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6일 방송된 '너는 내 운명'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그룹 하이라이트 리더 윤두준, 배우 신소율, 개그맨 정성호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여수 에이즈 확산 논란
때는 2005년의 어느 날. 한 남자가 보건소 검사실에서 채혈을 하고 있어. 이 남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주삿바늘을 쳐다봐. 필요한 혈액은 단 5cc, 적은 양이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피야. 주사기에 점점 붉은 피가 차오르기 시작해. 그런데 바로 그때, "컷! 좋습니다! 오케이!"라는 우렁찬 소리가 들려와. 지금 여기는, 영화 촬영장이야. 주사기 앞에서 채혈하는 장면을 찍은 남자는, 배우 황정민이야. 피 한 방울의 의미가 정말 중요했던, 어떤 사람의 실화를 다룬 영화를 촬영 중이야.
촬영 장소는 여수 보건소. 그즈음에 여주 일대를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어. 그날에 대해 알기 위해,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돌려볼게.
때는 2002년 6월. 부산에 있는 어느 식당 안이야. 구석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식당 출입문을 주시하고 있어.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와. 앉아있던 사람들의 눈이 번쩍 해. "저 여자 맞지?" 사람들이 여자를 향해 다가가. 그리고 여자 앞을 쓱 가로막았어.
"선아(가명) 씨, 잘 지냈어요?"
선아라고 불린 여자는 당황한 듯 깜짝 놀라. 선아 씨를 찾은 사람들은 보건소 직원들이야. 직원들은 그녀를 경찰서로 인계했어. 그리고 선아 씨가 경찰서에 간 후, 그 소식은 전국에 알려졌어. 당시 상황을 전한 뉴스야.
"에이즈에 걸린 20대 여성이 윤락 행위를 해오다 경찰에 적발됐습니다."
"스물여덟 살 구 모 씨가 에이즈 환자로 판명된 것은 98년 3월. 2000년부터는 1년 7개월 동안 전남 여수의 윤락가에서 윤락행위를 해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선아 씨의 병명은 에이즈. 근데 윤락행위를 했다는 거야. 에이즈 환자가 윤락행위를 하는 건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 따라 처벌 대상이야. 성매매도 당연히 범죄지만, 에이즈가 걸린 환자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 매개 행위를 해서는 안돼. 이를 어길 시 3년 이하의 징역을 받아.
이 뉴스가 보도되자, 특히 더 발칵 뒤집힌 지역이 있어. 바로, 선아 씨가 윤락행위를 했다는 전남 여수야. '에이즈를 퍼트린 마녀다', '에이즈 테러다', '복수극이다'라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여수는 에이즈로 공포의 도시가 되어 버렸어. 그런데 이렇게 난리가 난 상황에, 한마디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진짜 국민들이 에이즈에 대한 공포감이 최고였어요 그때가. 누구 하나 나왔다 그러면, 정말 난리가 나는 그런 시기였거든요. 그리고 이 질환은 어쨌든, 그 당시에 만약에 보건소에 와서 이 검사를 받는다면, 내가 윤락가에 가서 돈을 주고 성매매 행위를 한 걸 누군가 알게 되잖아요. 윤락가에 갔었는데 차마 검사를 할 용기는 안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고 또 '언제쯤 검사를 해야 하냐', '한 번만 해도 되냐' 궁금은 한데 용기가 없어서 전화로 계속 질의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요. 저희들이 계속 설득을 해요. 전화가 오면. '검사 안 받고 계속 걱정만 하시면 평생을 이렇게 걱정 속에서 살게 될 거다' 저희가 기억하기로는 가장 검사를 많이 했던 날이, 한 200명까지 검사를 하긴 했었어요."
