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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강바닥에 내려 배를 함께 밀고…" 임시정부 사람들의 '고난의 행군' [스프]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 ④] 광시(廣西) 류저우(柳州)

한재혁 중국본색 썸네일
지난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기념일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국 땅이 아닌 상하이(上海)에 세워진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땅에서도 일제의 핍박과 추적을 피해 항저우(杭州), 전쟝(鎭江), 창샤(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쟝(綦江), 충칭(重慶) 등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임시정부가 거쳐 간 중국 현지를 직접 가보거나 관련 기록이나 문헌 자료를 보면 그날의 신고(辛苦)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어느 한 날, 어느 한 곳 어렵지 않은 시간과 장소가 없었을 테지만, 상하이나 충칭에 비해 베트남과 인접한 먼 지역인 광시(廣西) 류저우(柳州)에서의 고행과 분투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류저우 임시정부 복원 청사, 뒤쪽으로 위펑샨이 보인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 폭탄 투척 의거 이후 일제는 프랑스 조계지에서까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인사들을 체포했으며, 임시정부는 부득이 상하이를 떠나야만 했다. 이후 여러 곳으로 거쳐 1938년 7월에는 광둥성 광저우로 이동, 정착코자 하였으나, 일본군의 공세가 심해짐에 따라 그곳에서도 오래 체류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사정상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고, 이동녕, 이시영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 청년들, 김구 선생의 80세 노모와 두 아들 등 가족까지 포함한 약 120명의 일행은 함께 류저우로 이동하게 된다. 9월 19일 광저우를 출발한 요인과 가족들은 기차와 배, 도보와 자동차 등을 번갈아 가며 11월 30일에야 류저우에 도착한다. 지금은 차로 몇 시간밖에 안 걸리는 거리를 선상 생활 20여 일을 포함하여 장기간 어렵게도 이동한 것이다.

포샨(佛山)에서 기차를 탈 때는 일본군이 기차역이 가까운 시내까지 진격하는 긴박한 상황이 있었고, 샨수이(山水)라는 곳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이동할 때는 돛단배나 예인선을 타고 이동하였다. 밤에는 먹을 것을 찾아 배에서 내려 뭍에 올라야 했고, 남녀노소가 비좁은 배 안에서 함께 밥을 해 먹고 몸을 움츠리며 잠을 청해야 했다.

늦가을에 강에 수량이 줄어 여울을 만나게 되면 배가 멈춰 모두 내려서 사람의 힘으로 배를 끌어야 했다. 당시 고난의 이야기는 그 고행길에 함께 한 임시정부 요인 양우조 선생과 부인이 갓 태어난 큰 딸의 이름을 따서 8년간 기록한 '제시의 일기' 속에 생생히 담겨 있다. 류저우에 도착한 날도 모두 지쳐서 짐을 옮기고 있는데 일본군의 공습으로 인한 대피경보가 울렸다고 전한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류저우 떠나기 전 현지 인사들과의 기념 촬영 및 군인 위문 유예대회 가상화 (자료 출처 : 국립서울현충원 블로그)
류저우는 당시 일본군 공습이 수시로 있었고 인근 광둥(廣東)과 후난(湖南) 등지에서 온 현지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재정 문제를 비롯해 임시정부 상황도 녹록지 않았지만,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청년 독립운동가들은 1939년 2월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결성하였다.

당시 피난민이 많이 유입되어 인구가 팽창한 류저우에는 극장이나 공원에서의 공연이 느는 추세였는데, 현지 항전단체들과 연합하여 연극이나 노래 등 문화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34명의 대원들은 청색의 미군식 군복에 배 모양의 모자를 쓰고 몸에 원형 리본을 달았다고 한다. 주로 시내 류허우 공원(柳侯公園)에서 모여 회의도 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연 활동도 하였다.

류허우츠와 류허우공원
1939년 3월 1일에는 3.1 운동 20주년 기념식을 류허우 공원 인근 롱청중학(龍城中學)에서 개최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류저우 각계 대표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원들은 무대에서 애국가를 제창하였고 이어 한국독립선언 20주년 기념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역만리의 고난 속에서도 3.1 운동의 뜻을 기리고 조국을 되찾기 위한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저녁에는 열띤 호응 속에 우리 민요 가창 등 감동적인 기념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3월 4일과 5일에는 항일전쟁에서 부상당한 중국 군인들을 위문하고 모금하기 위한 공연인 유예대회(遊藝大會)를 개최하였고, 먼 타지에서 온 이들의 헌신적 노력과 봉사는 현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들은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 행보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류저우일보(柳州日報) 같은 현지 언론들이 100여 차례 넘게 크게 보도하는 등 중국 내 지원 여론 형성을 이루어 내었다. 임시정부는 6개월여의 체류를 마치고 1939년 4월 류저우 시민들의 아쉬움과 열렬한 환송 속에 다시 충칭으로의 이동 길에 오른다.

1930년대 류장 포구 풍경(위) 및 최근 류저우 시내와 류장 사진(아래) (출처 : 바이두)
현재의 류저우(柳州)는 같은 광시성의 수도인 난닝(南寧)이나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광지인 구이린(桂林, 계림)에 비해 잘 안 알려진 지역이다. 신중국 성립 이후 남부 지역 중공업 발전에 핵심 지역이었고, 중-베트남 전쟁의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도 해저 케이블이나 중장비, 기계 설비 등 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중국 내 5대 자동차 생산지이다.

주로 작은 크기의 전기차를 많이 생산한다. 지리적 위치상 아세안 지역과의 교역도 활발한 지역이다.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최근 들어 마라탕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음식인 뤄스펀(柳州螺螄粉)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뤄스펀은 다슬기 등을 매운 국물에 넣은 국수의 일종으로 눅눅하게 삭은 냄새와 중독성 강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류저우 뤄스펀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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