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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트럼프가 시작한 경제 제재, '쿠바 수교' 한국에 직격탄?

한국-쿠바 공식 수교로 해빙기 맞았지만, 경제 협력은 속도 낼 수 있을까?

[취재파일] 트럼프가 시작한 경제 제재, '쿠바 수교' 한국에 직격탄?
지난 2월 14일, 쿠바와 우리나라는 외교 관계를 복원하는 데 전격 합의했습니다. 쿠바가 우리나라의 193번째 수교국이 됐다는 이 뉴스는 여러 측면에서 놀라움을 줬습니다. 특히, 쿠바는 반세기 넘게 북한의 '형제국' 이었습니다.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과 중국 등 주요 공산주의 국가들이 북한의 반대에도 참가한 반면, 북한과의 의리를 지키겠다며 끝내 불참한 나라가 바로 쿠바이기도 합니다.

쿠바가 태도를 바꿔 우리에게 손을 내민 배경에는 최악의 경제난이 있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주력 산업인 관광 산업이 무너졌고, 정부가 재정 적자를 축소하겠다며 휘발유와 경유 가격을 400% 넘게 인상하는 등 엄청난 수준의 물가 폭등과 쌀과 소금, 분유 등 배급 식량 부족까지 겹쳤습니다. 최근엔 잦은 정전 등으로 그나마 남아 있는 음식조차 냉장고에 보관할 수도 없는 전력 위기까지 겪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가 전례 없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 쿠바는 북한에 대한 의리를 뒤로하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마침, 쿠바는 우리의 주력 수출품 중 하나인 2차전지에 들어가는 핵심 광물인 니켈(생산량 세계 5위)과 코발트(매장량 세계 4위)의 주요 매장지 중 하나입니다. 한국과 쿠바 양측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으며 '윈-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쿠바와의 수교가 정치적 성과를 넘어 경제 성과로도 이어질 수 있단 장밋빛 전망이 나온 이유입니다.
 

쿠바에 투자했다가 '줄소송' 당한다?


하지만, 이런 전망에는 언제나 조건이 붙습니다. 쿠바를 향한 미국의 제재가 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수교 직후 우리 대통령실은 "2차전지 생산에 필수적인 니켈과 코발트의 주요 매장지로서 광물 공급망 분야 협력의 잠재력이 다대하다."라고 전망하면서도 "미국 제재 해제 시"라는 단서를 달기도 했습니다.*

*'한-쿠바 수교에 따른 분야별 기대 효과'(2024.2.18.)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제재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중 88년 만에 쿠바를 방문하며 관계 개선에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난 2017년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쿠바를 '테러지원국(State Sponsor of Terrorism)'으로 재지정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미국은 1982년 쿠바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지만, 오바마 행정부에서 제외 조치.

때문에, 지금은 한국 기업이 쿠바와 직접 거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제3국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또, 쿠바에 정박한 선박은 향후 6개월은 미국에 갈 수 없는데다 쿠바 입국 이력이 있으면 미국 무비자 입국이 제한되기 때문에 물품 운송이나 인적 교류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제 협력을 위협하는 암초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헬름스-버튼 법'입니다. 미국 공화당의 제시 헬름스와 댄 버튼 상원 의원이 지난 1995년 발의한 법안입니다. 두 의원의 이름을 따서 '헬름스-버튼 법'으로 불리는데 골자는 쿠바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이 법 3장에는 쿠바 정부에 재산을 몰수당한 미국인에게 쿠바와 거래하는 외국 기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걸 허용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안상우 취재파일용 사진
▲ 미 의회를 통과한 헬름스-버튼 법안에 대해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하는 모습(1996.3.12.)

아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 니켈 등 다양한 광물이 묻힌 광산을 매입한 미국인 A 씨가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피델 카스트로 주도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A 씨의 광산은 '국유화'라는 이름으로 모두 쿠바 정부에 의해 몰수됐습니다. A 씨는 이런 사실을 자신의 유서에 남기고 권리 일체를 아들인 B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B 씨는 제3국 기업 C가 쿠바의 니켈 매장지에 투자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소문 해보니 투자 대상은 아버지 A가 소유였던 광산이었습니다. 헬름스-버튼 법은 이런 상황에서 B가 기업 C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광산을 빼앗긴 미국인 A 씨의 사례도 안타깝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니켈 광산에 투자했다가 소송을 당하는 기업 C도 어처구니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헬름스-버튼 법 3장은 특히나 유럽이나 캐나다 등 미국의 동맹국들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고, 이런 이유로 헬름스-버튼 법 3장은 1996년 법 제정 이후 역대 대통령(빌 클린턴 -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에 의해 효력이 정지돼 왔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쿠바를 더 강하게 압박하겠다며 23년 만인 2019년 5월 효력을 회복시켰습니다. 이후 정권을 잡은 바이든 행정부 역시 효력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 결과 쿠바와 수교를 맺은 우리에게 헬름스-버튼 법은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됐습니다.
 