-신미숙, 당시 여수 보건사업과 임상병리실 근무
그렇게 수천 명의 남자들이 검사를 받으러 왔어. 근데 윤락가를 직접 다녀온 사람 말고도, 속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또 있어.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들, 유흥 업소 종사자들, 심지어 인근 고등학생들까지. 그렇게 보건소에는 두려움을 떨다가 겨우 에이즈 검사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이어졌어.
그런데 이 사람들의 행동에 공통점이 있어. 에이즈 검사를 받으러 온 사람들은 절대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 사람이 없을 때 맞춰 오거든.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검사를 받은 게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운 거야. 그리고 한결같이 '진짜 에이즈에 걸리면 죽나요?'라는 질문을 했대.
에이즈에 감염됐다고 곧바로 죽는 게 아니야. 그런데 '에이즈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오해가 만연했던 때야. 에이즈에 걸려도 약을 잘 먹으며 관리하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당시 에이즈는 죽음의 병, 공포 그 자체였어.
▲ '너는 내 운명'의 실제 주인공
그런데, 세상의 이런 분위기와 정반대로, 선아 씨의 뉴스가 반가운 사람이 있어. 바로, 선아 씨의 남편 박부현 씨. 선아 씨를 찾았다는 소식은 남편에게도 전달됐어. 이 분이 황정민이 연기했던 영화 '너는 내 운명'의 실제 주인공이야.
2005년 개봉했던 황정민, 전도연 주연의 영화 '너는 내 운명'. 당시 국내 멜로 영화 중 최고의 흥행작이었어. 에이즈에 걸린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순애보를 그렸지. 이 영화가 박부현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야. 영화 속 시골 노총각 석중(황정민 분)과 다방 종업원 은하(전도연 분)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에이즈란 병을 극복했을까? 영화의 결말 이후로 알려지지 않은 실제 이야기는 어떨까? 그래서 '꼬꼬무'가 직접, 남편 부현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어.
"김해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제일 처음 알았죠. 얼른 전화 받았죠. 전화 받아보니까 '김해 경찰서로 빨리 오시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보니까 진짜 거기 있더라고요. 에이즈 때문에 잡혀 들어갔다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충격을 얼마나 받았겠습니까 제가."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선아 씨는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던 걸까. 그리고 영화 속 사랑은 현실에도 존재했을까. 한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 그 순간으로 가볼게.
때는 1999년 봄. 김해의 어느 시골 마을이야. 부현 씨는 부지런한 농사꾼이야. 자기 농사도 짓고, 소작도 하고, 가축도 키우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니, 장가가 늦어졌어. 서른아홉 살, 나이 꽉 찬 노총각이야. 이런 부현 씨에게 후배 하나가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했어.
얼마 후, 하얀 탱자나무 아래 버스정류장에 부현 씨가 서있어.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이야. 버스에서 한 여자가 내렸어.
"그때 아마 봄날이었지. 꽃 피고 새 우는 봄인가 싶어. 버스를 내려서 거기서 두리번두리번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저게 누구고' '저게 맞는가' 하고 보니까 맞더라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눈부신 햇살 속 그녀가 한 발자국씩 다가와. 점점 얼굴이 보이는데, 갑자기 세상이 슬로비디오처럼 바뀌는 마법이 펼쳐졌어. 두 사람의 핑크빛 첫 만남이었어.
"사람이 귀엽게 생겼더라고 예쁘고. '설마 이런 여자가 나한테 오겠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예뻤어요. 그래서 첫눈에 내가 반했어요."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선아 씨는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어.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부현 씨. 대뜸 "날 좋아할 수 있겠나?"라며 그녀에게 직진했어. 첫 만남 뒤 선아 씨가 부현 씨네 시골집에 놀러 왔다가, 그대로 같이 살게 됐어. 주위에서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지. 여자가 너무 급하게 눌러앉는 게 수상하다고. 나이차도 큰데, 여자가 다른 거 노리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기우였어. 두 사람은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그릇 옆에 초 하나를 세우고, 나란히 앉았어. 지금은 이렇게 소박하게 하지만, 나중에 돈 벌어서 멋진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하며, 그렇게 둘만의 작은 결혼식을 올렸어.
