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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커다란 구덩이…"제주 4·3 피난처 추정"

<앵커>

제주 4·3 당시 군경의 무차별 토벌을 피해 중산간 마을에 살던 주민 상당수가 한라산 일대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피난처들은 아직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못한 채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김동은 기자입니다.

<기자>

아흔을 바라보는 김대식 할아버지.

7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4·3 당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김대식 할아버지(88세) : 잡아다가 두드려 패고 산에서 무엇을 줬느냐, 옷이나 쌀, 돈 이런 것들 줬는지, 사상을 확인하기 위해서.]

당시 중산간 일대 마을 주민들은 군경의 무차별 토벌을 피해 한라산과 오름 등으로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김 할아버지는 당시 일부 주민들이 주변 오름과 곶자왈뿐만 아니라, 영림서로 불리는 중산간 깊은 숲으로도 피난을 갔다고 말합니다.

[김대식 할아버지(88세) : 나무를 심으면 숲이 되니까 경영하는 거지, 운영하는 것이고, 영림, 관리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니까 자연적으로 다 알지, 어디에 가면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궤(굴) 있는 것도 알고.]

영림서는 일제 시대 한라산 일대 벌목과 조림을 담당했던 일본 기관인데, 당시 사업 구역을 주민들은 영림서로 불렀다는 겁니다.

조림과 벌목에 동원됐던 마을 주민들은 일대 지형을 꿰뚫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1948년 항공사진입니다.

일제 시대 조림 사업이 진행됐던 현장이 검게 나타납니다.

전문가와 함께 현장으로 가봤습니다.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자, 부서진 솥과 그릇들이 발견됩니다.

[한상봉/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 머물지 못하게, 밥을 못하게끔 (솥) 밑동을 한 번 깨는 겁니다. 이렇게 깨고.]

인근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덩이들도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길이 4m, 폭 2.5m가량 되는 구덩이로 주변에는 인위적으로 쌓은 돌도 나타납니다.

4·3 피난민들이 움막 형태로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일부 구덩이 중앙에는 불을 피운 것으로 보이는 화덕도 발견됩니다.

4·3 피난처로 추정되는 현장입니다.

이와 비슷한 모양이 곳곳에서 확인되면서 피난 규모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장에서 확인된 큰 구덩이는 4개, 당시 이곳에만 30여 명 정도가 피신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근에서 발견된 깨진 항아리는 당시 피난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당시 누가, 어떻게 피신을 했는지 등 정확한 증언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조사에는 동부지역 영림서 일대로 중산간 마을 수많은 사람들이 피신했다는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한상봉/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 광범위한 지역이다 보니까, 영림서에 일제 때 심었던 나무들이 당시에는 우거져 있었고, 숨어 있기도 편했고. 이 정도 규모면 한 지역민들이 왔을 가능성이 높다.]

4·3 당시 피난의 흔적은 4·3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지만, 부족한 조사 속에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상취재 : 고승한 JIBS)

JIBS 김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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