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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품없는 술병 깨뜨렸더니 대반전…중국 국주 '마오타이'에 얽힌 사연 [스프]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홍군의 대장정이 낳은 '마오타이' - 구이저우 쭌이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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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두허 도강 직전 가족과 이별하는 홍군 병사를 묘사한 기록화
1934년 10월 16일 밤 장시(江西)성 위두(于都)현. 8만여 명의 대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도강은 5일 동안 지속됐다. 공산당과 홍군이 국민당군의 오랜 공세에 루이진(瑞金)을 버리고 탈주에 나선 것이다.

2만 5,000리 '장정(長征)'의 서막이었다. 홍군은 먼저 국민당군의 저지선을 돌파한 뒤 11월 27일 광시(廣西)자치구 상강(湘江)에 도착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5일간 국민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상강을 건넜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2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6,000명은 포로가 됐으며 2만여 명이 탈영했다.

도강하며 전투를 벌이는 홍군 병사를 묘사한 쭌이회의기념관의 조각상
남은 병력이 3만여 명에 불과할 정도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었다. 상강전투가 가져다 준 충격은 컸다. 치욕스러운 대패에 공산당 총수였던 보구(博古)는 자살하려 권총을 꺼내 들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나서서 겨우 말렸다. 상강을 건넌 뒤에도 홍군의 시련은 계속됐다.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 먀오얼산(苗儿山)을 넘었다.

먀오얼산은 해발 2,141m로 광시에서 가장 높다. 또한 산세가 아주 험준하다. 홍군은 좁은 절벽 길을 사흘 동안 굶은 채 걸었다. 적지 않은 병사와 말이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홍군이 장정 중 산속에서 벌였던 전투 광경을 재현한 쭌이회의기념관의 전시
어렵게 구이저우(貴州)성에 들어가 소수민족 거주지를 빠르게 통과했다. 1935년 1월 국민당군으로 위장해서 쭌이(遵義)를 무혈점령했다. 쭌이에서 중국 공산당의 역사가 바뀌었다.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려 마오쩌둥(毛澤東)이 당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1927년 마오는 1차 국공합작이 깨지자, 고향인 후난(湖南)성 농촌에서 추수 폭동을 일으켰다.

몇몇 소도시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아 진압됐다. 그러자 마오는 600명의 잔존 병사를 이끌고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

장정 중 쭌이에 도착해 물과 차를 마시는 홍군 병사들
징강산을 근거지로 세력을 넓혀서 장시성 남부 전역을 점령했다. 1931년 공산당은 루이진을 수도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성립했다. 이때 공이 큰 마오가 국가주석이 됐다.

당시 소비에트는 인구수가 1,0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소련이 코민테른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마오는 권력에서 밀려났다.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보구, 당서기인 저우언라이,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 등 3인단이 실권을 잡았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위세는 커져갔다.

쭌이에 도착한 공산당과 홍군 지도자를 묘사한 동상
그래서 장제스(蔣介石)는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홍군은 국민당군의 4차례 공세를 치고 빠지는 유격전으로 물리쳤다. 하지만 국민당군이 진지를 파오며 공격해 오자 대패했다.

이에 3인단은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장정을 결정했다. 쭌이에 입성한 뒤 공산당과 홍군은 휴식을 취한 뒤 1월 15일에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20명이 참석했다.

먼저 보구는 5차 진지전의 맞대응과 상강전투의 결과를 변명했다. 뒤이어 저우언라이는 그간의 패배가 3인단의 잘못된 판단에 벌어졌다며 자아비판했다.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했던 공산당 지도자를 묘사한 조각상
다음 날 회의에서는 마오쩌둥이 나섰다. 마오는 중국 역사와 고사를 인용하며 "보구와 브라운은 중국 현실을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했다.

본래 마오는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유격전으로 맞서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진지전 실패와 상강전투 패배를 지적하면서 "중국에서는 중국에 걸맞은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참석자 대부분이 공감했다.

회의 3일째 되는 날 마오를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선출하고 3인단을 해체했다. 또한 저우가 군사지휘권을 행사토록 하되, 마오가 보조를 취하도록 했다.

장정을 완수한 홍군 1군단과 공산당 지도자(위) 사진
이처럼 회의 결과는 마오의 완벽한 승리이자 화려한 부활이었다. 쭌이 회의 전까지 마오는 한 번도 당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쭌이 회의를 통해 당권을 움켜쥐었고, 1938년에는 군사위원회 주석을 꿰차며 군권까지 장악했다. 또한 쭌이 회의를 기점으로 코민테른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마오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 뒤 공산당과 홍군은 쭌이를 떠나 마오타이(茅台)진을 가로지르는 츠수이허에 도착했다. 강 맞은편의 국민당군과 전투하면서 4차례의 도강 작전을 벌였다.

마오타이진 주민이 건네주는 술을 마시는 마오쩌둥과 홍군을 묘사한 동상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은 부상당한 병사의 상처를 술로 소독하고 치료해 주었다. 결국 홍군은 도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홍군은 주민이 건네준 술을 마시며 승리를 자축했다.

마오타이진은 쭌이에서 103km나 떨어져 있고, 해발은 423m에 달하는 산골마을이다. 하지만 마을 입구부터 '중국 제1의 술 고장(中國酒都第一村)'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오늘날 중국 최고의 술로 손꼽히는 마오타이주 때문이다. 마오타이주의 역사는 오래됐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는 남방 정벌을 위해 당몽 장군과 대군을 파견했다.

술을 빚는 장인이 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상
당몽은 구이저우를 정벌한 뒤 츠수이허(赤水河) 옆에서 술을 마셨다. 술은 맛과 향이 뛰어났다. 이에 한무제에게 술을 장계와 함께 바쳤다.

당대에는 마오타이진의 술이 조정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선정됐다. 그때부터 원대까지 술 생산은 관부가 독점했다. 명말·청초에는 한족 이주민이 마오타이진에 유입되면서 민간 술도가가 늘어났다.

19세기 초 20여 개의 양조장이 성업했고, 1840년에는 한 해 생산량이 170여 톤에 달했다. 마오타이주가 크게 이름을 떨친 것은 19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츠수이허의 이 부둣가에서 마오타이진의 술이 전국으로 운송됐다.
박람회 초기에는 관람객이 진열된 마오타이주의 단순한 병 모양과 볼품없는 포장을 보고 외면했다. 어느 날 대표단 중 한 사람이 고의로 술병을 깨뜨렸다.

술 향기가 곧 박람회장 전체에 퍼졌고, 관람객은 향기를 따라 마오타이주 코너에 몰려왔다. 따라서 마오타이주는 당당히 금상을 차지했다. 이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마오타이주가 국주(國酒)의 반열에 오른 결정적인 계기는 장정에 나섰던 홍군과의 만남 덕분이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 추억을 잊지 못했다.

'국주 마오타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마오타이그룹의 정문
그래서 마오타이주를 정부 공식 연회주로 사용했다. 또한 마오타이주는 5차례 열렸던 전국술품평회에서 줄곧 8대 명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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