"다 해주고 싶데요 막.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 여자 아니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한창 농사일을 하다 보면, 저 멀리서 선아 씨가 새참을 들고 왔어. 아내는 김밥을 잘 쌌어. 집에 있는 나물, 갖가지 반찬들을 넣어 만든 아내표 김밥이 그렇게 맛있었어.
"사람이 활발하고 좀 이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동생이 없다 보니까, 항상 내 동생 같기도 하고, 아내 같기도 하고… 내가 제일 기억나는 게 김밥. 김밥을 제일 많이 먹은 것 같아. 내가 그래서 항상 '너 김밥 장사해라' 그랬어."
-박부현, 선아 씨 남편
봄에는 오토바이 타고 벚꽃놀이 가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 끼얹으며 꺄르르 웃고, 가을에는 같이 단풍구경 다니며, 두 사람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내가 등허리 업고 막 쫓아다니고 그랬습니다. 내가 많이 업고 다녔습니다. '그래 좋나? 좋다' 이러면서 손바닥을 팍팍 치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아내가 좋아했던 꽃은 들국화였어. 뒷산에 올라가면 들국화로 화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씌워주곤 했어.
"산에 올라가면 들국화가 있잖아요. 들국화를 모자같이 만들어서 탁 끼워주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생일이면 근사한 케이크는 없어도, 초코파이면 충분했어. 서로의 마음은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아니까. 비싼 옷, 값나가는 보석은 못해줘도, 오순도순 함께 있는 것만으로 큰 기쁨이야.
"그때는 참 저한테는 완전 봄날이고. 서로 이렇게 뽀뽀도 하고. 그냥 이렇게 안으면서 뽀뽀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그런데 가끔씩, 아내가 남모르게 눈물을 훔쳐. 뭔가 고민이 있는 거 같아. '내가 뭘 잘못했나? 혹시 결혼을 후회하나?' 부현 씨는 아내 걱정뿐이야.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사실은 자기가 전에 한번 결혼한 적이 있었고, 딸도 하나 있다는 거야. 그 딸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난다는 거야. 아내의 고백에도 부현 씨는 "괜찮다, 다 지난 일 아니냐"며 감쌌어.
"그런 거는 신경 안 썼어요. 집에 있으니까, 나는 있으면 행복한 거예요 그냥."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오히려 부현 씨는 조금씩 돈이 생기면 아내에게 건넸어. 그러면 아내는 그 돈을 가지고 어딘가에 갔다가 돌아왔어. 부현 씨는 그저, '딸 보러 갔겠거니' 생각하며 묵묵히 기다렸어.
"자기가 낳은 딸이니까 보고 싶겠지 아마. '그래서 아마 왔다 갔다 안 했겠나' 이런 생각도 들어요. 갔다 하면 일주일은 있다가 오더라고. 그냥 '갔다 왔나, 잘 갔다 왔나' 이렇게 하고 말았어요. 그냥 '너만 돌아오면 됐다' 그렇게 말했어요."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어. 남자는 부현 씨를 향해 대뜸 고함을 지르더니 욕설을 내뱉어. 선아 씨의 전남편이었어. 부현 씨는 그에게 차분히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어. 근데 돌아오는 대답이 기가 막혀. 선아 씨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속이 뒤집어지는 입장이지. 오장육부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더라고. 원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니, 돈이라는 거예요. '그럼 돈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했더니 '소 한 마리 값을 줘야겠다'고 그러더라고. 차라리 여자를 포기할까 이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그래도 나하고 같이 만났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고. 그 돈을 다 줘버렸어요. 다 가져가라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결국 부현 씨는 애써 키운 소를 팔아 그 돈을 전남편에게 건넸어.
