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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밸류업 바람 탄 주주행동주의, 초라한 성적표 이유는?

'주주행동주의'는 '밸류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행동주의 펀드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들

지난 2월 정부는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내놨습니다. 핵심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동안은 기업의 매출과 영업 실적을 중시해 왔다면, 이제는 시장에서 평가받는 기업의 가치(PBR, Price to Book-value Ratio)와 자본 수익률(ROE, Return of Equity) 등에 대해서도 주주들과 소통하며 제고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하란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매출과 실적 등 자신의 앞날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밸류업 프로그램은 주주의 이익도 고민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특히, 정부는 국민연금 등 주요 기관 투자자들로 하여금 이렇게 노력하는 기업들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를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이 덕분일까요? 외국인이 지난 1분기에만 외국인이 우리 주식시장에서 15조 7,700억 원어치를 순매수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통계 집계 이후 역대 최대치입니다.

"정부와 업계, 학계 전문가가 모여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있다.(2024.02)"

이렇게 물이 들어오자 본격적으로 노를 젓기 시작한 건 행동주의 펀드입니다. 이들은 코로나 이후 우리 주식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기업으로부터 배당금이나 시세차익만 기대하는 게 아니라 이사 선임, 주주환원 정책, 부실 책임 추궁 등 기업 경영에 전반에 적극 개입해 가치를 제고하려는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합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통상 시장에서 저평가된 기업의 주식을 5% 이내로 취득한 다음 기업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가령, 회사 내에 쌓아둔 자본으로 배당금을 높이고 자사주를 매입한 다음 소각하도록 요구하거나 이사 선임 등 지배구조 관련 제안을 하고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벌여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최근엔 환경 이슈로까지 요구사항이 더 광범위해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큰 놀이터

지난해 기준 국내에서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주주 제안을 받은 우리 기업은 모두 77개사로 나타났습니다. 미국(550개사), 일본(103개사)에 이어 전 세계 3위입니다. 캐나다와 영국, 독일 등 주요국들은 모두 우리 밑에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의 사례입니다. 지난 2021년 10월 출범한 기시다 내각은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모토를 내걸고 본격적인 자본 시장 개혁에 나섰습니다. 재작년에는 5개로 나뉘어져 있던 거래 시장을 3개(Prime, Standard, Growth)로 간소화하고, 기업 지배구조와 재무성과에 따른 엄격한 상장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도쿄증권거래소가 나서 'PBR 개혁'을 시작했는데, 우리 정부가 이를 벤치마킹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올해 내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 4만 선을 찍고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일본 주식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도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이런 자본시장 개혁에 힘입어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을 받은 기업 수는 지난 2021년 66개사에서 재작년 108개사로 1년 만에 약 64%가 급증했습니다. 우리 역시 올해부터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한 자본시장 개혁 작업에 본격 착수한 만큼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을 받은 기업 수는 일본처럼 더 크게 늘어날 수 있습니다.
 

제안일까? 공격일까?

물론, 행동주의 펀드들의 개입 사례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일례로 기업 입장에서는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이 정말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라 단기에 주가를 부양해 시세 차익을 노리는 '공격'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런 공격이 결과적으로 기업 가치 제고가 아니라 성장성 악화로 이어지는 걸 경계합니다.

실제로, 한국경제인협회가 미국의 10대 행동주의펀드의 기업경영 개입 사례를 분석한 결과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을 받아들인 기업들에서 고용은 줄고 부채는 증가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기간 S&P500 소속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에서 고용인원이 증가하고 부채비율이 축소한 것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뚜렷해집니다.(<美 10대 행동주의펀드의 기업경영 개입 파급영향>, 2024.03)

한국경제인협회 측은 이와 관련해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이 이뤄지면 단기적으로 당기순이익을 높이기 위해 제일 먼저 고정 비용을 줄이려 시도하는데, 이는 고용 위축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부채비율 상승도 초래한 걸로 보인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최근 행동주의 펀드 트라이언파트너스와의 주총 대결에서 승리한 디즈니는 방어 비용으로 4,000만 달러, 우리 돈 약 540억 원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을 공격한 다음 시세 차익을 챙길 기회만 노리는 '단기+먹튀+자본'일까요? 이분법적인 논리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2년 이상의 긴 시간 주주 자격을 유지하며 캠페인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올해 주총 시즌에 태광산업 이사회에 3명의 주주 제안 이사를 앉혔는데, 지난 2021년 6월 지분 5%를 사들인 다음 3년째 꾸준하게 캠페인을 진행한 결과로 분석됩니다.

