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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북적북적]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415: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가치와는 무관한 앎을 기뻐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트위터 하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이런 책을 내도 적어도 그분들은 사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또한 가지고 있다.) 

이번주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는 책은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입니다. 미국 퍼듀대에서 생화학과 약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치욱 교수가 썼습니다. 지난 연말에 출간돼서 1주일 만에 2쇄를 찍는 인기를 누린 책입니다. 

저는 저자에 대한 사전정보나 소개를 받은 바 없이 ‘우연히’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놓지 못해서, 주중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며 새벽 깊숙이까지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박치욱 교수는 ‘본업’으로도 일가를 이뤘거니와,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지식 인플루언서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명한 분입니다. 이 책에도 실려있는 ‘mRNA 백신에 대한 트위터 설명 타래’는 아마 제가 2021년에 한국에 있었다면 분명히 접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지리적으로는 한국보다 저자에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한국 온라인’에 접속을 잘 못할 때라 놓친 듯 합니다.) 박치욱 교수의 팬이라면 이미 이 책을 만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박치욱 교수에 대한 ‘사전 호감’ 없이 바로 읽는 분이라도 한 권 뿌듯하게 신선한 자극과 재미를 선물받을 수 있는 책이다 싶어 자신있게 들고 왔습니다. 
 
본격적으로 김치에 도전해 보겠다고 결심한 건 코로나19로 한창 재택근무를 할 때였다. 우선 인터넷과 지인을 통해 김치 레시피 여러 개를 모아 살펴봤다. 양념은 비슷비슷했다. 고춧가루와 젓갈, 마늘, 생강, 무채를 기본으로 양파, 파, 사과 등을 추가하고, 밀가루나 쌀로 쑨 풀, 설탕 등 탄수화물을 발효를 위해 넣는 식이다.  

그런데 재료의 양이 대부분 배추의 포기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정량화와 재현성이 무척이나 중요한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배추는 포기에 따라 무게가 2배 가까이 차이 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배추의 평균 크기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배추를 절이는 방법은 더했다. 배추 포기를 쪼개서 잎 사이에 소금을 골고루 뿌려주고… 물을 부어서 짜다 싶게… 뭐 이런 식이다. 아니 골고루 얼마나? 짜면 또 얼마나? 정량화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래서 내가 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김치 레시피 정량화 작업. 트위터에 일단 선언했다. “제가 김치 레시피를 한번 정량화해 보겠습니다”라고. 몇몇 분이 성공하면 꼭 알려달라고 응원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미약하게 시작한 김치 레시피 정량화 작업은 1년여가 걸렸다. 그동안 열 번 정도 김치를 담갔다.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를 가장 잘 요약하는 것은 제가 서두에 읽은 두 줄의 문장, 저자 박치욱이 에필로그에 쓴 두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 또는 ‘효용’과는 (즉각적으로는) 무관한 순수한 지식의 즐거움에 신이 나는 ‘이상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고, 그들 중 뒷손에 꼽히라면 서러운 사람이 써 내려간 아주 재미있는 책이라는 것.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과 현상 속에서 배움을 넓혀갈 기회를 반짝이는 눈과 호기심으로 무궁무진 포착해 나가거나, 그런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는 사람이라면 모두 즐겁게 읽을 책입니다.  
 
윗줄 왼쪽부터 아랫줄 오른쪽까지, 각각 6, 8, 10, 12, 14, 16분 동안 삶은 계란이다. 

6분은 수란 대신 써도 되는 정도로, 깔 때 조금 힘들다. 속이 안 익어 말랑말랑한 고무공 같은 느낌이다. 8분은 노른자가 젤리 같은 상태이고, 10분은 노른자가 입안에서 크림 같이 느껴진다. 12분은 노른자 겉은 밝은 노란색이지만 한가운데는 아직 오렌지색이다. 14분이 되니 노른자가 완전히 익어 속까지 밝은 노란색이 된다. 16분까지 삶아도 너무 익은 느낌은 없다. 14, 16분에서는 씹는 순간 노른자가 가루가 되어 고소한 맛을 낸다. (계란 껍데기 잘 까지게 삶는 방법 관련 실험 중 사진 설명 – 기자 주)

이 책은 박치욱 교수의 사방팔방 지식 탐험기를 모두 7개 섹션으로 정리했습니다. 음식, 언어, 자연, 예술, 사회, 퍼즐, 그리고 인체. 개별적인 소재들을 보면, 각 분야의 전공자들이나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때 ‘이건 개론 정도의 이야기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와 듬뿍 공유하고 있는 건 지식 그 자체라기보다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며 익히기를 멈추지 않는 ‘두뇌의 댄스’와 학자다운 치열한 탐구 정신을 삶 전체에 방사하는 자세입니다. 박치욱 교수의 책 속 표현대로 "이건 왜 그러지?" 공부하며 뻗어 나가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하게 통섭적인 통찰들이 곳곳에서 번득입니다. 언뜻 중구난방으로 튀는 것 같았던 그 통찰들이 ‘학자 수준’으로 치열하고도 치밀하게 벼려지는 과정을 함께 걸을 수 있는 독자로서의 쾌감이 상당합니다.  
 
처음에는 이 동네에서 김치를 잘 담그기로 소문난 분의 레시피를 따라 하면서, 재료 하나하나 무게와 부피를 재서 기록했다. 김치를 담근 다음에는 아내와 맛보고,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바꿀지 의논하며 이 내용 역시 다 기록했다. 다섯 번쯤 담그고 나니 이웃들에게 맛있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원본 레시피의 주인도 맛을 보고 자기 김치와는 분명 다른데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그렇게 레시피를 완성하고는 그대로 반복해서 담가 맛이 일정하게 나는지 확인했다. 일정했다. 김치 레시피 정량화 작업 완성! 

