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만나요, 에든버러! 역시 대단했던 프린지!"
"See you next year, Edinburgh! – Another Great Fringe!"
"끝났어요! - 정말 대단한 축제였어요!"
"That's a wrap! – That's it, Seungmee. What a Festival!"
"2024 프린지 축제가 오늘 끝납니다."
"Fringe 2024 ends today Seungmee."
올해의 에든버러 축제가 끝난 8월 25일 이후부터 제 메일함에는 축제 사무국과 공연장들이 보내온 '축제 결산' 메일들이 속속 쌓이고 있습니다. 2024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EIF)가 벌써 그립다면, 축제 예술감독인 니콜라 베네데티(Nicola Benedetti)가 전해주는 이 축제의 역사와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메일이 축제가 끝난 다음 날 도착했습니다. 축제의 무대 뒤 모습을 담은 영상과 설문조사 문항이 포함된 이 메일은 올해 축제에선 12만 5,000명의 관객이 160여 개의 공연을 관람했다고 전했습니다.
▷ 관련 영상 보기 (출처 : 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Homepage)
축제 다음 날
프린지 홈페이지에 게시된 프린지 축제 위원장(Chief Executive) 쇼나 맥케시의 오픈레터에는 '에든버러 프린지' 성과에 대한 데이터가 간략하게 소개되었습니다. 260만 장의 티켓이 판매되었고, 1,800여 명의 산업 관계자들이 축제 사무국의 승인을 거쳐 방문했습니다. 또 900여 개의 공인된 미디어 종사자들이 공연을 관람했으며, 3,746개의 공연이 올해 프린지 무대에 올랐습니다.
2024 에든버러 '프린지' 주요 공연장 중 한 곳인 플레전스 극장(Pleasance Theatre)에서도 20개국의 279개 공연을 선보였으며 50만 장의 티켓 판매가 이루어졌음을 비롯해, 커뮤니티의 어떤 단체들과 협업을 했는지, 예술가들에게 어떤 지원을 했는지 간략하게 소개하는 메일을 축제 마지막 날 보내왔습니다.
에든버러는 축제의 도시입니다. 공연계 종사자들에게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이나 '프린지'가 주요 관심사지만, 8월의 에든버러에는, 국제영화제(Edinburgh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북 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Book Festival), 로열 밀리터리 타투(군악제, 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 에든버러 아트 페스티벌(비주얼 아트, Edinburgh Art Festival) 등의 축제들도 도시 전역에서 열립니다.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과 '프린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시작된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은 '동시대 세계 최고의 공연을 선보인다'라는 모토로 몇 년간의 준비를 거쳐 연극, 음악, 무용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예술 작품을 선별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에든버러의 주요 공연장인 어셔홀, 페스티벌 씨어터, 퀸즈 홀 등의 무대에 올립니다.
같은 해 시작한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린지는 '주변', '언저리'라는 '프린지(fringe)'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초청받지 못한 단체들이 그 주변의 소규모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면서 시작된 축제입니다. 참가자와 관람객들의 호응으로 1958년 페스티벌 프린지 협회(Festival Fringe Society)가 설립되면서 좀 더 체계적인 축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EIF와 달리 누구나 자비로 참가할 수 있다는 점이 프린지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저는 8월의 에든버러를 수놓는 수많은 축제 중에 주로 '프린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에든버러 페스티벌'이라고 부르는 축제는 일반적으로 '프린지'를 가리킬 때가 많은데 축제를 마무리하는 프린지 축제 위원장의 레터는 이 축제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프린지는 축제이자 마켓입니다. 관광객에게는 에든버러가 다양한 공연과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축제의 도시지만, 공연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초대형 아트 마켓이 됩니다. 