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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박정희 장기집권의 시발 '5.16 군사정변'…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쿠데타

꼬꼬무

5.16 군사정변의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나.

1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D데이 H아워'라는 부제로 63년 전의 그날 이야기를 조명했다.

D데이 H아워. D데이는 작전개시일, H아워는 공격개시라는 의미로 이는 작전 개시 시간이 임박했다는 의미였다. 1분 1초가 급박했던 어떤 디데이의 이야기.

1961년 5월 16일 새벽, 방송국 숙직실에서 잠들어있던 박종세 아나운서. 그런데 이때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은밀하게 "거기 박종세 아나운서 있습니까?"라며 그를 찾는 목소리.

이에 박종세 아나운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를 찾아온 것은 무장한 공수부대원들. 이들은 박종세 아나운서를 데리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만난 이는 바로 당시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는 박 아나운서에게 혁명 공약을 방송하라고 일렀다. 이는 바로 5.16 군사 정변을 알리는 시작이었던 것.

그리고 잠시 후 김종필이 혁명 공약문을 가지고 방송국에 도착했다. 의도치 않게 반란군과 한 배를 타게 된 박종세 아나운서.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방송을 송출할 엔지니어들이 앞서 방송국에 울린 총소리에 달아났던 것. 이에 박종세 아나운서가 방송을 할 수 없다고 하자 그에게 총이 겨눠졌다.

그리고 이야기는 하루 전날로 흘러갔다. 하루 전날 모여 거사를 모의하는 군인들. 이들에게는 D데이 H아워는 5월 16일 새벽 3시였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생각한 박정희는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세를 모아 쿠데타 핵심 부대를 꾸렸다. 그리고 반란군에는 육군 소속이 아닌 해병대도 함께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사실 해병대 김동하 소장은 단독 쿠데타를 준비하던 중 박정희가 같은 뜻을 품은 것을 알고 힘을 합친 것이었다.

비둘기 작전을 역이용하기로 한 반란군. 이에 육군 참모 총장은 야간 훈련 중지를 명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혁명에 대한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해병대 병력 1500여 명과 함께 서울로 진격했다.

장 총장은 쿠데타군의 서울 진격 소식을 접하고, 헌병을 출동시켜 한강 다리 봉쇄하도록 지시했다. 한강에서 쿠데타군과 진압군이 만났고 이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하지만 2,500여 명의 쿠데타군과 50명의 헌병대는 싸움이 되지 않았고, 헌병대는 결국 대응 사격을 하다가 포기하고 퇴각했다. 5월 16일 새벽 4시 15분 한강인도교가 뚫린 것.

그런데 이때 장 총장이 헌병대에게 출동 명령을 할 때 석연찮은 부분이 포착됐다. 무장이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카빈반 가지고 출동하라고 했던 장 총장. 또한 다리에 트럭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길을 터 놓으라고 명령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훗날 장 총장은 자신은 헌병대에 전투가 아닌 교통 통제를 지시했다는 황당한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박정희는 공수부대를 이끌고 남산 KBS로 향했고 새벽 5시 방송은 국민에게 알리는 포고이자 작전 신호인 혁명 방송을 준비했다. 그런데 엔지니어의 부재로 방송을 못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방송 5분 전 엔지니어들이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방송 펑크를 막기 위해 방송국에 돌아왔다가 자신들을 찾는 군인들을 만난 것.

그리고 5월 16일 새벽 5시 전국에 혁명 방송이 울려 퍼졌다. 너무나 순조로운 쿠데타.

그런데 이때 또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드러났다. 혁명 공약의 발표자가 바로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당시 자신의 신분으로는 혁명군을 대표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장 총장을 1선으로 모신 것이었다.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라고 보고 있었던 미군은 그를 예편시키라고 했고, 이에 박정희는 5월 말이면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앞서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던 장도영을 떠올렸고, 그의 명의를 이용해 혁명 공약을 발표한 것. 또한 장 총장에게 혁명군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후 내각제로 변경된 우리나라는 당시 장면 총리가 최고 실권자였다. 그리고 그는 쿠데타군에게 제거 대상이었다. 이에 쿠데타군은 장면 총리를 체포하기 위해 그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고 없었고 그 누구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사실 장면 총리는 앞서 쿠데타에 대한 첩보를 들었다. 그러나 장 총장이 그럴 일이 없다며 그를 안심시켰던 것. 믿을 사람도 지켜주는 사람도 없었던 장면 총리는 아내와 함께 혜화동 칼멜 수녀원에 은신했다.

그리고 그는 "아군들끼리 서로 피를 흘려선 안 된다"라는 명분으로 쿠데타군 진압 명령을 내리는 것도 주저했다.

반란군은 이후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갔고, 누구의 승인도 없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사실 당시 한국군들은 쿠데타 진압 준비를 하고 출동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황. 그러나 장면 총리뿐만 아니라 윤보선 대통령도 출동 명령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진압 병력을 저지했다. 한국군 간에 유혈 사태는 안 된다는 명분 때문이었던 것.

쿠데타 발발 3일째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반란군의 가장 위에 섰다. 진압군의 지휘관이 아닌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박정희는 전략상 장도영을 앞에 내세웠는데, 이에 장도영은 훗날 "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의 수장으로 서게 된 것"이라며 이해할 수 없는 명분을 내세웠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쿠데타가 4.19 혁명의 연장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장면 총리의 거처를 알게 된 장도영은 그를 압박했고, 장면 총리는 잠적 55시간 만에 나타나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 그렇게 제2 공화국 장면 내각은 11개월 만에 군사 쿠데타로 무너진 것.

이후 일사천리로 성공의 길에 들어선 쿠데타군. 그리고 몇 달 후 쿠데타군의 선봉에 섰던 장도영이 연행되었다. 나라가 안정되면 정권을 넘기고 군인의 자리로 복귀하겠다고 했던 반란군, 하지만 박정희는 정권을 넘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정권 이양을 주장하는 장도영과 부딪혔다.

이에 장도영 총장은 반혁명 사건 혐의로 체포되었고, 원대 복귀를 주장하던 해병대 김동하 소장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렇게 군정은 연장됐고 정권 이양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박정희는 중장 진급 3개월 만에 대장 진급 뒤 스스로 군복을 벗고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5만 6천 표 차이로 윤보선 전 대통령을 꺾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으로서 16년, 군부 시절 포함 18년간의 장기 집권을 했고 그 시간 동안 한국사에 많은 상흔을 남겼다.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쿠데타, 5.16 군사정변.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그리고 후세에 조금은 나은 역사와 나라를 남겨주기 위해 우리는 63년 전의 오늘, 그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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