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지난 9월 트럼프와 해리스가 맞붙은 대선 후보 토론.
2020년 선거에서 패배를 몇 년째 인정하지 않는 트럼프를 비판하며, 해리스는 "세계 지도자들이 그런 트럼프를 뒤에서 비웃고 무시한다"라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트럼프가 바로 반박하며 예로 든 인물이 있습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였습니다. 트럼프가 한 말을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빅토르 오르반이라는 아주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어요. 사람들이 그를 강인한 사람(strongman)이라고 부르죠. 실제로 아주 터프한 사람입니다. 똑똑하고요. 헝가리 총리죠. 그 사람이 그랬어요. '아니, 왜 3년 전에는 멀쩡하던 세상이 지금 이렇게 난장판이 됐지? 트럼프가 없어서 그렇구나!'라고요."
전형적인 트럼프식 화법이었기에 말 자체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유럽연합 회원국 내 정치 지도자 가운데 가장 극우 성향에 가까운 인물이자,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오르반 총리가 자신을 칭찬한 걸 도리어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도 미국의 보통 정치인이라면 하지 못했을 말이니, 역시 트럼프다웠습니다.
재밌는 건 답변 중에 오르반을 묘사한 단어 "strongman"입니다. 말 그대로 옮겨서 "strong"과 "man"을 더하면, 트럼프가 생각했을 "강인한 사람"이란 뜻이 맞습니다. 하지만, 특히 정치인이나 권력자를 묘사할 때 "strongman"은 힘으로 원칙이나 사전에 한 약속을 짓밟는 독재자 혹은 권위주의 지도자를 뜻합니다. 트럼프는 이 단어의 또 다른 뜻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을까요? 트럼프라면 충분히 '그게 뭐가 중요해? 터프한 사람한테 터프하다고 부르는 걸 가지고 다른 뜻이 있느니 없느니 얘기할 게 뭐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자기식으로, 직설적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릅니다.
트럼프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미국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제시한 해법에 손을 들어줬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위협보다 중요한 것을 놓친 여당 민주당은 선거에서 졌고, 트럼프는 집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2기가 어떤 모습을 띨지 수많은 예상과 전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선거에서는 가장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어쩌면 장기적인 파급 효과는 가장 클 수도 있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트럼프가 민주주의 원칙을 어디까지 훼손하고 다시 쓸지 예상해 보는 일입니다.
트럼프가 어쩌면 그대로 답습하고 미국에서 재현하고 싶어 할 사례가 바로 오르반 총리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사례일 겁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마샤 게센이 오랫동안 오르반을 지켜본 헝가리 야당 정치인 발린트 마자르의 설명을 빌려 현재 집권 중인 권위주의 통치자들이 여기까지 온 경로를 살펴보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의 성공 비결을 얼마나, 어디까지 미국 정치에 접목할 수 있을지 예상해 봤습니다. 게센이 칼럼을 쓴 뒤 MSNBC와 인터뷰에서 한 설명까지 참고했습니다.
사실 게센이 우려한 권위주의 대통령 트럼프의 등장은 이번 선거를 분석하는 글에서 여러 차례 살펴본 주제이기도 합니다. 유세 현장에서, 인터뷰에서 하는 말처럼 정말 트럼프가 제왕적 대통령이 될지 살펴본 글이 그랬고, 상원에 자신의 인사를 검증받고 인준받지 않겠다는 태도가 왜 위험한지 살펴본 지난 글과 오늘 글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트럼프가 아무리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마구 휘두르려 해도 미국 민주주의 제도 곳곳에 숨어 있는 견제와 균형 원칙이 방지턱 역할을 해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트럼프도 그러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건 안일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의 행보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20세기 유럽에서 준동한 파시즘의 역사를 곱씹어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민주주의를 말살한 파시즘도 초기에는 아이러니하게 대중이 느끼는 당장의 필요에 영합한 포퓰리즘의 탈을 쓰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트럼프는 적어도 두 번째 임기 4년 동안은 가능한 한 오래 입법부와 사법부, 주 정부를 포함한 미국 정치 제도 전반에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할 겁니다. 게센은 한발 더 나아가 트럼프가 할 수만 있다면 민주주의 제도를 최대한 무력화하거나 폐기한 다음 기꺼이 독재자가 되려 할 거라고 내다봅니다.
지금까지 정치 이력이 닮았다고 해서 앞으로 겪게 될 정치적 운명까지 비슷할 거라고 가정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유인과 기제가 비슷한 두 사람인 만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모습을 예측할 때 오르반이 2010년 다시 집권한 뒤 지금까지 내린 결정들을 참고하면, 유용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오르반이 지난 15년간 한 일 중에 마자르가 말한 독재적 돌파구에 해당하는 조치들이 무엇인지, 트럼프가 미국에서 비슷한 일을 하려 한다면, 어떤 모습을 띨 테고 이를 어떻게 감지하거나 막을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마자르의 정의를 빌리면, 독재적 돌파구란 법치(rule of law)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통치에 필요한 법(law of rule)을 만드는 일입니다. 트럼프가 추진하려 할 독재적 돌파구는 뭐가 있을까요? 몇 가지 후보를 골라봤습니다.
