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고인·변호인석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화장실 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어요.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A(52) 씨가 맞는 것 같아요…"
2022년 9월 11일 저녁 강원 태백시 한 사우나 남자 화장실에 있던 B(69) 씨는 누군가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습니다.
폭행을 막은 오른손의 힘줄이 파열되고 손가락이 변형되는 등 6주간 치료가 필요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의 112 신고로 수사에 나선 경찰은 A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B 씨가 112에 신고한 시각은 오후 9시 22분이었고, 사우나 입구 폐쇄회로TV(CCTV) 확인 결과 A 씨가 사우나를 나선 시각은 9시 21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50대 정도의 찜질복이 아닌 사복 차림 남성이 나를 폭행한 뒤 나가버렸다"고 진술했고, 9시 17분 사우나에 입실한 목격자 C 씨 역시 "화장실 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며 A 씨가 범인이 맞는 듯하다고 했습니다.
이에 경찰은 A 씨가 9시 20분쯤 범행을 저지르고 곧장 사우나 밖으로 나갔다고 봤습니다.
A 씨는 첫 경찰조사에서는 혐의를 부인했으나 두 번째 조사에서는 '범행을 인정하더라도 구속되지 않고, 피해자와 합의하면 벌금형이 선고될 수 있다'며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경찰관의 설득에 "피해자를 때렸다"며 자백했습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대구에 살았는데 용변 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를 보고 격분해 폭행했다"는 동기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수사기관은 A 씨가 범인이라고 보고 재판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1심을 맡은 춘천지법 영월지원은 A 씨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 B 씨의 진술과 목격자 C 씨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B 씨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폭행당해 범인의 인상착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가해자가 실제로 사우나 밖으로 나가는 장면조차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범인이 사우나 내에 머물렀을 수도 있는데 A 씨를 범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범행 이후 사우나 위층에 있는 찜질방에 대한 수색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또 B 씨는 폭행당한 이후 탈의실로 나왔을 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곧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목격했다는 C 씨의 진술과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특히 C 씨가 A 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부분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애초 범인의 인상착의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던 C 씨가 경찰이 보내준 A 씨 사진 1장을 보고 A 씨의 사우나 입·퇴실 시각을 들은 뒤 범인으로 지목한 건 그 자체로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봤습니다.
A 씨가 상당량의 피를 흘렸음에도 수사기관이 A 씨의 옷에 대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아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부족한 점도 무죄 심증을 굳힌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A 씨의 자백을 믿기도 어렵고, A 씨가 털어놓은 범행 동기와 달리 B 씨는 암 수술 이후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으며, 범죄 전력이 없는 A 씨에게서 폭력 성향도 확인되지 않는 점까지 미루어보아 A 씨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1심은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판결에 불복한 검찰이 항소했으나 춘천지법 형사1부(심현근 부장판사)는 1심의 판단이 옳다고 보고 기각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