 등장하신 대선배 아닌가. 한참 후배인 포도조차 6천만 년이나 됐으니 그야말로 인류는 '응애'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다. 45억 년 먹으신 지구 어머니가 조개와 포도라는 모유로 우리를 먹이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주문하니 이내 굴, 가리비에다가 입을 꽉 다문 갖가지 조개가 담긴 접시를 들고 직원이 왔다. 불판 위에 조개를 올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개껍데기가 거멓게 그슬리기 시작하면 드세요."
"조갯살을 그냥 불판 위에 올려서 구워도 되나요?"
"그러면 수분이 날아가서 말라버리거든요."
직원분의 조언을 직장 상사의 명령처럼 받들며 젓가락을 들고 뚫어져라 조개껍데기만 쳐다보았다. 어느덧 조갯살에서 스며 나온 육즙이 껍질 안에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더니 하얀 껍질 한켠에서부터 검은색이 스멀스멀 번진다.
이제 괜찮겠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냉큼 가리비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구강으로 투하했다. 소파처럼 푹신하면서도 탱탱볼처럼 탄력 있는 식감, 해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원초적 짭짤함, 연기 향 가득한 불맛, 촉촉하면서도 뜨끈한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역시 조개는 찜보다 구이구나! 환장하겠네. 나는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비싼 진주보다는 조갯살 그 자체가 더 좋다. 생각해 보라. 무인도에서 조개를 만나면 진주가 반갑겠나 조갯살이 반갑겠나. 나는야 태초의 인간 아담!
주변을 둘러보니 아내도 아이들도 태초의 인간이 되어 미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인을 잔에 따라 건배하고 마셨다. 샤블리의 이 상큼하고 청량한 짭짤함이라니! 조갯살의 탱글졸깃한 짭짤함과 어딘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진화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생명수의 뿌리에서 조우하게 되어 그런 걸까?
샤블리 와인에서 짭짤한 맛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챗GPT에게 물어보면 포도밭의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샤블리 지역 포도밭 토양은 쥐라기 시대의 해양 퇴적물로 형성되었는데, 약 1억 5천만 년 전에 이 지역은 바다였으며 해양 생물(주로 조개와 연체동물) 화석이 퇴적되면서 지금의 석회암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5억 년의 시간을 간직한 조개, 쥐라기 시대의 흔적을 먹고 자란 샤블리의 짭짤한 콜라보라니! 수억 년 전 바다에까지 가닿는 한 편의 서사시 아닌가.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