그래서 1,800여 명의 업계 관계자들이 에든버러를 방문했고, 900여 개의 미디어 종사자가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썼다는 것이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저 역시 '1,800여 명의 업계 관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22년과 2023년 축제는 한국의 공연장 기획 담당자로 참가했고, 에든버러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공연들'을 한국에 초청했습니다. 2023년 EIF 초청작 중 가장 빠르게 매진된 제프 소벨의 <FOOD>를 지난 4월 강동아트센터에서의 아시아 초연을 시작으로 공주와 광주 투어를 진행했으며, 프린지 참가작이었던 <Concerned Others> 국내 초청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프리랜서가 되어 참가한 올해 역시 한국에 초청할 공연, 한국과 협업할 가능성이 있는 공연 및 관계자들을 찾는 게 주요 목표였습니다. 8월 10일 오전에 도착해 20일 오후까지, 열흘 동안 32개의 공연을 관람했고, 10여 개의 리셉션/라운드테이블/피칭 세션 등에 참여했습니다. 연극, 뮤지컬, 서커스 등과 같이 익숙한 장르의 작품은 물론 영유아를 위한 댄스 공연, 스탠드업 코미디 등 조금은 낯선 형식의 공연을 오전 10시에도, 밤 11시에도 관람했습니다. 축제와 관람객들을 좀 더 가깝게 만나고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리셉션에서 만났던 타국의 공연 관계자들을 공연장에서 몇 번씩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고, 마치 경쟁하듯 '이 공연이 오늘 보는 다섯 번째 공연이에요', '난 여섯 번째, 더 이상 못 보겠어요' 같은 인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올해 프린지 참가 작품이 3,746개나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같은 공연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었을까요? 공연 관계자들이 비슷한 경로로 공연에 관한 정보를 얻기 때문입니다.
숙박비 등 8월의 에든버러 물가는 평소보다 훨씬 높아집니다. (에든버러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8월에 도시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국제행사와 비슷한 규모라고 합니다.) 공연 관계자들은 투자한 시간과 돈에 대한 성과를 위해 관람할 공연을 까다롭게 선별합니다. 공연 관람 선택의 기준은 국내에서의 공연 관람 선택 기준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관계자 추천(입소문), 주요 매체 리뷰 등이 주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수천 개에 달하는 프린지 공연 속에서 자국 참가 공연들의 매력을 어필하기 위한 각국의 노력도 중요합니다. 프린지 공연이 열리는 주요 공연장에서 국가별 피칭 프로그램이나 관련 이벤트를 진행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축제에 참가한 '바이어'들이나 미디어 관계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에든버러 시내 어느 곳을 지나더라도 공연 리플렛을 건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거리 곳곳에서는 버스킹이 한창입니다. 어쩌면 이런 풍경이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은 '에든버러 프린지'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다만, 길거리에서 듣는 이 없고 보는 이 없는 공연을 하고 있는 예술가를 볼 때,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극장에서 열리는 공연도 다르지 않습니다. 프린지는 자율 참가입니다, 프린지에 참가를 원하는 예술가나 예술 단체는 참가비를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참가비는 공연 횟수에 따라 96파운드(한화 약 17만 원)부터 393.6파운드(한화 약 69만 원)까지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축제이니만큼, 축제 참가작의 수준은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프린지에서는 공연 관람객들의 호응이 예년에 비해 유난히 뜨거운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공연에선 기립박수가 흔하게 나왔습니다. 주류 반입이 가능한 관람 환경이다 보니 저녁 공연으로 갈수록 호응은 더욱 뜨거웠습니다. 트래버스 극장에서 스코틀랜드 여성 노숙자 축구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봤는데, 국가가 나오는 장면에서 모든 관객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때 관객의 구성이 명확히 보이더군요, 국가를 부르는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인, 나머지는 외지인 혹은 관광객이었던 거죠.