'백' 없는 우리 기업들은?


헬름스-버튼 법 3장의 효력이 회복된 이후, 앞서 제가 예시로 삼은 사연의 주인공들이 나타나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트리바고' 사례입니다. 두 명의 미국인(Marisela Mata and Bibiana Hernandez)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들은 자신의 가족이 쿠바 남부 연안 도시인 시엔푸에고스에 호텔을 세웠지만 쿠바 정부에 의해 압수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트리바고가 이 호텔을 다른 누군가가 이용할 수 있도록 예약을 돕고 수수료를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송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이 호텔을 쿠바 정부로부터 인수해 운영한 스페인 호텔 체인 업체(Melia Hotels International)도 헬름스-버튼 법에 근거에 소송을 당했습니다. 소송 과정에서 호텔 체인업체의 CEO는 미 당국으로부터 입국을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페인(중국과 베네수엘라에 이어 쿠바의 제3위 교역국)을 비롯해 쿠바에 투자를 많이 했던 유럽 국가들은 EU 차원에서 헬름스-버튼 법의 EU 내 적용을 금지하고, 헬름스-버튼 법에 근거해 권리를 행사하는 미국 기업에 대해서는 별도의 제재를 가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또, EU는 미국을 WTO에 제소함으로써 미 정부로부터 EU 기업 및 시민에 대해서는 동 법률을 적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양해를 받기도 했습니다.(1998)

*Council Regulation (EC) No.2271/96 of 22 November 1996

이런 노력 덕분에 미국 법원은 유럽 기업이 헬름스-버튼 법에 휘말리더라도 EU의 소송 허가 결정이 없다면 섣불리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호텔 체인업체인 lberostar가 피고로 몰린 사건에서 EU가 소송 허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끌자 미 법원도 EU 결정 없이는 어떤 판결도 내릴 수 없다는 입장를 취하면서 유럽 기업들은 헬름스-버튼 법으로부터 숨 쉴 곳을 찾았습니다.

광산회사인 쉐릿(Sherritt international)을 통해 쿠바에서 니켈과 코발트 등 이차전지 핵심 광물을 채굴하는 등 쿠바의 제1수출국인 캐나다 역시 헬름스-버튼 법의 자국민 적용을 막기 위해 역외적용법*을 만들고 미국과 법 적용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Canada's Foreign Extraterritorial Measures Act; FEMA(1996)

문제는 쿠바와의 경제 협력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 들뜬 우리나라는 아직 EU나 캐나다 수준의 효과적인 대응책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들처럼 정부가 나서서 제도적인 방어 수단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쿠바 진출을 노리고 있는 우리 기업들은 언제 어디서 제기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그대로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에게 희소식은 수교 이후 당장 쿠바와의 교역이 시작되는 게 아니란 점입니다. 정치적 성과를 넘어 더 큰 기회를 쟁취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고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가시밭길


길이 보이고, 우리에게 그 길을 걸어갈 시간이 있다고 해서 문제 해결이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EU나 캐나다처럼 우리 정부가 미국의 법 적용을 적극적으로 무효화할 수단을 택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부담을 고려할 때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돌파구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에 앞서 치열한 고민과 전략이 선행되어야 할 때입니다.

경제자유살롱 중 장면
신동찬 율촌 변호사
"정부 입장에서는 소송 등 문제 상황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군사 동맹국인 미국을 상대로 해서 EU 스타일의 법을 마련해 놓는다는 게 상당히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교 이후 우리 기업들의 진출 기회가 있을 거다.'라고 장밋빛 전망만 내놓을 게 아니라 잠재적인 위협으로부터 우리 기업들을 보호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무엇이 있는지부터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경제자유살롱'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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