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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평촌 출신의 '할리우드 신데렐라' 셀린 송의 '인연'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03

프롤로그.

지난 주 국내 개봉한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 후보작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의 이야기 구조는 수필가 피천득이 이미 50년 전에 짜놓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오랜 세월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국민 수필’인 피천득의 ‘인연’에서 '나'와 아사코는 27년 간에 걸쳐서 세 번을 만납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과 나영도 24년 동안 세 번의 인연을 맺습니다.

#1
(인연)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사코는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줍니다. 
(패스트 라이브즈) 서로 좋아했지만 내색하지 않던 초등학생 해성과 나영은 멀찍이 떨어져서 “야, 잘가라”라는 무뚝뚝한 한마디를 끝으로 헤어집니다. 나영은 캐나다로 이민을 갑니다.

해성과 나영의 이별 장면 / CJENM

#2  
십삼사 년이 지나 두 번째로 도쿄를 방문한 나는 아사코를 찾아갑니다. 청순하고 세련돼 보이는 영양(令孃)이 된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헤어진 지 12년 후, 해성과 나영은 소셜미디어로 서로를 찾아내 화상 통화를 하게 됩니다. 랜선으로 감정을 키워 나가는 두 사람. 하지만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나영(미국명 노라)의 요청으로 연락은 다시 끊기고 맙니다. 

#3 
또 십여 년이 흐릅니다. 나는 미국 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아사코를 보러 갑니다. 하지만 일본인 2세와 결혼한 뒤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와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집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해성과 나영은 랜선 대화가 끊긴 지 12년 만, 서울에서 헤어진 지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합니다. 뉴욕의 한 바(Bar)에서 나영의 서양인 남편을 옆에 앉혀둔 채 해성은 한국말로 묻습니다. 

“만일 내가 12년 전에 뉴욕에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네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귀었을까? 헤어졌을까? 결혼했을까?” 

뉴욕의 바에 앉아 얘기하는 해성과 노라(나영) 그리고 노라의 남편 아서 / CJENM
그리고 해성은 공항으로 가는 우버를 타러 맨하탄 이스트 빌리지를 걷기 시작합니다. 나영이 따라 나섭니다. 이번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일까? 피천득 선생은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해성과 나영의 세 번째 만남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 * *

96년 역사의 아카데미상은 지금까지 딱 두 명의 여성 감독에게만(캐서린 비글로우, 클로이 자오) 작품상을 허락했습니다. 데뷔작으로 작품상 후보에 오른 여성 감독은 “작은 신의 아이들”(1986)의 랜다 헤인즈와 “레이디 버드”(2017)의 그레타 거윅 감독 딱 두 명뿐입니다. (수상은 못했습니다)

올해 그 명단에 한 명이 추가됐습니다. 한국계 셀린 송 감독이(한국명 송하영) 자신의 첫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아카데미 최고상에 이름을 올린 겁니다. 

굳이 전세계 영화상 77관왕 218개 부문 노미네이트란 수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 영화는 지난해 세계 유수의 미디어들이 각자 뽑은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대부분 이름을 올려 수작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셀린’(Celine)은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름으로 ‘천국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전생’(前生)이란 영화 제목과 썩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저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는데, 영화 개봉에 맞춰 내한한 셀린 송 감독을 드디어 만났습니다. 

인터뷰 중인 셀린 송 감독 / 김태훈

- 셀린이라는 영어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아빠가 지어줬어요. 그게 ‘셀린 디옹’에서 온 것 같은 생각도 들고(송 감독은 처음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셀린 앤 줄리 배타러 가다”(Céline et Julie vont en bateau,1974)라는 영화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고 어떤 게 진실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셀린 앤 줄리…는 누벨바그의 선구자 자크 리베트 감독의 대표작)

셀린 송 감독의 부친은 “넘버3”(1997)를 만든 송능한 감독입니다. “넘버3”에서 마동팔 검사 역을 맡았던 최민식 배우에게 셀린 송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당시 평촌에 있던 송능한 감독의 집에서도 “넘버3”를 촬영을 했다면서 셀린을 기억해냈습니다. 

