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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어게인 학전'은 그렇게 끝났고… 우리는 아름답게 이별할 것이다

[커튼콜+] <학전과 '뒷것' 김민기>

김수현 커튼콜+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김민기 곡 '봉우리' 중에서


지난 14일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열린 학전의 마지막 공연을 다녀와서 이 노래를 계속 듣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부터 학전을 거쳐간 가수와 배우 33팀이 펼친 릴레이 콘서트의 피날레였던 이 공연은 '김민기 트리뷰트'로 진행되었습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권진원, 정동화, 알리, 박학기, 한영애, 배우 황정민, 그리고 학전 김민기 대표와 인연 깊은 대학로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가 출연했습니다.

인상적인 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가수 권진원이 '아름다운 사람'을 부를 때, 지난해 정재일 콘서트에서 정재일의 기타와 피아노 반주와 함께 울려 퍼지던 김민기의 육성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었습니다.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부른 김민기의 '그 날'에 제 마음도 떨려왔습니다. 황정민이 부른 '작은 연못'은 그 어느 뮤지컬 넘버보다도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숲 속 작은 연못의 비극을 들려줬습니다.

특히 한영애가 부른 '봉우리'는 아직도 제 귓전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합니다. '봉우리'는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했다가 예선에서 탈락해 선수촌에도 남지 못하고 쓸쓸히 귀국하는 선수들을 위해 쓴 곡입니다. 당시 양희은의 노래로 한 방송 다큐멘터리 OST가 되었고, 후에 김민기가 불러 자신의 음반에 실었습니다. 김민기 '봉우리' 듣기, 한영애 '봉우리' 듣기(2021년 공연실황)

그는 패배하고 좌절한 이들에게 그는 '봉우리는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모른다'고 나직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원래도 좋아했던 곡이지만, 가사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긴 내레이션과 노래가 섞인 이 곡을 한영애는 관객 한 명 한 명한테 말을 걸듯 불러줬습니다. 한영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김민기의 낮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김민기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있었다

김수현 커튼콜+
출연자들은 모두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고, 김민기 선배님, 혹은 선생님, 혹은 형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민기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존경과 애정, 감사가 듬뿍 담긴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학전이 곧 김민기요, 김민기가 곧 학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민기의 노래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이고, 음악의 길에 등불이 되어준 선배다' (권진원)

'김민기 판을 틀었다가 혼났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분이었다' (이충열 학림다방 대표)

'김민기 선생님한테 기본을 다시 배웠다. 그때 배운 게 지금까지 자부심 갖고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황정민)

'한 노래 열 권의 책 안 부럽다. 김민기 음악을 들으면 사람다워지고 생각이 따뜻해진다' (알리)

이 공연의 앙코르는 출연자들과 관객이 함께 부른 '아침이슬'이었습니다. 출연자들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독이며 노래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며 울컥하는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나 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의 마지막 소절까지 다 부르고 출연자들은 마치 노래 가사처럼,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무대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진짜 가는구나. 저는 객석을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퇴장하는 권진원의 모습을 보면서, 내내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학전의 마지막 밤, 극장을 떠나지 못했다


스프 학전 커튼콜
학전 소극장 문을 나섰지만, 저는 극장 앞마당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습니다. 김광석 노래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극장 앞을 서성이며 출연자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걸 지켜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마음인지 극장 앞은 한동안 관객들로 북적였습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지인들과 함께 한동안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출연자들이 김민기 형님, 혹은 선생님, 혹은 선배님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모두 '김민기 대표'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저는 '지하철 1호선' 3천 회 공연 끝나고 뒤풀이에 따라갔던 기억을 꺼냈습니다. 학전 출신 배우들이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오랜만에 모였던 그날, 황정민이 평소보다 더욱 빨개진 얼굴로 '우리 선생님 왜 이렇게 늙으셨어요. 주름이 쭈글쭈글해지셨네' 하며 김민기 대표의 손을 계속 잡고 놓아주지 않고, 김민기 대표는 '어허 참!' 하면서 껄껄 웃던 모습이 정말 따뜻했거든요.

스프 커튼콜
오래전 김민기 대표를 인터뷰했던 한 기자는 '학전 출신 스타들이 많아서 흐뭇하시겠다'고 했더니 그가 '그보다는 잘 안된 사람들한테 마음이 쓰인다'고 대답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봉우리'가 패배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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