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소녀, 토벌대 피해 산속 굴로 들어가 숨었다
할머니가 살던 중산간 마을인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도 군경 토벌대의 민간인 학살 광풍에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30호가량이 살던 홍 할머니의 고향 '무등이왓'은 특히 피해가 컸습니다. 11월 15일, 무장대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동광리에 들이닥친 토벌대가 마을 주민 10여 명을 무등이왓에 집결시킨 뒤 총살한 것이 최초의 학살이었습니다.
"아침에 이제 경찰들이 와서 연설을 한다고 다 모이라고 했어요. 어떤 사람은 '오늘 나가면 죽으니까 나가지 마세요' 그런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10명만 나오나 연설도 허여 보지도 아니고 그냥 쏴버렸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어요. 나는 집에 있었는데 번개가 치는 것 같았어요. 깜짝 놀라서 어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하는 말은 '아이고 너희 아방 밭에 있는데 오늘 아들 다 죽은 생이여' 막 울면서 동네 사람들 다 죽었다고 했어요."
-홍춘호 할머니 (이하 동일)
토벌대는 학살한 시신을 수습하러 온 양민들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12월 12일, 전술훈련을 하듯 잠복해 있던 토벌대는 시신을 찾으러 온 양민 10여 명을 한 곳을 몰아 짚더미나 멍석을 쌓고 그대로 불을 질렀습니다. 여성, 노인, 아이들이 희생자의 대다수였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학살터의 이름이 '잠복학살터'인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찾아내 학살하는 토벌대를 피해 마을사람들은 산으로, 굴로 도망가 숨기 시작했습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서쪽으로 2km가량 떨어진 약 200m 길이 굴인 '큰넓궤'로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안심할 순 없었습니다. 그렇게 큰넓궤에서 숨어 지낸 날이 50여 일이었습니다.
"우리 큰 동생하고 나하고는 어느 숲 속에다가 가만히 숨져두고 어두우면 나가 달래고... 우리는 어망(어머니) 보고 싶어도 무서왕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를 못했어요. 아버지가 몰래 우리 데리러 어둠에 데리러 왔게 하루 살은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누구도 죽었고 누구도 죽었지 그랬는데..."
"남동생 셋, 부모님 모두 잃어... 일가족 풍비박산"
"우리 아방(아버지)은 서귀포에 가서 '산에 살면서 폭도들하고 무슨 연락을 하면서 살았느냐 바른대로 말해라'하면서 6개월 동안 토벌대에 고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1년도 되지 않아 돌아갔어요. 약 한번 먹어보지도 못하고 병원에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팽팽 둥굴다가 그냥 돌아갔죠."
1951년 고문 후유증으로 아버지가 숨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홍 할머니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사라진 고향 마을엔 다시 돌아갈래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나온 76년, 홍 할머니는 또다시 '폭도'라는 오명으로 자식들에게 불이익이 될까 이야기도 그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담담히 이야기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2000년 '제주 4·3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엔 조사보고서까지 나오며 희생자들도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홍 할머니도 현재는 동광리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면서 4·3의 참상을 생생히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희생자들에게 남은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심의 결정한 희생자는 지난달 기준 1만 4천822명에 달합니다. 이 중 생존 희생자 103명을 제외하면 1만 4천719명의 위패가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봉안돼 있습니다. 이념을 떠나 기록적인 희생자를 낳은 한 민족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제주 4·3은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일 겁니다. 이미 생존자들 가운데서도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 홍 할머니를 비롯한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기리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은 이제 우리 세대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