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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선유도공원 만든 1세대 조경가의 꿈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07

“할머닙니다.”(웃음) 

영화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장. 첫인사로 꺼낸 담박한 자기 소개가 그의 성품을 말해준다. 83세 정영선은 할머니가 맞지만 보통 할머니는 아니다. 일단, 여전히 일선에서 뛰는 현역이다.

30여 년 전에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광고 카피가 히트를 쳤는데, 그때도 정영선은 프로였고, 카피라이터가 회사를 그만둔 지 한참 지난 지금도 프로다. 지금도 호미를 들고 국토를 돌아다니며 나무와 꽃, 풀을 직접 심고 돌보는 정영선은 한국의 1세대 조경가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호 졸업생으로 1980년에는 여성 최초로 국토개발기술사(조경) 자격을 취득했다. 지난해에는 세계조경가협회가 4년마다 주는 최고 영예상인 ‘제프리 젤리코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OO최초’와 수상 경력으로 누군가를 소개하는 것만큼 직관적이지만 지루한 것은 없다. 이렇게 말해본다. 정영선은 선유도 공원을 조경한 사람이다. 경춘선 숲길을 조경한 사람이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을 조경한 사람이다.  크리스찬 디올 성수에 작은 정원을 만들면서 자생종인 백두산 금매화를 집어넣는 사람이다. 

선유도 공원 / 영화사 진진
‘땅에 쓰는 시詩’. 대중의 흥미를 돋우기엔 영 시원찮아 보이는 제목이긴 한데, 이 제목만큼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잘 설명하는 제목도 없다. 조경(造景)은 결국 땅에 쓰는 시(詩)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조경가 정영선의 일상적 삶과 사회적 삶, 그리고 그의 분신(分身)이자 영혼인 한국의 대표적 조경 공간들을 교차시키며 나아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앞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그냥 산자락의 일부로 보이는)에서 호미를 들고 바지런히 밭일을 하는 할머니 정영선을 세상에 널리 알린 대표작은 선유도 공원이다. 

사진찍기 좋은 핫플 중 하나가 된 선유도 공원(2002)은 원래 폐정수장이었는데 건축가와 정영선은 이곳을 때려 부수고 재건축하는 대신 폐기된 시설의 일부를 재활용해 생태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수조 안의 콘크리트 기둥은 덩굴식물로 뒤덮인 나무 기둥으로 변신했다. 

여의도 샛강생태공원(1997)은 주차장과 운동장이 될 운명이었는데 당시 한강관리사업소 자문위원이었던 정영선의 설득으로 수달과 황조롱이가 찾는 한강 속 숨은 생태 명소가 되었다. 관리사무소와 주차장도 없이 풀만 심어 놓고 강물만 지나가게 하는 게 무슨 공원이냐는 공무원들의 삿대질에 곤욕을 치르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일제 시대 때 서울과 춘천을 이었던 철길을 복원한 경춘선 숲길(2016)에는 주민들의 텃밭과 산책길을 조성해 지역 명소가 됐고 근처의 재래시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조경이 지역(문화)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 작업이다. 

“프로젝트를 맡으면 제일 먼저 그 땅을 여러 번 가봐. 거기서 어떤 테마를 끌어내는냐 하는 거는 주변의 환경이라든가 그것을 쓰는 사람이라든가, 그 두 개에 제일 집중을 하고. 그 다음에 내 생각을 넣는 거지. 가능한 한 우리 환경에 잘 적응하고,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 다음에 그걸 또 내 아파트 단지나 내 주택이나 내 공원이나 내 식물원 안에 잘 연결시키는. 일종의 나는 연결사라고 보면 돼. 연결사.”

이 연결사는 나이를 잊은 듯 하다. 미(美)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 유수의 잘 나가는 기업들이 여전히 팔순의 그를 찾는다는 건 그가 나이에 상관없이 일급이라는 증거다. 아모레퍼시픽 용산 본사 신사옥과 북촌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 호암미술관 희원, 크리스찬 디올 성수 콘셉트 스토어 등의 조경도 정영선이 맡았다. 

