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품어 준 그때 그 환자들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버지에게 숨을 깊게 들여 마신 후 내쉬기를 반복하도록 했습니다. 그러고는 별말없이 자리를 떴는데, 얼마 후 3년 차 교육 담당 전공의가 의대생 여러 명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의대생들이 돌아가며 아버지의 호흡 소리를 듣도록 했습니다. 폐암이 아버지의 기도를 좁게 해 특정 소리(wheezing, 공기가 좁은 기관지를 통과할 때 나는 소리)와 암이 염증을 일으켰는지 비누 거품 같은 소리(rale)가 났나 봅니다. 전공의는 의대생들에게 청진기로 들었던 소리가 무엇인지 설명한 후 인사하고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기관지 내시경, PET CT 등 여러 검사를 오가며 받았는데, 병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의대생들이 두어 명씩 와서 청진기를 들이댔습니다. 아버지가 좋은 교재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너무하다 싶어 이의를 제기하려는 순간, 아버지는 저를 가로막고 학생들이 숨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흔쾌히 상의를 들어 올렸습니다.
"너도 저렇게 배웠을 거 아니야. 아빠도 갚아야지. 저분들이 잘 배워서 훌륭한 의사가 되면 그게 다 세상 복이지."
의대생과 전공의 시절, 자신의 몸을 흔쾌히 내주던 여러 환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뇌 수술 후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환자 가족의 말씀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망 선고를 내리고 돌아서려는 저를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의사 양반, 나는 뭔가 잘못돼서 남편이 죽은 것 같아. 우리 남편을 잘 공부해서 다음에는 이렇게 허망하게 환자가 죽는 일 없도록 해줘"
대한민국 의료가 OECD health data 지표에서 세계 톱클래스에 자리할 수 있었던 1등 공신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부의 2천 명 증원과 필수 의료 패키지에 대해서 의료계는 반박하면서 여러 다른 근거들로 따져 물었습니다. ▶ 관련 영상
하지만 이런 논리적 다툼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의 헌신을 의료계는 더 소중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최근 전국의과대학교수 비대위원장이 한 방송에 나와 대국민 사과를 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됩니다.
병원에 들어가는 전임의 가족의 편지
전공의가 없는 요즘, 병원은 전임의에게 휴가를 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임의 계약 포기'라는 말은 없었지만 고향집에 내려온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전임의는 집에 있는 동안 방 안에서 뉴스만 검색했고, 정부의 브리핑을 보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TV를 꺼놨지만, 딸이 불면증에 시달리며 불안 증세를 보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충분히 쉬지도 못했는데 병원에 들어가는 건 아마도 병원에 남아 환자를 보고 있는 교수님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전임의에게는 정부의 행정명령이 발동되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와 딸은 카페에 둘이 앉았지만 어떤 말도 어떤 눈빛도 주고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의사로서 진짜 가슴을 맞대고 살고 싶다며 심장 내과를 선택한 딸이 병원으로 향하면서 건넨 말은 어머니를 한숨짓게 했습니다.
"병원에서 저의 치료를 받고 환한 미소를 주었던 환자들은 저에게 이렇게 욕하는 분들이랑 다른 사람들인가요? 국민들이 이렇게 저를 싫어하시는데 제가 병원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상처의 크기는 사랑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별로 아프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흉터가 오래 남습니다. 젊은 심장내과 의사는 환자들이 보낸 환한 미소의 가치를 아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환자들이 젊은 의사에게 보내준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신을 향한 국민의 질책이 더 아팠던 모양입니다.
환자-의사의 신뢰 관계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