▲ 에이즈의 공포
그즈음 김해 보건소는 부산 보건소에서 전화를 받았어. 자기들 쪽에서 에이즈 검사를 한 분이 김해로 주소 이전을 했는데, 검사 결과 양성이 나왔다는 거야. 당시엔 보건당국이 에이즈 환자를 의무적으로 관리했어. 환자의 주거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지.
부현 씨가 농사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는데, 못 보던 사람들이 집에 와있어. 보건소 직원들이야. 아내에게 알려줄 게 있어서 집을 찾아왔대. 부현 씨는 무슨 일이지 짐작도 안가. 그런데 그때, 아내와 이야기를 마친 직원들이 부현 씨를 따로 불러 조심스레 말을 건네. 아내 선아 씨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약을 갖다가 한 봉지를 주고 가더라고. 그리고 나보고 콘돔 같은 걸 한가득 주고 가고. 그래서 '이걸 왜 주고 가냐' 했더니, 관계를 하면 안 된다는 거야. '왜 안되느냐' 물어보니까, 그래서 그때 얘기를 하더라고. 에이즈에 걸렸다고. 우린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이게 무슨 이런 궤변이 있나' 내가 그랬어요. 그리고 멱살도 잡았어요."
-박부현, 선아 씨 남편
부현 씨는 너무 화가 나. 내 아내가 에이즈라고? 에이즈라는 병이 뭔지, 부현 씨도 TV에서 본 적이 있어. 몸에 반점이 생기고, 불치병이라 알려졌던 병. 내 아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매일 아침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깨끗하게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누구보다 밝고 활발한 이 사람이? 나도 우리 선아도 건강하기만 한데 무슨 에이즈야! 화가 나서 당장 채혈을 했어. 검사 결과, 부현 씨는 음성이었어. 근데 선아 씨는, 재검 결과도 양성이 나왔어. 이젠 사랑하는 사람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럼 선아 씨는 어쩌다가 에이즈에 걸린 걸까. 질문조차도 상처가 될 수 있기에, 부현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어떤 이유로 병에 걸렸든 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 이야기를 내가 물어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상대방이 싫어하는 건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른 척하고 넘어간 거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그럼 에이즈는 인류 역사에서 언제부터 발병한 걸까. 인류가 에이즈란 병을 알게 된 건 1981년. 뉴욕의 한 신문에, '무서운 미지의 병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처음 보도됐어.
"동성애자 41명에게서 발견된 희귀 암"
"진단 후 24개월이 채 되지 않아 8명이 사망했다"
"발병원인은 알려지지도, 밝혀지지도 않았다"
에이즈 하면 떠오르는 증상인 피부 반점. 이 반점은 면역력이 떨어지면 피부에 발병하는 악성 종양이야. 어떤 약도 효과가 없어. 면역 기능이 떨어지며, 사소한 감염에도 죽음에 이를 수 있어. 그야말로 미지의 질병의 출현이었어. 인류는 공포에 휩싸였어. 시기도 20세기가 끝날 무렵이라, 세기말 징조라는 말까지 나와.
인류문명은 그동안 수많은 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러왔어. 가장 가까운 최근 바이러스는 코로나19. 모두의 일상이 완전히 무너졌었지. 그전에는 조류독감, 메르스, 에볼라, 신종플루, 사스, 그리고 좀 더 옛날로 가면 흑사병까지. 이렇게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 수많은 바이러스가 있었어. 그런데 그중 에이즈는 '현대판 흑사병'이라 불리며, 사형 선고로 여겨진 거야. 프레디 머큐리, 매직존슨 같은 유명인도 에이즈 감염자였지.
에이즈 발병 초기에는 주로 동성애자와 마약중독자가 감염됐기 때문에, 에이즈 환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매우 차가웠어. 그냥 병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비난받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차별과 냉대를 받았지.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숨겨야만 하는 병이 된 거야.