'관람객의 뜨거운 호응'에 대한 물음표가 생긴 순간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축제에 온 관객은 공연의 품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할 수 있지만, 어떤 공연을 초청할까 고민하는 공연 기획자 입장에서는 모든 조건들을 다 따져봐야 하기에 냉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객들이 공연의 어느 지점에서 열광하는지, 공연이 우리나라 관객들 정서에 맞을지, 초청 시 비용은 얼마나 들지 등을 검토한 후에도 '청신호'라면, 그 공연단체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에서는 에든버러 축제에 대해 일종의 '환상'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에든버러는 '참가만으로도 가치를 인정받는 축제'라고요. 하지만 '바이어'로서 축제에 참가하는 제 입장에서는, 에든버러 축제의 성격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에든버러 축제 참가'라는 경력 한 줄, 홍보문구 한 줄을 위해, 그다지 매력적인 공연이 아닌데도 굳이 높은 비용을 부담해 가며 축제에 오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프린지'는 누구나 신청하면 참가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에든버러 프린지 초청 공연'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가 있는데, 어폐가 있습니다. 수천 개의 프린지 공연들 사이에서 변별력을 갖기 위해 만들어지는 각국의 '시즌'이나 민간 공연장들의 자체 프로그램 등에 '선정'될 수는 있어도, '초청 공연'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프리미어리그나 메이저리그 진출이 축구 선수나 야구 선수의 로망이라면 축제의 도시 에든버러에서의 공연은 예술가의 로망일 수 있습니다. 에든버러 인터내셔널에 초청받지 못했으나 프린지에서 공연하는 로망을 이루기 위해선 꽤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상당한 투자인 만큼 에든버러 프린지에 참가하기 전 가성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에든버러 프린지에 참가하려 한다면, 축제에서 무엇을 얻을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비용은 좀 들더라도 참가에 의의를 두면서 다른 공연들을 벤치마킹하는 '공부'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 언어와 문화가 다른 해외 관객들을 상대로 국제 무대에서의 발전 가능성을 검증받아 더 큰 무대로 진출하는 기회로 삼을 것인지, 목적을 분명히 해야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방향이 보일 것입니다.
에든버러 프린지 참가의 목적이 후자라면, 내 공연을 보러 올 관객이 누구일지, 관객의 구성은 어떻게 될지 예측하고, 이에 따라 공연을 홍보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관람객의 절대다수가 유럽인들임을 감안했을 때, 한국어 대사가 많은 공연은 '자막'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참가자가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하는 프린지의 특성상 '자막 운영'을 위한 장비 및 인력에 대한 비용이 추가로 발생합니다. 도시 전체가 공연장으로 활용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모든 공연장이 전문 공연장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연을 위한 추가적인 장비나 인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언급한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한 설명과 준비부터 진행, 마무리까지 필요한 모든 절차, 심지어 예산 운영(지출/수입 관리)을 위한 엑셀 파일도 오픈 자료로 프린지 홈페이지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2025년 프린지 참가를 고민하신다면 프린지 축제 사무국이 성실히 준비해서 공유하는 모든 자료들을 적극 활용하시길 추천합니다.
제가 에든버러에서 본 32개의 공연 중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 공연은 단 3개였고, 나머지는 모두 프린지 공연들이었습니다. EIF 예술감독인 니콜라 베네데티가 클래식 연주자여서인지 올해 EIF 프로그램에는 유독 클래식 공연이 많았습니다. 조성진의 피아노 리사이틀도 있었고요. 저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리뷰를 참고하는 편인데, EIF 초청작보다 높은 별점을 받은 프린지 공연들도 많았습니다.
축제는 끝났지만 저를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은 앞으로 더 바빠집니다. 현지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눴던 프로듀서 및 프로모터들과 2025년 초청 계획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해야 하니까요. 현장에서의 '선점'은 당연한 성공 전략입니다. 한국에 초청할 공연들의 조건을 의논하며 가능성을 타진하고, 2025년에 진행할 한국-스코틀랜드 예술가의 협업에 대한 논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동료들은 대부분 축제 후 휴식을 갖는 듯했고 폭염 속 한국에 돌아와 몸살감기를 혹독하게 앓은 저도 체력을 정비하였으니, 9월은 저와 동료들에게는 '업무 축제' 시즌입니다.
3년 연속 에든버러를 방문했지만 대기 줄이 긴 해리포터 숍, 웅장한 에든버러성에는 가보지 못하고, 공연장에서 공연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초코바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연 관계자에게 8월의 에든버러는 새롭고 독특한 형식의 공연을 만나는 즐거움과 영감을 얻을 수 있어 정말 매력적인 곳입니다. 아! 내년 8월 에든버러에서는 최근 재결합을 발표한 영국 밴드 오아시스(Oasis)의 콘서트도 열린다고 하네요. 제 지인들 중에도 공연 티켓을 구매한 분들이 있는데, 그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숙박비가 더 오르겠구나...'였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