“제가 본 기억이 나요, 꼬맹이. 그 친구가 또 이렇게 감독이 돼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외국에서 좋은 반응을 받고 있다고 하니 정말 세월도 많이 흐른 것 같고 감개무량하네요.”

최민식 배우가 주연한 “파묘”가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패스트 라이브즈”와 함께 극장에서 상영중이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입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양 관객들에게 ‘인연’이라는 한국말을 가르쳐준 영화입니다. ‘인연’에 바로 대응하는 영어가 없기 때문에 주인공인 나영(미국명 노라)은 영화 속에서 ‘In-Yun’을 한국어로 발음하면서 그 뜻을 보이스오버(영어)로 설명합니다. 

셀린 송 감독은 ‘인연’이라는 말이 지닌 느낌은 알면서도 표현할 단어가 없었던 서양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어설픈 발음으로 ‘인연’을 이야기할 때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이 영화에서 한국어 대사의 뉘앙스는 아주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24년 만에 재회할 때 나온 “와~ 너다” 같은 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주 쉬운 말이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대사는 아닌 것 같아서요.

- 시나리오 중 한국어 대사는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신 건가요, 영어로 쓰신 다음에 바꾸신 건가요? 
저는 두 가지 언어로 다 쓰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한국말도 컨트롤하고 싶고 영어도 컨트롤하고 싶었기 때문에. 두 가지를 같이 써야 돼서 (일반적인 시나리오 작성 프로그램인) 파이널 드래프트를 쓰지 못하고 라이터 듀엣이라는 프로그램을 썼어요.

- 그럼 각본을 우선 한국어나 영어로 다 쓴 다음에 다른 언어로 바꾸신 건가요, 순서가 어떻게 되죠?
영어로 떠오르는 대사는 영어를 먼저 쓰고, 한국말이 더 맞다고 생각이 들면 한국말을 썼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엔딩 씬에서 “그때 보자”라고 하는 대사는 “see you then”이라는 영어가 먼저 왔어요. 그걸 한국어로 바꾼 거죠.

- 이민간 지 24년이 지난 노라의 한국어 대사가 굉장히 현재적이어서 좀 놀랐어요. 예를 들면 ‘미쳤다’, ‘당근’, ‘나, 글쟁이 해’, ‘빡세네’ 이런 말들이요
제가 한국 예능 프로 같은 걸 좀 보는 게 있어서 알게 됐어요.

- 그런데 ‘physically or mentally?’라는 남편의 질문을 노라가 ‘몸적으로 아니면 정신적으로?’라고 해성에게 통역해요. 의도하신 건가요?
왜냐하면 노라는 코리안 아메리칸이고 한국어를 저보다 더 못해요. 그래서 ‘아, 설마 노라가 육체적이라는 단어가 쉽게 나올까’ 생각해서 몸으로 하자,이런 식으로 쓰게 됐던 것 같아요.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른 수준이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좋은 시나리오가 어떻게 더 좋은’(Good to Great) 영화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정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감정을 ‘영화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죠.

주연 그레타 리와 유태오, 그리고 존 마가로는 셀린 송의 한국어 실력 딱 그만큼의 성글고 짧은 대사와 침묵을 표정과 눈빛, 몸짓같은 비언어적인 연기로 채워나갑니다. (유태오는 이 연기로 영국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 후보까지 올랐습니다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서양 관객들과 한국 관객들의 평가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국내외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면, 외국 관객들은 그레타 리나 유태오가 말하는 한국어의 뉘앙스를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될 겁니다)

군더더기 없는 미장센과, 스테디캠을 타듯 감정을 타는 카메라워킹, 코닥 필름의 질감 등은 관객들에게도 그들 자신의 과거와 오늘, 미래까지 소환하게 하는 ‘씨네마틱한’ 힘을 보여줍니다.  