이 책에서 박치욱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X-Ray를 발견한 뢴트겐이나 페니실린을 발명한 플레밍도 자신의 분야에서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죠. 그야말로 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순간의 호기심을 삶 곳곳에서 잃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굳이 일상의 호기심에서 시작해 그렇게 인류사에 남을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까지 이른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서 두 번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각적인 가치 또는 효용과는 무관한 앎 그 자체를 서슴없이 즐기는 사람들이 쓰고 읽는 책이니까요! 
 
이렇게 재료의 양을 정량화해도 철이나 산지에 따라 배추나 무의 맛이 달라지면서 발생하는 김치 맛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김치 담그는 데 핵심 변수 중 하나인 배추 절이는 시간은 결국 정량화하지 못했다. 

배추를 절인다는 것은, 소금물을 이용해 배추에 짠맛은 넣어주고 수분은 빼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배추를 소금물에 충분히 오래 넣어두어 최적의 염도에 해당하는 평형상태에 도달하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평형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배추를 절였더니 뭐 염도는 원하는 대로 적당한 상태가 되었지만, 배추 맛이 완전히 맹맹해져 버렸다. 평형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더니 배추의 고유한 고소한 맛과 단맛이 다 빠져나간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최적으로 배추를 절이기 위해서는 평형상태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반응을 중단하는 반응속도론적 조절kinetic control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추를 절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확산 반응을 고려해 보자. 소금물에서 소금이 배추 내부로 이동한다. 동시에 배추 내부에서 물이 빠져나온다. 그런데 물만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배추의 고소한 맛과 단맛 같은 좋은 맛도 같이 빠져나온다. 여기서 물이 빠져나오는 속도와 좋은 맛이 빠져나오는 속도가 같다면 반응속도론적 조절이 불가능하다. 물을 빼는 만큼 좋은 맛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 빠지는 속도가 좋은 맛이 빠지는 속도보다 빠르다면? 그럴 때는 좋은 맛은 최대한 보존하면서 물은 충분히 빼기 위한 적절한 시간대를 찾을 수 있다. 이게 바로 반응속도론적 조절이다. 

비단 학자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이든,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거나 어느 정도의 역량으로 일정한 위치에 올라갈 때까지는 시야가 조금은 좁아질 정도로 자기 분야에만 몰두하는 시기를 거치면서 그 분야 바깥까지 ‘큰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르면, 결국 다시 통섭적인 사고로 나아가는 경로에 들어서는 것이야말로 그 경지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요리하기에 대해 “뭐든 처음 시도할 때는 레시피를 가능한 한 충실히 따른다. 레시피를 개선하는 건 기존 레시피의 내용을 충분히 익혀 자신이 생겼을 때 할 일이다.”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국 비슷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 박치욱 교수 본인이 (본인 표현대로) “한식의 정점” 김치에 대해서 남들의 기존 레시피를 철저히 숙지한 후 정량화하고 결국은 자신만의 “맛이 기가 막힌” 깍두기와 무말랭이까지 찾아내는 과정 같은 것들이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그 같은 경지로 나아가는 삶의 희열을 맛깔나게 보여줍니다. 
 
반응속도론적 조절을 고려하여 배추를 절이는 최적의 시간을 정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다양한 변수를 모두 통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배추의 무게에 따라 물과 소금의 양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배 시기 및 배추 크기, 배추를 자르는 방식에 따라 절여지는 속도가 제법 많이 달라진다. 결국 직접 맛을 보고 결정해야 했다. 맛있게 절인 배추의 맛(적당한 탄성이 있고 적당히 짜며, 씹을 때 배추의 고소하고 단맛과 소금의 ‘맛’이 배어 나오는)을 기억해 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절여졌다 싶으면 15~20분 간격으로 계속 맛을 보고, 됐다 싶으면 바로 물에 헹궈 절이기를 끝낸다. 이 지점에서 김치를 많이 담가본 사람들의 설명할 수 없는 노하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정량화된 김치 레시피이다. (이 레시피는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를 직접 펼쳐 확인해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 기자 주) 

이 책은 ‘쓸데없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연대감을 심어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책 제목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해요.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게 좋다'. 네, 딱 ‘쓸데없는 앎’에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끼리 은밀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멋진 암호 같은 제목입니다. 

모든 챕터가 재미있습니다. 오늘의 낭독에서는 그 중에서도 ‘음식’ 편을 골라봤습니다. 껍데기가 단번에 벗겨질 정도로 달걀 삶는 법과 언제나 일정한 맛을 내는 김치 담그는 법. 이미 궁금하시죠? 낭독 들으시고 ‘여기서 끊다니, 아침드라마 같은 심보인데?’ 같은 기분이 드는 분들은 이 책의 나머지 부분까지 직접 만나보시면, 뿌듯하게 즐거운 독서의 시간을 분명히 누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최상의 상태로 식빵을 굽고 최상의 상태로 계란을 익혀 너무도 수수하지만 매일 먹어도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만든다. 이렇게 가치 있는 배움이 있을까? 배워서 먹을 게, 그것도 맛있는 먹을 게 나왔으니 말이다. 

*해당 도서는 저작권자와 출판사 '웨일북'의 동의를 구한 후 낭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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