무엇보다, 주주행동주의가 우리 주식 시장의 밸류업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밸류업 프로그램은 기업 안에서 스스로 가치 제고 방안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면, 주주행동주의는 기업 밖에서 가치 제고 방안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위치는 다르지만 바라보는 방향은 같은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주주행동주의는 기업과 주주가 기업 가치에 대한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긍정적이다."라면서 "대만거래소 역시 공개적으로 주주행동주의를 촉구한 바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초라한 성적표

행동주의 펀드가 올해 주주총회 시즌에서 거둔 성적표는 우리 주식 시장의 밸류업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국내 금융 지주사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해온 토종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는 올해 주총에서 JB금융지의 이사회에 2명의 이사진을 진입시켰는데, 국내 금융사 기준으로는 최초 사례입니다. KT&G 주주총회에서도 행동주의 펀드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가 최대주주인 IBK기업은행과 함께 제안한 손동환 성균관대 교수가 사외이사로 선임됐습니다. 외부 추천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한 건 지난 2006년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2024년 행동주의 펀드 주주제안 성공 사례"

공교롭게도 앞서 소개한 두 회사 모두 집중투표제 덕을 봤습니다. 집중투표제는 1주에 후보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고, 특정 후보에 몰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사 후보가 10명이라면 1주당 10표를 행사할 수 있고, 한 후보에 '몰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집중투표제 자체는 1998년에 도입했지만, 각 회사마다 정관에서 도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즉, 기업이 정관에서 배제한다면 활용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기준 대기업 기업집단 소속 상장사(309개사) 중 집중투표제를 실시한 곳은 단 1곳(0.3%)에 불과했는데, 바로 KT&G였습니다.(공정위, 2023년 12월) 그나마 올해는 JB금융지주까지 집중투표제를 도입했기에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에 힘이 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24년 행동주의 펀드 주주제안 실패 사례"

집중투표제와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없다면 여전히 주총은 넘기에는 너무나도 높습니다. 실제로, 이사 선임 외에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 후 소각 등을 요구했던 주주제안은 올해 주총에서 줄줄이 부결됐습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보면, 주주제안이 주총을 통과한 비율은 20.2%였습니다. 이것도 많이 오른 건데 재작년과 지난 2021년에는 불과 5% 수준이었습니다. 이 비율이 50%에 달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크게 낮은 편입니다.(<주주행동주의펀드 역할 확대에 따른 시장영향(황세운)>, 2023.09)

유독 주총의 벽이 높은 이유는 총수 일가나 우호 세력이 다수 지분을 손에 쥐고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분 분산 정도가 높아야 행동주의 펀드가 다른 기관투자자나 주주들과 협력해 주주제안을 통과시키기 유리합니다. 그러나 경영진이 과반에 가까운 지분을 갖고 있다면 아무리 설득력 있는 제안을 내놓더라도 판을 뒤집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실패의 경험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행동주의 펀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 걸까요? 잇따른 실패로 행동주의 펀드의 미래를 비관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실패의 경험은 행동주의 펀드가 더 날카로운 노림수와 더 나은 전략을 내놓도록 채찍질합니다. 행동주의 펀드의 존재감이 커진다면 주총 표 대결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기업들은 행동주의 펀드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주와의 소통이 늘고 변화로 이어진다면 그 자체로 기업 가치 제고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행동주의 펀드가 기관투자자 등 다른 주주와 보다 원활하게 협력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합니다. 일본이나 영국, 캐나다 등 주요국에서는 다수 기관투자자가 ESG 등 이슈에 대해 서로 협력해 기업에 관여하는 '협력적 주주관여'를 스튜어드십 코드 등을 통해 주요 관여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우리는 자본시장법과의 충돌 가능성 때문에 아직도 도입 논의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주주행동주의 부상과 과제(김수연)>, 2024.03)

국민연금의 더 적극적인 관여 활동도 요구됩니다. 국민연금은 자산 규모 면에서 일본 정부연금투자기금(GPIF)와 노르웨이 국부펀드(GPF)에 이어 세계 3위 연기금 펀드입니다.(Thinking Ahead Institute) 재작년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 갖고 있는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지분율 7.5%), SK하이닉스(지분율 7.2%), 현대차(지분율 7%), 기아(지분율 6.9%), LG(지분율 6.8%) 등을 비롯해 모두 285개에 달합니다. 바꿔 말하면,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에 대해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국민연금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이창민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30년 이상 노하우가 쌓인 미국 행동주의 펀드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실패를 가지고 섣불리 한국 행동주의 펀드의 미래를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실패의 경험이 쌓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시급한 건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관여 활동입니다. 특히, 대기업 집단에 대한 국민연금의 스탠스가 불명확합니다. 성공적인 밸류업을 위해서라도 국민연금이 독립성을 갖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서둘러 마련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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