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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1편에서는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를 살펴보았습니다.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수출 점유율이 중국에게 밀리고, 시스템반도체에서도 세계 선두와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계에서는 반도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 52시간 근무제의 예외 적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말로 반도체 위기의 원인일까요? 이번 편에서는 근무시간 확대와 관련된 입장을 하나씩 살펴보며, 더 나은 해결책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입장 1. "주 52시간 제도가 반도체 위기를 불러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이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를 선도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에는 주 7일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고, 새벽 2시까지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TSMC는 2014년부터 나이트호크(야응부대 夜鷹部隊)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R&D 인력들은 24시간 3교대 근무를 하고 있죠. 각국의 최고 R&D 전문가들이 반도체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칩 산업에서는 하루 24시간, 1년 내내 기계를 가동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한밤중에 기계가 고장 나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누군가가 와서 고칠 수 있지만, 대만에서는 새벽 2시까지 고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업무 문화에서 비롯된 경쟁력입니다.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의 이야기입니다. 올해 8월 기준 대만 근로자의 월평균 근로시간은 180.3시간입니다.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의 월평균 근로시간이 157.6시간이었고요. 정규직만 따로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174.5시간보다 대만 근로자의 근로시간이 더 깁니다. 모리스 창은 TSMC 성공 비결로 '축적의 시간'을 꼽아요.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그만큼 쌓였으니 결과물이 나온다는 거죠.
경쟁국들은 저렇게나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주 52시간으로 막혀 있다는 게 산업계의 입장입니다.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예외 규정을 통해 근로시간에 틈을 열어주고 있는 만큼 벤치마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에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 그러니까 화이트칼라 예외 규정 제도가 존재합니다. 근로시간을 가지고 업무 성과를 평가하기 어려운 고소득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적용되는 규정인데요. 주 684달러 이상 벌거나 연 소득이 10만 7,432달러를 넘길 경우 규제에서 제외하는 식이죠.
일본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습니다.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는 연간 수입이 1,075만 엔 이상인 전문직들은 규제 대상에서 예외로 인정하고 있거든요. 증권사 애널리스트, 외환 딜러, 컨설턴트, 연구개발자, 금융상품 개발자 등 일부 직군에만 적용해서 조금 더 유연한 근무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산업계에서는 우리나라에도 반도체 직군 등에 한정해서 조금 더 유연한 근무 제도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입장 2. "반도체의 위기는 주 52시간제 때문이 아니다."
또 미국의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와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엄밀히 살펴보면, 사실은 근무시간 규제를 없애주는 제도가 아니라는 점도 확인해봐야 합니다. 미국은 애초에 연장근로시간에 따로 제한을 두고 있지 않거든요. 미국의 법정 근로시간은 주 40시간. 그 대신 초과근무에 대해서 통상임금의 1.5배를 지급해야 할 뿐이죠.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는 이 초과근무 수당에 대한 면제 제도입니다. 임원, 전문직 같은 고소득자들은 초과근무 수당 규제를 적용하지 않겠다는 거죠.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녈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노동기준법에 따라 법정 근무시간(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넘길 경우 초과 근무 수당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 기준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게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입니다. 고도 프로페셔녈 제도의 대상이 되더라도 노동자는 연간 104시간 이상의 휴일이 보장되어야 하고, 4주에 4일 이상의 휴식도 보장해야 합니다.
52시간 제도는 이미 넘칠 대로 넘치는 대한민국의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나온 정책입니다. 2022년 OECD 평균 연간 근무시간은 1,719시간, 반면 우리나라는 1,904시간으로 OECD 회원국들 중에 선두에 서 있죠. 대만은 우리보다 앞에 있고요. 가장 근무시간이 적은 독일은 연간 1,295시간만 근로시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노동계에서는 가뜩이나 높은 대한민국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정책이 필요한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다시 방향을 반대로 돌리는 건 구시대적인 접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노동시간에 앞서 보상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앞서 살펴본 TSMC와 엔비디아, 두 기업 모두 많은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것은 맞지만 그 시간 뒤에 가려진 '황금빛 보상'이 있기 때문이죠.
TSMC는 노동시간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2021년까지 신입사원 이직률이 꾸준히 상승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2017년 신입사원 이직률은 11.6%, 4년 뒤인 2021년엔 17.6%로 5%p 늘어났죠. 하지만 2023년엔 그 수치가 10% 밑으로 떨어졌어요. 무엇이 해결책이었을까요? 쾌적한 업무 환경 조성 등 회사의 여러 노력도 있겠지만, 가장 핵심은 급여 인상이었습니다. 2021년에 TSMC가 자사 직원 급여를 매년 20% 올려주었거든요. 급여가 인상된 이후부터 이직률은 자연스레 줄어들었습니다.
엔비디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엔비디아는 고강도 근무 환경을 자랑하지만 직원 이직률은 5.3%로 매우 낮습니다. 힘들지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황금 수갑'이 있기 때문이죠. 엔비디아엔 회사 주식을 무상으로 주는 스톡 그랜트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창업자 젠슨 황의 이름을 따서 '젠슨 특별 보조금'이라고도 불리는데요, 4년에 걸쳐서 주식이 분할 지급되다 보니 떠날 이유가 없는 거죠. 게다가 세계 1위 기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도 중요할 테고요. 전문가들은 국내 반도체 시장을 해결하기 위해선 노동시간 확대에 앞서 낙후된 보상 체계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