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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네타냐후, '민주주의'로 미국을 때리다

[월드리포트] 네타냐후, '민주주의'로 미국을 때리다
▲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방위 조약 없이도 그 어떤 나라보다 공고한 동맹을 과시해왔던 게 미국과 이스라엘입니다. 그랬던 밀월 관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파상 공세 속에 가자지구 민간인 피해가 커진 게 가장 큰 원인입니다. 국제사회는 물론 미국 국내 여론까지 돌아서자 연말 대선을 앞둔 바이든 정부도 사정이 급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생존권의 문제라며 미국 요구에 좀처럼 순순히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큰 쟁점은 가자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에 대한 지상전 개시 여부입니다. 미국은 피란민 100만 명이 몰려 있는 곳이자, 인도적 지원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라파에서 지상전을 벌일 경우, 대규모 민간인 피해가 불가피하다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유대인 1,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하마스의 만행을 벌써 잊었냐며 이곳에 숨어 있는 지도부를 소탕하지 않고는 하마스를 뿌리 뽑을 수 없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네타냐후 교체론'에 "이스라엘 국민이 알아서 할 일"

척 슈머 원내대표 (사진=AP, 연합뉴스)
▲ 척 슈머 원내대표

아무리 사이 좋은 이웃이라도 집안 사정이 먼저인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 특히나 선거철을 맞은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먼저 입을 연 건 민주당의 상원 1인자인 척 슈머 원내대표였습니다. 유대계로 누구보다 이스라엘 지원에 앞장섰던 그였지만 국내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직접 '네타냐후 교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슈머는 지난 14일 의회 연설에서 과도한 가자지구 민간인 희생으로 이스라엘의 하마스 전쟁 수행에 대한 전 세계적인 지지가 역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이 중대한 시점에 나는 새로운 선거가 이스라엘의 건전하고 개방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고 밝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슈머가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미국인이 공유하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생각한다며 '좋은 연설'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 CNN 방송에 출연해 미 정치 지도자와 미국인들을 향해 직접 반박에 나섰습니다. 먼저 전쟁 중 선거를 치르라는 건 전쟁에서 지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완전한 승리를 하고 있는 전쟁 중에 지금 선거를 한다면, 최소 6개월은 국가가 마비될 것이다. 전쟁에 지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척 슈머의 발언을 겨냥해 "민주주의 자매 국가에 가서 그곳의 선출된 지도부를 교체하려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민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꼬집었습니다. 한마디로 내정 간섭이자 외세에 의한 정권 교체 시도라는 겁니다. 네타냐후는 "우리는 '바나나 공화국'이 아니다"라는 말로 불쾌감을 나타냈습니다. 바나나 공화국이란 부패와 외세 개입으로 불안정한 권위주의 정권 국가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용어입니다.
 

미국 '민주주의' 외쳤지만

바이든 미 대통령,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미국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하며 이를 알리고 보급하는 데 주력해왔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서방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미국의 이른바 '가치 동맹'도 그런 활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 체제에 대항하는 가치 체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국민 주권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홍콩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 더욱 그런 점이 와닿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이런 가치는 어디까지나 국익 다음이었습니다. 1960년대 과테말라 쿠데타가 그중 하나입니다. 당시 미국은 대토지를 소유한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 콰테말라 국민들이 선거로 뽑은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일정 부분 냉전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CIA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미국이 주창해온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탄압 정책으로 과테말라 주민들을 억눌렀습니다.

이에 앞서 1950년대 민족자결주의(이 또한 미국이 주창했던 사상입니다)를 외치며 석유 국유화를 추진했던 이란 모사데크 총리 정권을 전복시켰던 것도 미국이었습니다. 역시나 공산화 위협을 이유로 들었지만 중동에서의 미국 패권 유지와 미영 석유 카르텔의 독점 체제 유지가 근본적 목적이었습니다. 모사데크 총리 때 국민적 지지 속에 개혁을 꿈꿨던 이란은 이후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전복되면서 현재까지도 미국의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민주 가치와 국익 사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습 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네타냐후의 전쟁 수행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타냐후가 미국을 향해 던전 비판은 미국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뼈아픈 지적입니다. 늘 민주적 가치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타국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전례가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을 다녀온 한 미국인 기자가 제게 전해준 이스라엘 현지 분위기는 네타냐후의 정책만큼 강경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네타냐후의 정책이 민주적 제도라는 관점에서 민의와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겁니다.

미국 여당의 상원 1인자가 직접 다른 민주 국가의 정권 교체를 공공연히 언급하고 이를 바이든 대통령이 좋은 연설이었다고 평가했다는 건 아무리 이를 단순한 의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두 사람의 정치적 무게를 고려할 때 주권 침해적, 다시 말해 타국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발언이란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나 그게 가장 강력한 동맹으로 꼽아온 이스라엘이고 보면, 미국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민주주의 가치라도 언제든 국익에 따라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세계 무대에서 누구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주창하고 있는 미국이지만 정작 국내 사정은 민망할 지경입니다. 정치 양극화 심화로 대화와 타협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고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은 극단화된 소수에 휘둘려 집안싸움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민의의 전당인 의회가 폭동에 유린당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그 발단이 됐던 선거 부정 문제를 놓고 양 진영이 다른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번 러시아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푸틴이 러시아 내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건 서방 측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은 끝내야 합니다. 미국이 국내 정치적 필요에 따라 그랬든 인도적 차원에서 그랬든 현실적으로 미국이 빠진 채 이 문제를 푼다는 건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내건 미국이 이스라엘 압박 수단으로 '정권 교체'를 거론한 건 득보다 실이 더 커 보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그저 이스라엘을 위해 '건전하고 개방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새로운 선거'를 언급한 것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글쎄 그렇다 한들 얼마나 설득력 있는 걸까요?

(사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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