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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불혹의 진화.."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05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장’(成長)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쓰입니다. ‘경제 성장’처럼 구체적인 수치가 커짐을 가리키거나 ‘인격 성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이르기도 합니다. 

경제 성장이 무한히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말처럼 사람은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점점 ‘성장에도 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 는 과연 언제까지 일까요?

일본의 ‘새로운 거장’이라 불리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제 그냥 ‘일본의 거장’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 합니다. 40대 중반인 그는 최근 3년 동안 아카데미상과 칸(드라이브 마이 카), 베를린(우연과 상상)에 이어 베니스 영화제(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 세계 최고의 영화제 4곳에서 모두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야구에 ‘쇼타임’(Shotime)이 있다면 영화계에는 ‘하마구치 타임’이 있다는 듯이 말이죠. 수상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외부 평가는 개인의 성장을 공인하는 의미가 있고, 수상자에게는 자신감을 부상(副賞)으로 안깁니다. 자신감은 성장의 퇴비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의 모국 일본보다 한 달 빨리 국내에서 개봉했습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도쿄 외곽의 한 산골 마을에 중년 남성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가 살고 있습니다. 타쿠미는 자칭 마을의 심부름꾼으로서 장작을 패고 산속 샘물을 길어 우동집에 가져다 주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나무만큼이나 조용한 소녀 하나는 자연과 벗하며 자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지인들이 들어와 이 조용하고 깨끗한 마을에 글램핑장을 짓겠다며 설명회를 엽니다. 타쿠미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정화조 위치 및 오수(汚水) 배출 등 글램핑장 건설 계획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묻지만, 이른바 ‘담당자’들은 뻔한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전문가의 참여 하에”(우리가 돈 주고 조사시킨 전문가가 그렇다잖아), “허용 기준치 이내(법적으로 문제없는데 왜 그래)”, “귀중한 의견 잘 검토하겠습니다”(알았으니 이제 좀 넘어가자), “운영 방침”(우리가 이렇게 하겠다는데 너희가 왜 상관이야), “저희가 담당자”(우리가 사장 총알받이야)

일본어 대사만 아니라면 일본인지 한국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는 글로벌 자본주의 세상의 웃픈 풍경. 길게 이어지는 대사 씬도 묘한 긴장 속에 지켜보게 하는 ‘대화의 마법사’ 하마구치 류스케 특유의 이 티키타카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의 장면들은 서늘한 상징과 은유로 넘쳐 나는 스크린 콘서트를 연상시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 이 영화는 영화로 기획된 게 아닙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음악 감독 이시바시 에이코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자신의 라이브 공연에 쓸 영상물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시작한 작업이 위의 설명회 장면을 찍고난 뒤에는 영화로 발전했습니다. 

이시바시 에이코로부터 영상물 제작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일종의 뮤직비디오 배경 화면을 찍다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영화를 만들어버린 겁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는 운동 선수로 치면 정말 컨디션이 좋고 자신감이 넘칠 때 나올 수 있는 플레이입니다. 한마디로 ‘뭘 해도 되는 경우’라고 할까요. 

형식과 내용은 한 몸입니다. 창작의 결과물은 창작의 과정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물감을 ‘뿌리고’(잭슨 폴록), 변기를 ‘갖다 놓고’(마르셀 뒤샹), 그림을 ‘찍어내는’(앤디 워홀) 창작의 과정 자체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예술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고 난 뒤 하마구치 류스케가 불혹(不惑)을 훌쩍 지난 나이에도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이전의 하마구치 류스케와 같으면서도 확실히 달랐으니까요. 그것은 아마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창작물 자체를 넘어 창작 과정을 발명해내는 단계까지 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타쿠미와 어린 딸 하나 / 그린나래미디어
마을 사람들의 반발에 놀라 일단 도쿄로 철수했던 글램핑 설명회 담당자들이 타쿠미를 설득하러 다시 마을로 내려온 가운데 타쿠미 부녀에게 뜻밖의 일이 발생하고, 고요하게 전개되던 영화는 당혹스럽다 못해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습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해서 걸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이상한 것들을 이상하게 붙여놨는데 붙여놓고 보니 상당히 잘 붙네,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입니다. 침묵, 묘한 음악, 느닷없는 반말 대사, 선뜩한 이미지 등등이 섞여서 생경한 느낌을 주는데 이게 또 신선하고 깊어 보인다는 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매력입니다. 

시점(視點)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주인공이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컷들이 나옵니다만 이 영화에서는 땅에서 자란 와사비와 죽은 사슴의 시점으로 주인공을 쳐다보는 듯한 숏 등이 나옵니다. -하마구치 감독은 카메라는 촬영 장치로서 기능할 뿐 자신은 어떤 영화에서도 시점 숏을 찍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 본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시점 숏들입니다. 

환경과 인간, 선악(善惡)을 논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이런 숏들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시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주인공 타쿠미가 유일하게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말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라는 대사는 영화 《아바타》 속 네이트리 대사의 다른 버전입니다.

“자연은 선한 편을 편드는 것도, 악한 편을 편드는 것도 아니야. 균형을 잡을 뿐이지”(Our Great Mother does not take sides; She only protects the balance of life)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인상깊게 뒤늦은' 오프닝 크레딧과 달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작하자마자 타이틀이 뜹니다. 곧이어 카메라는 프레임 가득 숲 속 나무들을 올려다 봅니다. 처음에는 틸트 다운하는가 싶었던 씬은 도무지 언제 끝날지 짐작하기 어려운 길고 긴 트랙킹 숏으로 이어집니다. 겨울의 나뭇가지는 점점 숲 또는 지구의 혈.관.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불길한듯 묘한 음악이 흐릅니다.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역입니다. 이 영화의 출발 자체가 그녀의 음악을 뒷받침하는 영상이었거니와, 자연을 닮은 그녀의 음악이 없었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은 결코 지금 같은 영화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시바시 에이코는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 철학이 트렌드와 상충될 수 있다고 하면서 “나는 음악이 감정을 조종해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감정에 공감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집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음악은 누구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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