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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톡스 맞고 셀카 필터 쓰는 '도리언 그레이'…내가 본 건 무엇이었나 [스프]

[커튼콜+] 최고가 티켓 50만 원의 웨스트엔드 연극, 뭐가 달랐나

김수현 커튼콜+
"나는 항상 젊은 채로 있고 이 그림이 나 대신 늙어가면 좋을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바칠 수 있는데.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줄 수 있는데."

아름다운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는 이 청년, 도리언 그레이의 소망은 이뤄집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얻는 대신, 아름답던 초상화는 그의 영혼이 쾌락을 좇으며 타락하는 만큼 추악하게 늙어갑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1890년 작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죠.

김수현 커튼콜+
휴가 내고 찾아간 런던, 요즘 극장가 웨스트엔드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연극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을 봤습니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른 장르로 만들어져 왔는데요, 현재 런던 로열 헤이마켓 극장에서 공연 중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하 '도리언 그레이'로 표기)'은 호주의 시드니 시어터 컴퍼니에서 제작해 2020년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2016년 30살 때 이 컴퍼니 역사상 최연소 예술감독이 된 연출가 킵 윌리엄스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습니다.

출처 : 킵 윌리엄스 홈페이지

런던 연극 화제작, 최고가 티켓 50만 원

'도리언 그레이'는 배우 한 명이 혼자 26개의 캐릭터를 맡아서 하는 1인극입니다. 런던 공연에는 드라마 'Succession'으로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주연상을 받은 호주 출신의 유명 배우 사라 스누크가 출연 중입니다. 이른바 '스타 캐스팅'의 화제작이라 그런 건지 최고가 티켓은 무려 289파운드(우리 돈으로 50만 원 가까이 됩니다)에 이르러 현지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죠. 그래도 일간 가디언 등 주요 매체들의 별 다섯 개 리뷰에다 본 사람들의 입소문까지 나서 빈 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김수현 커튼콜+
'도리언 그레이'는 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빈 무대에 대형 스크린 하나가 내려져 있고, 곧 배우가 걸어 나옵니다. 그런데 배우는 객석을 바라보고 연기하지 않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카메라 스태프들이 조작하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연기하죠. 관객이 주로 보는 건 스크린에 비치는 배우의 모습입니다. 즉 관객은 배우의 라이브 퍼포먼스 '중계'를 보게 되는 셈이죠. 이후 스크린은 많을 때는 7개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무대를 점령합니다.

1인극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영상이 배우 역할

배우는 순간순간 어투를 바꾸고 약간의 소품/분장 체인지만으로 내레이터에서 도리언 그레이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 바질로,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의 타락에 일조하는 헨리 경으로,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을 옮겨 다닙니다. 처음에는 내레이션을 하던 배우가 붓을 들고 카메라 앵글을 바꾸면 화가 바질을 연기하는 식으로 가다가, 점점 더 미리 녹화해 놓은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출처 : 런던 공연 공식 트레일러 영상
이를테면 배우가 수염이 덥수룩한 바질, 쫙 빼 입은 헨리 경으로 분장해 미리 찍어놓은 영상을 스크린에 띄우고, 무대 위 배우가 도리언 그레이를 연기하며 헨리 경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어찌 보면 영상이 또 다른 배우가 되는 셈입니다. 사실 무대 위 배우가 지금 하고 있는 연기조차 대부분 영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관객은 영상들끼리 주고받는 연기를 보게 됩니다.

몇몇 대목에서는 미리 녹화해 놓은 영상 속 배우와, 실제 라이브로 연기하는 배우가 똑같은 내레이션 대사를 동시에 해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서로 이건 내 대사라고 잠시 실랑이하다가 미리 녹화해 놓은 영상 속 배우가 '양보'해서, 무대 위 배우가 대사를 계속 이어가게 되죠. 이렇게 미리 찍어놓은 영상에 '리액트'하는 연기를 보고 있자니, 어색해 보이거나 흐름이 끊기지 않으려면 엄청난 사전 준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리 녹화된 수많은 영상 스크린과 라이브 중계 화면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운용하는 일 자체도 만만해 보이지 않았고요.

보톡스 주사, 셀프카메라 필터…현대의 도리언 그레이

'도리언 그레이'는 19세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젊음과 외모를 절대적으로 중시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남들 앞에 전시하려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유효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연극은 어둡지만 장난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신랄한 유머로 이야기의 효과를 더욱 강화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타락에 일조하는 헨리 경은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 얼굴에 주름을 펴주는 보톡스 주사를 맞습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의 살해 장면에서 잠시 손거울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객석의 웃음을 가라앉히며 '저는 지금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하는 중이라고요!' 하고 외칩니다.

이 연극은 많은 장면에서 땀구멍과 코털까지 보일 정도로 배우의 얼굴을 극도로 클로즈업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잡은 얼굴을 여러 개의 스크린에 띄웁니다.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사라 스누크의 얼굴이 여러 각도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바로 눈앞에 다가옵니다. 나르시시즘의 위험, 혹은 불안정한 자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출처 : 런던 공연 공식 트레일러 영상
요즘 많은 이들이 애용하는 '셀프카메라 필터'를 활용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필터를 거쳐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은 우스꽝스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되었다가 흉측한 괴물처럼 변하기도 합니다. 영혼을 팔아넘기고 타락한 도리언 그레이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암시합니다.

이 연극은 스크린이 중심이라 무대 장치가 거의 없지만, 무대 구석구석을 활용해 여러 장면을 재치 있게 연출해 냅니다. 도리언 그레이가 한때 빠졌던 배우 시빌 베인의 연극 장면은 간단한 소품을 활용해 인형극처럼 보여주고, 원작의 아편굴을 대신한 나이트클럽 장면은 배우가 무대 지하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고 이를 핸드헬드 카메라로 따라가며 중계하는 식입니다.

기립박수 보내고 나왔지만 석연치 않았던 이유는

김수현 커튼콜+
이 연극은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동안 거침없이 진행됩니다. 지루할 틈이 거의 없습니다. 하루 두 번 공연하는 날도 있던데, 어떻게 이렇게 폭발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연극을 하루 두 번 할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커튼콜 때 배우 사라 스누크뿐 아니라 카메라 스태프들도 함께 나와 인사했습니다. 카메라 스태프들도 이 연극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으니까요. 이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동선과 앵글을 숙지하고 배우를 따라 무대 곳곳을 종횡무진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환호성 속에 기립박수를 보냈고, 저도 이 분위기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공연장을 나서면서 저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희미하게 감지했습니다. 공연 잘 보고 나왔는데 왜 이럴까 생각하다가,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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