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데 병원 개원?... 경찰, '허위 잔고 증빙' 수사 착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전국에서 의원급 의료기관은 매년 평균적으로 1천800여 곳이 개원하고 있습니다. 병·의원들이 문을 열 때, 생각보다 자금이 많이 필요합니다. 개원 자금은 진료과마다, 규모에 따라,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공통적으로 임대 보증금, 인테리어, 홈페이지 운영 및 마케팅, 의료장비, 초기 운영비 등이 들어갑니다.
서울 마포구 지역에 60평대 치과를 개원한다고 가정하면 보증금 2억 원에 월세 1천만 원, 인테리어 1억 5천만 원, 홈페이지 및 마케팅 500만 원, 의료장비 1억 원, 전자제품 등 기타 2천만 원, 직원 월급 등 초기 6개월 운영비 1억 5천만 원 등 6~7억 원 이상이 필요합니다.
자금이 부족할 경우 어떻게 할까요? 먼저, 의료인 전용 은행 대출 상품이 있습니다. 소위 '닥터론'이라 불리는 상품들입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에 대출 한도도 높습니다. 치과의 경우에는 최근 6억 원까지 한도가 나오는 시중은행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금이 충분하지 않고 이미 대출이 있는 상태라면 은행 대출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수도 있겠죠. 이런 경우 개원의들은 <신용보증기금>을 많이 이용합니다.
신용보증기금은 기업이나 개인이 대출을 받을 때 보증을 제공해 부족한 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돕는 <준 정부기관>입니다. 즉, 정부가 보증을 서서 은행 대출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겁니다. 신용보증기금은 여러 보증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개원의들이 많이 사용하는 건 <'예비창업보증'>이란 제도입니다.
예비창업보증은 전문 자격을 갖고 있거나 기술과 지식 분야에서 유망한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해 주는 제도입니다. 전문 자격에는 변호사, 의사 등이 포함되고 기술과 지식은 이공계 석박사 등이 포함됩니다. 이 제도를 이용하면 최대 10억 원까지 보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 자본의 100%까지만 보증을 서줍니다. 다시 말해, 10억 원을 보증받으려면 내 통장에 10억 원이 있는 걸 증빙해야만 합니다.
예비창업보증은 매년 평균 7-8천억 원 정도 운용되는데, 의사나 약사 같은 의료 전문직에게 90% 가까이 집중 지원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 5년간 예비창업보증을 통해 대출받은 병·의원과 약국은 1만 93곳에 달합니다. 그런데 일부 병·의원과 약국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 제도를 이용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개원 자금은 많이 필요한데, 자기 자본이 부족해 예비창업보증을 이용할 수가 없는 의사들에게 대출 브로커가 개입해서 해결을 해준다는 겁니다.
수법은 간단합니다. 대출 브로커가 잠깐 의사의 통장에 돈을 넣었다 빼서 허위로 잔고 증빙을 하는 겁니다. 대신에 의사한테 직접 송금을 하지 않고, 의사의 가족 계좌를 한번 거칩니다. 타인으로부터 빌린 돈, 즉 상환 의무가 있는 차입금은 자기 자본으로 인정이 안 되지만, 배우자나 부모님 등 직계가족으로부터 받은 돈은 인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실태를 알려온 의료 대출 업계 관계자는 "돈을 빌려주는 기간은 딱 3주면 된다"며 "예전에는 잔액 증명서 찍어서 신용보증기금에 제출하는 날, 딱 하루만 빌려줘도 걸리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잠깐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브로커는 수수료를 받는데 통상 대여금의 3~7% 수준을 받습니다. 10억 원을 잠깐 빌려주면 3천만 원부터 많게는 7천만 원까지 수수료로 받아 가는 겁니다. 수수료 지불 방법은 브로커마다 다른데, 보통 현금으로 받으며 국세청 추적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대출 브로커들은 이를 <'개원 컨설팅'>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의료인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면 '신용보증기금 활용 대출법' 등 여러 광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시중은행과 위탁계약을 체결한 법인에 소속된 대출 상담사들입니다. '닥터론' 같은 의료인 전용 대출 상품을 판매하면서 신용보증기금을 활용한 대출까지 도와주는 겁니다. 업계 관계자는 "신용보증기금 컨설팅만 하더라도 대출 상담사로서 수당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수익이 생기니까 다들 브로커로 나서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돈을 제공하는 이른바 '쩐주'는 누구일까요?
취재진은 브로커들 간의 대화 녹취를 입수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쩐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한 브로커는 "우리 쩐주는 다 원장이에요"라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의사들에게 돈을 불법적으로 대여하는 사람도 의사라는 겁니다. 취재진이 파악한 쩐주들은 의료기기 업체 대표, 컨설팅 업체 대표, 세무사 등이었습니다. 심지어, 부자 되는 법에 대해 논하는 유튜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싼 수수료를 받고 돈을 대여하는 행위는 미등록 대부 행위에 해당해, 엄연한 불법입니다. 이런 불법 알선 대출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부실 대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취재진은 한 사례를 찾아냈습니다. 지난 2020년 대구에서 개원했다가 2년 만에 부도가 난 한방병원인데, 당시 신용보증기금을 통해 약 7억 4천만 원의 보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취재 결과 해당 병원장은 자기 자본이 5천만 원 수준으로 턱없이 부족했고, 대출 브로커를 통해 허위 잔고 증빙을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병원장도 SBS 취재진에 "다른 사람이 통장에 돈을 입금해 준 것은 맞다"며 "대출 상담사로부터 신용보증기금을 통해 대출을 받는 방법이 있다고 소개받았을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