- 제왕적 대통령
지난해 대법원은 대통령이 재임 중에 한 일에 대해 광범위한 면책특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중에 보수 성향 대법관 3명을 임명하면서 보수 우위로 기울어진 대법원이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을 법 위에 군림하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판결이었습니다. 이 판결만으로도 미국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에 한 발 더 다가선 셈입니다.
여기에 의회는 상원, 하원 모두 트럼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공화당 의원(MAGA Republicans)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8년 전 첫 번째 임기를 시작할 때도 상원과 하원의 다수당이 모두 공화당이었지만, 그때는 트럼프와는 결이 다른 전통적인 보수 공화당원이 주류를 이루던 때였습니다. 리즈 체니 같은 의원이 대표적이죠. 지금은 트럼프와 마찰을 빚던 의원들은 공화당 경선에서 대부분 축출됐습니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충성한 맷 게이츠 같은 의원을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하는 등 화끈한 논공행상을 보여주며,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서도 무언의 압박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통령의 인사권을 검증하는 건 헌법이 보장한 권한인데, 트럼프가 이마저 무력화하려 한다면 민주주의 원칙을 또 하나 폐기하는 결정이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국가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의 가족이나 측근들에게 과도하게 허락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 때 게센이 칼럼에서 지적한 대로 비상사태에 발휘할 수 있는 특별 행정명령을 통해 평소에는 국가 기밀에 접근할 권한이 제한된 백악관 참모들과 자신의 측근들에게 각종 기밀 정보를 열람하고 취급할 수 있는 인가를 임시로 대거 발급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한다면 법치의 근간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자꾸 예외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법치를 무시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위한 법을 자기 입맛대로 고르는 일의 전형일 겁니다.
- 언론 탄압, 대학 폐쇄
2010년 재집권한 오르반 총리는 자신을 비판하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언론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칼럼에도 소개되지만, 연구기관인 대학을 폐쇄해 나라 밖으로 쫓아내 버렸죠. 모두 다 오류가 없어야 할 권력자와 정부 여당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짓밟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어느덧 헝가리 언론에서는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장 오르반 총리나 푸틴 대통령이 한 수준의 언론 탄압이나 검열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트럼프는 특히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언론을 길들이는 법을 체득했을 겁니다. 이번 선거는 전통적인 언론을 상당수 유권자가 외면하면서 언론이 여론을 읽지 못했고, 팟캐스트나 소셜미디어 등 대안 언론이 기존의 언론을 상당 부분 대체한 선거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자신에게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언론사의 사주를 괴롭히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제프 베조스나 LA 타임스의 패트릭 순숑 같은 갑부 언론사주들은 대통령에게 밉보였다가 다른 사업체가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LA 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독자들의 비난, 기자나 편집국 직원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선거 전에 신문사 논설위원실 명의로 해리스를 공개 지지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트럼프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대학교들도 떨고 있을 겁니다. 트럼프가 이번 선거에서 서민,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얻은 데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나 몰라라 하면서 잘난 척이나 하는 엘리트"를 향한 비판이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곳이자, 차세대 엘리트를 키워내는 산실이 바로 대학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교육부를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단 트럼프는 교육부 장관에 2기 행정부를 준비하는 그림자 내각이란 평가를 받는 조직 미국 우선주의 정책연구소의 소장이자,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린다 맥마흔을 지명했습니다. 상원의 인준을 거치면, 맥마흔 장관에게 주어질 첫 번째 미션은 대학에 보내는 연방 정부의 교부금과 지원금을 대대적으로 삭감하거나 말 잘 듣는 대학에만 선별적으로 지급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될 겁니다.
- 군대의 사유화
민간이 선출해 구성된 정부가 군을 통제할 수 있느냐는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척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대로 군의 정치적 중립성도 중요한 가치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는 헌법을 지키고 자국 영토와 국민을 수호하는 임무만 수행해야지, 대통령과 여당의 정적을 처단하는 일에 동원되면 안 됩니다.
트럼프는 이 문제에서도 아슬아슬한 발언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특히 2기 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불법 이민자를 대대적으로 추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이 작전을 수행하는 데 미군을 동원할 수 있는지 검토 중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대통령이 군대에 미국 영토 내에서 군사 작전이라고 보기 어려운 작전을 지시하는 게 헌법상 문제는 없는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트럼프는 논란에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명령하면 군대는 따르는 수밖에 없을 거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