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을 놓지 못한 건 창작의 고통 때문이기도 했을 터이고 뭐든지 ‘그냥’, ‘대충’ 하지 못하는 날 선 ‘쟁이 기질’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理想)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걸 해나갔는데 그게 “돈 되는 거”만 찾는 ‘시장 논리’와는 잘 맞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했던가, 김민기는 끝까지 이상주의의 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이상과 세상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국산 친환경 먹거리 등을 취급하면서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의 창립 선언문 중 한 대목이다. ‘한살림’의 초대 사무국장이 바로 김민기다. [한살림 홈페이지에는 김민기 선생 추모 배너가 걸려있다] 선생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전북 김제와 경기도 전곡 등지에서 직접 농사를 지었다.
약관(弱冠)에 ‘아침이슬’을 짓고, 이립(而立)에 농사를 짓고, 불혹(不惑)에 학전(學田)을 지었다. 그리고 그 못자리[田苗垈]에서 제작자이자 연출가로서 김민기의 대표작 “지하철 1호선”이 탄생했다.
기자가 그를 처음 인터뷰했던 건 “지하철1호선”이 서울에서 6백50여 회를 공연한 뒤 일단 숨을 고르고 부산판을 준비하던 1997년이었고,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건 4,000회 공연을 목전에 둔 2008년 10월, 선생이 이순(耳順)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밴드왜건 올라타기 같아서 겸연쩍지만, 비범했던 그가 남겼던 두어 가지 평범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
#1
2007년 “지하철 1호선” 3,500회 공연은 어쩌면 기념비적인 4,000회 공연보다 특별했다.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등이 거쳐갔던 배역의 진짜 주인공인 노숙자, 실직자, 외국인 노동자 등 1호선을 타고 다니거나 1호선 근처에 사는 서민들을 그날의 관객으로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남한테 함부로 무시당하거나 홀대받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앞에 나와 배우들과 나란히 선 김민기는 객석에 있는 “지하철 1호선”의 진짜 주인공들을 향해 나지막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이 말은 너무나 평범해서 사실 아무 얘기도 아닌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선생이 말함으로써 다르게 다가왔다.
그런데 선생의 저 말씀과는 반대로, 세상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기자는 선생에게 10년 전[지하철 1호선의 시대 배경인 1998년]과 비교할 때 한국 사회가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선생은 ‘계급화된 것’을 맨 앞에 언급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건 옛말이 돼버렸다.
#2
4,000회 공연을 한 달여 앞둔 2008년 인터뷰 때는 “지하철 1호선”이 당신에게 어떤 자식이었냐고 물었다. 선생이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골칫덩이 자식 같다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하길래 그럼 4,000회까지 하시고 그만 하시면 되지 않냐고 되물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옛날에 노래들 때문에 (곤욕을 치를 때), ‘아, 왜 혼혈아같은 얘기는 자꾸 하느냐’, 그리고 ‘공순이 얘기 그딴 거 왜 자꾸 노래로 만드느냐’ 그러길래 ‘아, 저기 보이는 데 그럼 어떡하냐’고…”
선생은 ‘쟁이’들은 자기가 하기 싫다고 해서 안할 수 없다면서 “거리가 있고, 소재가 있고, 이유가 있으면 거기에 손을 안댈 수가 없다”고, 그게 팔자라고 말했다.
‘보.이.는.데. 어떡하느냐.’ 전에는 사람 사는 도리로 여겨졌던 규범 중 하나였다. 그래서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라는 말과 의식(意識)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더 이상 ‘보는 눈’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빤히 보이는 데도 말할 수 없고, 말하지 않는 게 요즘 현실이다. 저잣거리에서 구중궁궐까지, 사람 사이의 도덕이고 예절이고 규범이고 기강이고 간에 내 일이 아니면, 돈이 걸리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듣지도 않는 게 당연시됐다.
변명이지만, 눈꼴 시리고 얼토당토 않은 짓을 보더라도 사회가 워낙 강퍅해져서 무서워서도 피하고 더러워서도 피하게 된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거나 아예 듣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한다. 하지만 김민기는 일단 자신에게 ‘보이는’ 것은 작품으로 말.했.다. 진정한 ‘쟁이’였다.
#3
요 며칠 사이 쏟아진 선생에 대한 추모글에는 서울대 미대 후배인 김병종 화가의 것도 있다. 김 화백은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그의 노랫말에는 증오보다는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였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우리의 정감어린 말들이 있다”고 회고했다. 또 “그의 세계를 이룬 것이 사회적 상상력과 서사만이 전부가 아니”며 선생은 “자연과 자유의 들녘에 선 음유시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디 이 부분이 짚어질 수 있기를” 기원했다.
이 추모글을 읽으며 생각나는 선생의 말이 있었다. “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선생님께 삶과 예술은 어떤 관계입니까?”라고 물은 기자에게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해서 대학도 미술 대학을 들어갔습니다만, 그림 그릴 때를 기억해보면 그게 일종의 사물에 대한 인식론이었던 거 같아요.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부터 시작을 했고, 보다 보면 ‘그림’이라는 낱말을 제가 다르게 해석을 했는데 ‘그리움’에서 온 말이 아닌가, 그래서 사물의 본체, 사물의 실체에 대한 그리움을 자기가 확인하는 과정이 그림이 아닌가...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엉뚱한 생각이 아니라 비범한 생각아닌가!]
“그래서 그런 그림이 이렇게 무대로도 연장이 되거나 음악으로까지 연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하는 행위는, 사물 본체에 대한 탐구 작업이 아닌가... 그것을 알기 위한,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그것을 남들한테 보여준다고 하는 것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이 공유하고자하는 그런 과정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움’에서 온 말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상상력과 고유어에 대한 예민한 촉수로 선생은 가사를 썼다. 쉽고 평범한 말로 썼다. 멋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묵직하면서도 나긋한 저음에서 울리는 시적 탁월성이 있었다.
*
학전에서 김민기와 마지막 인터뷰를 마친 뒤였다. 선생은 목을 축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별 생각없던 기자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한발 늦게 극장을 나선 선생은 구멍 가게에서 맥주를 샀다. 학전 근처에 있던 그 구멍 가게는 아직 살아남아 있을까? 모르긴 해도 진작에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선생은 떠났고, 동네 슈퍼들도 거의 사라졌다.
선생은 타계 직전 학전을 스스로 ‘접었다’. 한겨레와 인터뷰(2015년)에서는 “지하철 1호선”도 ‘끊었다’고 말한 그였다. [4천회 공연 뒤 10년 간 중단했다] “돈만 벌다 보면 돈 안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였다는 거였다.
지난해 말 학전 폐관 계획이 알려지자 학전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었고, 정부와 민간 등 여기저기서 지원하겠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선생은 알았을 것이다. 김민기가 없는 학전은 더 이상 학전이 아님을. 누구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음을. 그것은 자만이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2022)이란 책에서 말했다. “정보자본주의는 비물질적인 것마저도 상품으로 만든다… 문화 자체가 완전히 상품이 된다. 장소의 역사성마저도 부가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알뜰하게 도살된다”.
학전은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운영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ARKO]는 이 공간에서 김민기가 “지하철 1호선”을 끝내고 어린이들의 짠한 일상이 보.여.서. 안할 수 없었던 어린이·청소년극 중심으로 공연을 한다고 한다. 부디 새 공간이 김민기를 ‘스토리텔링’하는 공간이 되지 않기를, 선생이 못다 이룬 꿈이 후대에 펼쳐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