우리나라에 에이즈의 공포가 드리운 건, 1985년이야. 에이즈 감염자와 사망자의 수가 마구 늘어가는 가운데,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어. 병원에서 수혈로 인한 감염자도 나왔어.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어.
"전직 교사가 에이즈에 걸린 것으로 잘못 알고, 3살 난 딸을 살해해 암매장한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과 딸의 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반점이 생기자 에이즈 감염 증세로 착각하고 고민 끝에 동반자살을 결심했다. 결혼 전에 문란했던 과거로 인해 에이즈에 대한 공포심만 앞섰지, 정확한 지식이 부족한 데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정밀조사 결과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뉴스 보도 中
▲ 내 아내가 에이즈에 걸렸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에이즈는 무서운 병이지만, 부현 씨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어. 아내가 감염됐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내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 아내가 집을 나가는 일이 잦아지더니, 아예 사라진 거야.
"김해 바닥 온 곳을 다 돌아다녔어요. 그랬는데 이거 뭐 만날 수가 있나. 가보면 없고, 여기도 가보면 없고. 저기도 가보면 없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주변 사람들은 이제 잊으라고 모두 말렸지만. 부현 씨는 사라진 아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그때는 내가 많이 기다렸죠. 오직 그 사람 생각 밖에 없었으니까."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그렇게 시간은 1년 반이 지났고, 경찰서에서 드디어 선아 씨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거야. 부현 씨는 허둥지둥 경찰서로 달려갔어.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가출 직후 일자리를 구하던 아내는, 어떤 남자에게 속아 차에 탔다가, 여수 윤락가에 팔려갔다는 거야. 도망 나오고 싶어도, 촘촘한 감시망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대.
담당 보건소는 선아 씨가 연락이 닿지 않자 행방불명자로 처리해서 질병당국에 보고했어. 그러던 중 방역 당국의 추적망에 걸린 거야. 그럼 선아 씨는, 애초에 왜 부현 씨를 떠난 걸까. 남편에게 병을 옮길까 싶어, 그게 두려웠대.
"모르겠어요. 왜 떠났는지… 그냥 갑자기 떠나고 싶더라고… 솔직히 말하면, (남편에게 에이즈를) 옮길까 싶어서. 나한테 옮을까 싶어서… 나도 이 사람한테 옮기기 싫은 거야. 병도, 내가 덮어쓰고 가지."
-선아(가명), 박부현 씨의 아내
하지만 선아 씨가 법을 어긴 건 사실이야. 그 후 유치장에 수감된 선아 씨. 여기서 담당검사가 불편한 건 없는지 물었는데, 이 질문에 대한 선아 씨의 대답 때문에 유치장 안이 난리가 났어.
"모기가 많아서 불편해요."
선아 씨를 문 모기가 에이즈 바이러스를 옮길까 봐 모든 수감자들이 공포에 질려버린 거야. 그럼 에이즈는 모기를 통해 감염될까? 그럼 침, 땀, 눈물로는? 악수나 포옹은 어떨까? 정답은, 전부 '아니요'야. 모기가 흡입하는 혈액의 양이 매우 적고, 모기의 체내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증식할 수가 없대. 그래서 전파가능성이 없어. 침, 땀, 눈물에도 바이러스가 포함돼 있긴 하지만 전염시킬만한 양이 아니야. 피부 접촉으로도 전염이 안돼. 에이즈 바이러스는 상처를 통해 혈액이 몸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감염이 안돼. 하지만 잘못된 인식으로, 에이즈 환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꺼려했어. 결국 선아 씨는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수감됐어.
아내가 에이즈 판정을 받고 감옥까지 갔어. 그런데도 부현 씨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어. 묵묵히 농사를 지었어.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을 마무리했어. 그 후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 아내에게 면회 가기 위해서.
"면회도 내가 한 번도 안 빠졌어요. 그때는 힘든 것도 없어요. 그게 낙인 데요 뭐."
