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 그 뼈아픈 역사가 남긴 것들 [스프]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⑭] 타이베이 편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모종혁 중국본색 경찰이 아이 업은 과부의 좌판을 걷어차고 머리를 때리는 기록화 
1947년 2월 27일 대만 타이베이(臺北). 전매국 직원과 경찰이 트럭을 타고 와서 거리에서 담배 파는 노점상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당시 시골에서 올라온 한 과부가 생계를 위해 자녀를 업고 담배 노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단속반은 그녀의 좌판을 걷어차고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폭력적으로 단속했다. 이런 과잉 단속에 주변에 모여 있던 시민들이 몰려와서 항의했다.

하지만 단속반은 자리를 뜨며 시민들을 총으로 쐈다. 대만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자,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2.28 사건의 발단이다.
 
타이베이 전매분국을 포위한 뒤 건물과 집기를 불태우는 시민들 
다음날 중상을 입었던 학생이 사망했다. 소식은 타이베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군중은 경찰서와 전매분국으로 몰려가 발포한 경찰과 과잉 단속한 공무원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은 거부했다. 시민들은 경찰서로 난입해 들어가 경찰을 구타하고 무기고를 습격했다.

전매분국에 몰려간 군중은 불을 질렀다. 행동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파업과 철시로 동조했다. 타이베이가 순식간에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만은 국민당 정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2.28 평화공원 기념관은 시민들이 점거했던 타이베이라디오방송국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국의 국민당은 관료와 군대를 파견해서 대만을 반환받았다. 그 과정에서 국민당은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첫째, 정부 요직의 대부분을 대륙의 외성인(外省人)으로 임명했다. 일부만 대륙과 연고가 있는 대만 본성인(本省人)에게 내주었다. 외성인은 대만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베이징(北京)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푸젠(福建)성 동남부 사투리인 민난화(閩南話)를 구사하는 본성인과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민당원들은 대만인을 일본제국주의의 조력자로 간주했다.
 
자유광장(自由廣場)의 총검술. 대만군에는 2.28 사건의 그림자가 있다. 
둘째, 경제적으로 본성인을 차별했다. 국민당은 일본인이 남긴 공장과 상점을 관시(關係)가 있던 외성인에게만 불하했다.

그에 반해 본성인은 정부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전매정책으로 정상적인 상업 활동이 힘들었다. 전매제는 종전 이후 후유증, 공산당과의 내전 등으로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이 만연하면서 취한 정책이었다.

셋째, 국민당은 부패했고 군대는 기율이 없었다. 관료는 막대한 뇌물을 챙겼고 매점매석을 자행해서 시장을 교란했다. 군인은 본성인에게 사기, 구타, 강도, 강간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시민들이 장악했던 가오슝시청을 공략하는 국민당군을 묘사한 미니어처 
국민당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노골적인 차별과 수탈정책을 펼치자, 본성인은 극도로 실망하고 좌절했다.

이를 보여주듯, 당시에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개는 50년 동안 대만을 식민 통치했던 일본을 가리킨다. 돼지는 새로 대륙에서 온 외성인을 지칭한다.

이런 상황 아래에 2.28 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가 대만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곳곳에서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이 폭발해 서로 죽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지식인들이 나서 2.28 사건처리위원회를 결성했다.
 
3월 8일 지룽에서 벌어졌던 학살을 묘사한 기록화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했다. 행정장관 천이(陳儀)는 이를 받아들이는 척했다. 하지만 은밀히 대륙의 국민당에 진압 병력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3월 8일에 1만여 명의 병력이 북동부의 지룽(基隆), 남부의 가오슝(高雄)에 상륙했다. 진압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처리위원회의 지식인을 잡아들였다. 또한 경찰이 파악해 놓은 시위 참가자를 검거했다.

진압군은 지식인과 시민을 아무런 조사와 재판 없이 바닷가나 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이러한 만행은 3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2.28 기념관 앞에 조성된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담벼락 
이렇듯 무자비하게 양민 학살을 자행했기에, 오늘날까지도 2.28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최대 3만여 명으로 추정한다.

무엇보다 처리위원회에 참여했거나 연관됐던 지식인이 모두 학살당하거나 투옥되어서, 한동안 본성인 엘리트의 씨가 말랐다. 사실 2.28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매제는 일본 식민통치가 남긴 유산이었다.

1894년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이듬해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어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일본은 타이베이에 대만총독부를 설치해서 대만을 통치하였다.
 
오랫동안 술과 담배를 전매했던 업체인 TTL의 타오위안(桃園) 공장 
1898년 대만총독부는 제약소를 설립해서 아편을 전매하기 시작했다. 그 뒤 염무국을 설립해 소금을, 장뇌(樟腦)국을 설립해 장뇌를 전매했다. 1901년에는 세 기관을 합병해서 대만총독부 전매국을 설치했다.

그리고 1905년에 담배를, 1922년에는 술을 전매 품목으로 추가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물자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자, 1942년에는 성냥을, 1943년에는 석유를 전매품에 지정했다.

국민당은 대만을 반환받은 뒤 일제의 조직을 대만성 전매국으로 개편하고 담배, 술, 장뇌, 화약 등을 전매해 버렸다.
 
전매제 덕분에 대만 각지에는 TTL의 술 생산공장이 포진하고 있다. 
1947년에 기존 조직을 대만성 산하에 둔 담배술공매국(公賣局)으로 개편했다. 담배술공매국은 1950년부터는 재정부가 관할했다. 또한 1968년 장뇌의 전매사업이 중단될 때까지 조직과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됐다.

담배술공매국은 식민시대처럼 원료 구매와 제품 생산, 물류망 구축과 운송, 홍보와 판매 등을 모두 도맡아 했다. 그리고 대만 각지의 경영허가증을 준 판매상에게만 제품을 제공했다.

이렇듯 술과 담배를 농단해서 얻어지는 이익은 막대했다. 오랫동안 '대만에서 가장 영업이익률이 높은 기관'으로 군림했다.
 
일본이 운영했던 타오위안 공장은 세이슈 제조 과정을 재연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더 깊고 인사이트 넘치는 이야기는 스브스프리미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콘텐츠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하단 버튼 클릭! | 스브스프리미엄 바로가기 버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