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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눈물 믿었다가 뒤통수…저런 괴물, 누가 만들어낸 건가 [스프]

[커튼콜+] 중독을 마주하기 - 연극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People, Places & Things)> (글 : 황정원 작가)

황정원 커튼콜+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People, Places & Things)>은 중독에 대한 연극이다. 알코올과 약물로 일상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엠마는 재활센터에 입소한다. 새하얀 타일로 둘러싸인 그곳은 독한 소독약 냄새가 객석까지 풍길 듯 황량하고 차갑다.

치료는 몸 안에 쌓인 술과 약을 빼내는 디톡스로 시작된다. 의사는 앞으로 거칠 과정 중 제일 쉬운 단계라 설명했지만 벌써 증상이 심각하다. 엠마의 환각이 시작되면 사이키델릭한 음악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극장을 채운다. 조명이 정신없이 번쩍이는 가운데 여러 엠마들이 벽과 침대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와 구토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기어다닌다. 공포영화 <링>의 텔레비전에서 기어 나오는 사다코 같은 모습에 등골이 오싹하다. 이 혼란스럽고 기괴한 무대는 마치 엠마의 머릿속 같다.

디톡스가 끝나면 그룹 테라피에 참여해야 한다. 그룹 테라피는 재활센터의 환자들이 다 같이 둘러앉아 역할극을 통해 중독의 근본 원인을 찾는 시간이다. 그러나 엠마의 태도는 일관되게 냉소적이다. 거듭된 주변의 재촉에 마지못해 일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가만, 계속 듣다 보니 어딘지 익숙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떨며 진솔하게 고백한 사연은 사실 연극 <헤다 가블러>의 줄거리였다.
 
황정원 커튼콜+ 
엠마는 직업배우다. 그리고 영리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일에 능하다. 의료진과 동료 환자들은 물론 관객마저 극이 진행될수록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저 눈물이야말로 진짜겠지, 철석같이 믿었다가 또 뒤통수를 맞곤 한다.

연극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재활센터를 찾아가 중독자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그들이 겪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덕분일까, 중독자의 주변인, 특히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한 장면은 마치 오래된 딱지를 억지로 잡아뗀 자리에 손톱을 세워 꾹 누르는 듯 무자비하다. 주변인들의 이야기는 관객이 일방적으로 중독자들의 사연만 듣고 그들에게 감정이 기우는 것을 막아준다. 이런 장치들 덕에 관객은 엠마를 비롯해 무대 위 중독자들에게 연민을 느꼈다가도 내주었던 마음 한켠을 다시 황급히 챙긴다.
  
재발과 재활을 반복하던 엠마는 결국 성공적으로 치료를 마치고 그 길로 부모를 찾는다. 재활센터에서 연습한 대로 그간 자신의 잘못을 어렵사리 인정하지만,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엠마 부모의 반응에 객석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런 괴물 같은 부모 때문에 딸이 결국 중독자가 된 걸까.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단어 하나에 관객은 주먹으로 배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인다. 엠마의 중독이 그녀의 부모를 괴물로 만든 걸까?
 
황정원 커튼콜+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의 대본을 쓴 극작가 덩컨 맥밀런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는 훌륭한 여배우들이 정말 많습니다. 나는 그 배우들이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뛰어난 연기를 펼치도록 하는 배역을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 신념으로 이 희곡을 썼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배역, '엠마'를 움켜쥔 '훌륭한 여배우'가 바로 주연을 맡은 드니스 거프이다. 2015년, 초연 당시 이미 서른 중반이었던 그녀는 당시 배우로 먹고살기 너무 힘들어 커리어를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연극을 할 때면 연출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주어진 의상을 입고 주어진 대사대로 말하면 돼. 지루한 부분은 다 건너뛰고 인생의 가장 강렬한 순간만을 반복해서 살고 박수갈채를 받지. 하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알바를 뛰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차를 살 수도 없고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도 없어.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정말 운이 좋으면 비록 지어낸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진실되고 의미 있는 말을 무대에서 할 수 있게 돼. 내 진짜 삶보다 훨씬 진짜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어."

오디션 당시 과제로 주어진 엠마의 독백이 너무도 자기 이야기라 드니스는 오디션 내내 울면서 연기했다고 한다. 이후의 전개는 그야말로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드니스는 그야말로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격렬하고 섬세한 엠마를 만들어 냈고, 그해 올리비에 시상식에서 '최고의 여배우' 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그녀의 커리어는 급등한다. 이제 그녀는 TV,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종횡무진하며 배우들의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이 재공연될 때면 어김없이 돌아와 다시 엠마가 된다. 톰 행크스, 밥 딜런, 크리스천 루부탱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그녀의 신들린 엠마 연기를 보기 위해 앞다투어 극장을 찾았다.
 
황정원 커튼콜+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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