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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사태로 온 나라가 엄청난 충격과 함께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내란 수괴'로 지목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며 직무가 정지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올림픽과 더불어 지구촌 최대 축제라는 FIFA 월드컵이 군사독재정권의 비상계엄 속에 치러진 적이 있습니다. 승부 조작과 심판 매수 의혹으로 얼룩졌던, 역사상 가장 추악했던 월드컵으로 악명이 높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입니다.
국민 불만을 월드컵으로 돌린 군사정권
1976년 아르헨티나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 민간인 대통령을 축출하고 집권했습니다. 그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습니다. 인권 탄압과 유린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군사정권에 의해서 살해되거나 실종됐습니다. 이른바 '더러운 전쟁'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비상계엄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무려 7년간 이어졌습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패전으로 군부정권이 종식됐고 1983년 민간인 대통령 라울 알폰신이 집권한 이후 비상계엄은 해제됐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아픈 역사이자 '흑역사'였습니다.
1978년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군사독재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고, 독재자 비델라 대통령은 자국에서 개최되는 1978년 월드컵을 그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이 절실했던 비델라 대통령은 대회 조직위원장에 자신의 심복인 카를로스 라코스테 해군 대령을 앉히며 직접 월드컵에 개입했습니다.
치졸한 '아르헨티나 우승 프로젝트' 가동
여기서 첫 번째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지금은 조별 리그의 마지막 경기는 승부 조작과 담합을 막기 위해 동시간대에 열리는데,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대회 조직위원회가 재량으로 경기 시간을 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회 8강 리그 다른 조(A조)의 경우 마지막 두 경기가 같은 시간대에 열렸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속한 B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를 먼저 치르도록 한 것입니다. 이유는 아르헨티나의 홈경기를 저녁 시간대에 치러 보다 많은 관중들이 와서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브라질 측에서는 반발하며 같은 시간대에 경기를 치르게 해달라고 대회 조직위와 FIFA에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경기를 하는 아르헨티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 결과를 보고 자신들의 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겨도 되는지 아니면 이긴다면 몇 골 차로 이겨야 하는지, 계산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회 조직위와 FIFA는 브라질 측의 요청을 묵살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가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 45분에 먼저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 브라질이 3대 1로 승리해 브라질은 2승 1무에 6득점 1실점으로 골득실이 +5가 됐습니다.
비델라 대통령, 경기 직전 페루 라커룸 방문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경기는 브라질-폴란드 경기가 끝나고 약 30분 후인 오후 7시 15분에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경기 전에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 대표팀의 라커룸을 방문한 것입니다. 경기 직전에 국가 원수가 상대 팀 선수들의 라커룸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격려 차원의 방문이었지만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군사독재자인 비델라 대통령은 페루 선수들에게 두 나라 사이의 우호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낭독했다고 합니다.
페루를 6골 차로 꺾고 결승 진출
경기가 시작되자 아르헨티나는 전반 21분 만에 간판 공격수 마리오 캠페스가 선제골을 터뜨렸습니다. 이어 전반 43분 추가 골로 2대 0으로 앞선 채 전반전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후반 들어 골 폭풍을 몰아쳤습니다. 후반 4분과 5분, 연이어 골을 넣으며 일찌감치 4대 0을 만들었습니다. 거짓말처럼 결승 진출에 필요한 4골 차 리드를 잡은 것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후반 22분과 27분 연달아 골을 추가하며 결국 6대 0 대승을 거뒀습니다. 브라질을 골득실에서 제치고 결승에 진출하자 홈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페루 선수들은 경기 내내 소극적인 플레이와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해 일부러 져준 거 아니냐는 승부 조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습니다. 페루는 주축 선수 4명이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수비수가 공격수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또 6골을 허용한 페루의 라몬 퀴로가 골키퍼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살았던 점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쉽게 탈락한 브라질 언론을 중심으로 승부 조작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브라질로서는 경악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브라질 언론은 "비델라 군사 정권이 페루에게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 주는 대가로 선수를 매수했다. 페루에 대규모 무상 곡물 지원을 해주었다"는 의혹을 보도했습니다. 1986년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아르헨티나 군사정부가 경기에서 져준다면 수백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페루 측에 제의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사자인 아르헨티나는 이를 부인했고, 페루 선수들 사이에서는 주장이 엇갈리며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2패로 탈락이 확정된 페루와 4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 했던 아르헨티나의 동기 부여의 차이가 이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며 음모론적 시각을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네덜란드에 파울 55개 선언... 아르헨티나 논란의 첫 우승
세계 축구팬의 관심이 집중된 결승전도 뒷말이 많았습니다. 결승전 전날 군부정권에서 동원한 시위대가 네덜란드 선수단 호텔 앞에서 밤새 시끄럽게 농성을 하며 선수들의 수면을 방해해 컨디션 난조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경기에서도 편파 판정 논란이 생겼습니다. 이탈리아인 주심 세르지오 고넬라가 네덜란드에 무려 55번의 파울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네덜란드는 선전을 펼쳤습니다. 전반 38분 아르헨티나 마리오 캠페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후반 37분 나닝가의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는데 이 순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리버 플레이트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7만여 명의 관중은 침묵과 정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후반 추가시간 네덜란드 렌젠브링크의 슈팅이 골대를 맞았는데 네덜란드로서는 통한의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승부는 연장전에 돌입했고 연장전에서 아르헨티나가 2골을 넣고 3대 1 승리를 거두며 정상에 올랐습니다.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이었습니다. 비델라 정권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지금까지도 찜찜한 우승으로 남아 있습니다. 트로피를 들어 올린 아르헨티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회 페어플레이상까지 거머쥐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