   다 좋은데, 영화는 영화다. 움직그림이다. 관객들은 사진을 보러 영화관에 가는 것은 아니다. 정다운 감독은 정물(靜物)에 가까운 조경을 스크린에 담느라 고민이 깊었다. 그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는 “화면이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보다 못해 좌절감을 느끼고는 했다”고 털어놓았다.

영화 시작부터 선유도 공원에서 좌로 뛰고 우로 뛰고, 종으로 달리다 횡으로 달리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장면들을 보면 감독의 고민이 읽힌다. 하지만 정 감독은 건축 다큐멘터리를 전문적으로 찍어 온 터, 그가 숙고를 거쳐서 가없는 조경을 어떻게 프레이밍하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5년의 제작기간에 걸쳐 담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와 그에 따른 조경의 변신도 지루함을 덜어준다.  

감독이 보물찾기하듯 슬쩍 슬쩍 숨겨 놓은(거꾸로 말하면 슬쩍 슬쩍 드러낸) 장면들도 흥미롭다. ‘정영선 프로’의 일하는 법과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집 앞 정원을 가꿀 때는 영락없는 촌로(村老)지만, 일할 때 정 프로는 “안된다는 소리하지 마라, 내 앞에서”라고 작업자를 단호하게 밀어붙이고,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던 조경업자가 농반진반으로 이제 무릎이 아파서 삽질을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하자 “삽질 내가 해줄게, 지랄하고 앉았다”라고 받아친다. 역시 할머니답다.  

세련되게 차려 입고 회의하러 나갈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손톱에 낀 까만 흙때는 어쩔 수 없다. 그게 바로 말단의 인부부터 고 이건희 삼성 회장(호암미술관 ‘희원’ 의뢰인)까지 조경에 관한 한 정영선의 말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게 하는 점일 것이다. 

서울 아산병원 앞 조경 / 영화사 진진
2007년, 정영선은 현대그룹으로부터 서울 아산병원 신관 조경 자문을 의뢰받았다. 병원 조경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 프.롬.프.트.에 대해 오랜 세월 쌓아온 지식과 경험의 총체로서의 인격체 정영선은 이런 답을 내놓았다.

“환자는 아프니까 울고 싶을 때도 있는데 침대에 앉아 울겠느냐고. 억장이 무너지는 가족은 환자 앞에서 울겠느냐고. 어디 좀 숨어서 한바탕 울고 들어간다든지 표정 관리하고 들어간다든지. 머리에 쥐가 나도록 시달린 의사나 간호사들도 얼마나 머리가 아프겠느냐고. 걸을 수 있고 쉴 수 있고, 충분히 많은 나무가 있어서 그늘이 있고 그래야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줄 수 있는 식물이어야 한다. 이른 봄에 싹이 터서 ‘아, 이제 봄이구나 나도 나아야지’, 늦게까지 예쁘게 단풍이 들어 있어가 ‘아, 여전히 생명이 있구나’, 이렇게 느끼게 하고 싶다.” 

그렇게 아산병원 신관 앞에는 나무들로 밀도 높아 병원 건물이 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숲이 탄생했다. 환자나 보호자는 눈에 덜 띄면서 울 수 있고, 의료진은 잠시 쉴 수 있고, 병마에 싸우는 환자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생명력 강한 식물로 구성한 정원. 

정영선은 조경할 곳의 지형, 식물의 습성과 식생, 색깔, 환경, 역사성, 전통, 이용하는 사람, 공간의 미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시심(詩心)으로 조경을 설계한다. 그리고 인위적인 냄새를 피우지 않고 마치 나무와 꽃과 풀이 원래 그곳에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꽃이나 심고 나무나 심는 게 조경이 아니냐는 세간의 시선을 넘어 국토를 보는 눈을 다시 갖게 만드는 것이 조경가로서 자신의 마지막 꿈이라고 말한다. 

"모르겠어요. 아마 교수님같은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봐요." 50년 경력의 조경업자는 말한다. 이 베테랑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A.I.의 미래만큼이나 이 문제를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 영화에서 정영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봄이다. 할머니 정영선이 써 놓은 시들을 읽으러 선유도 공원, 샛강 생태공원 등지에 가보자. 영화도 개봉했고 마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도 열리고 있다. 필자도 올 한 해 동안 할머니의 정원들을 하나씩 하나씩 도장깨기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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