집에서 교도소까지 2시간이야. 왕복으로 하면 4시간을 오토바이로 오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래도 선아 씨의 얼굴을 봐야 했어. 에이즈 환자가 가장 고통받는 게 가족들에게 외면받는 외로움이래. 그런데 선아 씨는 그런 걱정이 없었어.
면회실 칸막이 사이로 두 사람은 미래를 꿈꾸며 대화를 나눴어. 마치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황정민과 전도연이 면회실에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절절하게 대화하던 그 명장면처럼.
"헤어진다는 생각은 꿈도 못 꾸죠. '널 사랑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몸 열심히 돌보고'. (출소하면) '우리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안 가본 데도 가보고 그렇게 한번 해보자' 그랬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그리고 두 사람은 편지도 주고받았어.
"잘 지내고 있지? 생각이 많이 나. 당신하고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 절에 놀러 가 사진 찍고 할 때, 당신이 나한테 김밥 재료 사 왔을 때가 많이 생각나.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 그리고 당신이 내 옥바라지한다고 고생하고 있는 것 다 알아. 사랑하는 부현 씨, 내가 좀 더 당신 신경 썼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 참 후회하고 있어. 만약에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내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그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해줘."
-남편에게 쓴 선아 씨의 편지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8개월. 시간이 지나 추운 겨울, 부현 씨는 밤새 한숨도 못 잤어. 8개월이 지나 선아 씨가 출소하는 날이거든. 교도소의 철문이 열리고, 드디어 아내의 모습이 보여. 이젠 꼭 안아줄 수 있고, 손을 잡아줄 수 있어.
"바로 안았죠. 그리고 울었죠 둘이. '우리 열심히 살자, 남 의식하지 말고'. '우리끼리만 얼굴 보고 살자'..."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그런데 문제가 있어. 선아 씨가 집으로 들어오기를 주저해.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온 동네에 소문이 나서, 그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가 너무 두려운 거야. 부현 씨는 농사일과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도시에 방 한 칸을 잡았어. 두 사람을 모르는 곳으로 간 거야. 하지만 도시 생활은 녹록지 않았어. 에이즈 가족이라는 딱지를 단 채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거든. 그래도 박스 줍는 일과 작은 장사를 시작했어. 소박한 시작이지만,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대.
▲ 영화가 아닌 현실의 엔딩
시간이 흘러 2009년. 선아 씨가 출소한 지 6년이 지났어. 두 사람은 특별한 장소로 갔어. 사진관에서 웨딩촬영을 하기로 했거든. 함께 꿈꿔왔던 결혼식을 준비하게 된 거야.
돌고 돌아서 만난 지 10년 만에 드디어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어. 가족, 친구들의 축복 속, 선아 씨는 에이즈 환자가 아닌, 신부로 축하를 받았어. 늘 꿈에 그리던 순간이야.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제주도로 신혼여행도 갔어.
그리고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어. 그럼 이 두 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지나간 이야기는 다 잊어버리고, '우리 새 마음, 새 뜻으로 살자' 이랬는데. 자꾸 아이 때문에 찾아오고 또 가고, 또 왔다 갔다 하고 이러니까. 집을 나가서 그 뒤로 행방불명돼서 못 찾겠는 거예요. 이거 뭐 만날 수가 있나. 가보면 없고, 여기도 가보면 없고, 저기도 가보면 없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선아 씨가 마음을 못 잡았는지, 또 집을 나갔다는 거야. 부현 씨는 이번에도 역시 돌아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렸어.
"많이 기다렸습니다. 그때도 오기만을 기다렸죠. '그 애가 내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겠나'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박부현, 선아 씨 남편
그런데 어느 날, 부현 씨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어.
"그때가 아마 번개가 엄청나게 친 날이에요. 비도 오고 밤에. 그런데 누가 왔는지, 막 문을 두드리고 이러는데 내가 나가보니까. 아내가 왔는가 싶어서 문을 몇 번을 열어봐도 없어요. 그랬는데 그날따라 자꾸 이상한 번호가 뜨더라고. 그래서 '이게 무슨 번호고. 모르는 번호인데 받아서 뭐 하겠느냐'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냥 내버려 뒀는데, 계속 전화가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받아보니까, '김해 경찰서 누구 경찰관입니다' 이러더라고. 저보고 '어디 병원 빨리 가보세요' '선아 씨가 죽었습니다' 이러는 거야. 나는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갔는데, 가보니까 처량하게…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많이 납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눈물 밖에 안 납니다."
-박부현, 선아 씨 남편
선아 씨가 세상을 떠났어. 결혼식을 올리고 불과 다섯 달만의 일이야. 결혼식 때만 해도, 선아 씨가 건강했었는데,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었나 봐. 에이즈에 감염됐어도 약을 잘 복용하고 관리만 잘하면, 문제없이 살 수 있는데. 아마도 약을 잘 챙겨 먹지 않았던 거 같아.
부현 씨는 특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선아 씨가 생각난대. 그녀와 함께 한 벚꽃구경, 물놀이, 단풍구경.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그리고 선아 씨가 가장 좋아했던 들국화. 그 꽃을 보면 항상 아내가 떠올랐대.
"이걸 가져다가 뭉쳐서 목에다 걸어주고, 귀에도 꽂아주고 했는데.."
부현 씨가 들국화 꽃다발을 안고, 아내가 잠든 곳을 찾았어.
"잘 지냈나. 보고 싶었다…열심히 살자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 마지막 선물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5년이 지났어. 이젠 너무 늙어버려서 아내가 내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까 걱정도 돼. 그동안 못 해준 게 많아서 후회도 돼. 그래서 부현 씨는 아내한테, 생전에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던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으시대. 이젠 직접 전할 수 없는 선물, 부현 씨가 직접 고른 머리띠야.
"예뻤지. 머리가 이랬던 게, 머리띠를 하면 이렇게 올라갑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얼굴이 훤하게 보이는 거죠. 이 얼굴이 조그마하니 동글동글하게 보여요. 그게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여요. 지금도 보듬고 싶고 안고 싶고 그래요. 뽀뽀해주고 싶고."
-박부현, 선아 씨 남편
부현 씨가 선아 씨와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보단 이렇게 되물었대. "아내가 이런데도 여전히 사랑하시나요?"라고. 그런데 누군가의 사랑이 꼭 남들에게 이해받고 인정받아야만 하는 걸까. 부현 씨에겐 이런 질문이 모두 무의미했어. 오직 그에게 의미 있는 건 선아 씨의 웃음뿐이었어.
"나중에 선아 씨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무슨 말을 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에 부현 씨는 이렇게 대답했어.
"당신을 사랑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에이즈 검사를 받느라, 여수 지역이 난리 났던 거 기억나지? 그런데 그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에이즈 감염인과 1번 성접촉을 했을 때 전염될 확률은, 0.04~1.38% 정도래. 또 콘돔을 사용하면 이 가능성마저 거의 없어져. 그리고 선아 씨와 함께 생활했던 부현 씨도 결국엔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어. 물론 조심해야 하는 건 맞지만, 막연한 공포에 휩싸였던 당시 생각과는 다른 결과지.
에이즈가 세상에 등장한 지 40여 년이 지났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매년 천여 명의 신규 감염인이 발생하고 있대. 아직 에이즈 치료제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면 정상적인 수명대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대. '죽음의 병'이 아닌, 고혈압, 당뇨 수준으로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환 중 하나인 거지.
사실 질환보다 무서운 건, 에이즈에 대한 편견일 거야. 앞으로도 바이러스에 대한 전쟁은 계속될 거야. 그때마다 잘못된 편견으로 비난을 보내기보단, 질환 자체에 대해 의학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