인터뷰하는 셀린 송 감독 / 김태훈

- 해성과 나영이 뉴욕에서 처음으로 재회하는 장면에서 투샷이 아니라 원샷으로 계속 패닝을 하면서 해성과 나영을 보여주잖아요. 이 씬의 비주얼 설계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건 결국 서브젝티브(subjective)한 거라고 생각해요. 카메라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관객도 그렇게 바라볼 수가 있는데, 카메라가 한 명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상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러면 ‘아, 이 사람이 굉장히 그리운 사람을 바라보고 있구나’하는 감정이 생겨요. 그러면 그 그리운 사람을 향해서 카메라가 움직여서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우리는 그리운 감정이 풀려요. 그런데 그 사람을 또 바라보고 있으면 이 사람이 그립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카메라 프레임에 없으니까 또 보고 싶어져요. 그렇게 보고 싶은 마음을 키우는 게 그 씬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이 각본을 직접 연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시나리오에 씬들이 어떻게 찍힐지 자세히 써놓았다고 했는데, 연극인 출신으로서 카메라 워킹 등은 독학하신 건가요? 
독학이기도 하고, 저는 촬영 감독과 미술 감독,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대화에서 답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떻게 찍을지 정확하게 알 때도 있었지만 모를 때도 있었어요. ‘나는 이런 감정이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걸 오픈하면 저희 촬영 감독이 아이디어를 한 대여섯 개를 줘요. 그 중에서 얘기하다 보면 ‘아, 이게 맞다’라는 게 있어요. 재회하는 씬에서 카메라를 움직이는 것도 시나리오에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런 대화에서 나왔던 거예요.

셀린 송 감독은 ‘일물일어( 一物一語)설’의 신봉자처럼 보입니다.

“언제나 정답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찍어야 할지 물어봤을 때 정답은 언제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다른 아이디어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캐스팅 때도 유태오 배우라든지 그레타 리 배우가 나타났을 때 ‘이것 밖에 초이스가 없다’고 항상 느껴졌고, 장소도 한국에서 어린 해성이랑 나영이가 서로 갈라진 씬에 나오는 그 골목길도 바라봤을 때 ‘아, 이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 베를린 영화제 인터뷰 때 ‘형용하기 어려운 걸 표현하는 게 씨네마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대표적인 영화적인 장면은 뭔가요?
노라가 해성과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갈 때가 굉장히 씨네마틱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씨네마가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는데 “패스트 라이브즈”의 미스터리는 ‘세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가 미스터리고 그게 첫 씬이기도 해요. 그래서 이 미스터리를 푸는 것이 이 영화의 메인인데 그 미스터리를 풀면 풀수록 더 이해할 수 없게 돼요. 왜냐하면 해성이와 노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면서 서로 관계가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는데 왜 이 둘은 서로 보면 웃음이 나올까, 근데 그건 대답이 ‘그냥 그러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고 ‘뭐 인연이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고 대답이 깔끔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패스트 라이브즈" 엔딩 씬 중 한 장면 / CJENM

- 노라가 해성을 우버에 태워 공항으로 떠나보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그 씬을 촬영 현장에서는 ‘마이클 베이 모먼트’라고 재밌게 불렀더라고요? (*마이클 베이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액션 블록버스터 감독)
네.(웃음) 저희 촬영 감독과 로케이션 매니저가 밤마다 뉴욕길을 걸어서 찾았는데 거기다 트랙을 150피트(약 46미터)를 깔았어요. 투어리스트가 못 알아볼 정도로 보통인 길이기도 해야하고 굉장히 특별한 길이기도 해야 해서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 그 장면에서 해성을 태우고 갈 우버가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를 감독도 몰랐다는 기사를 봤는데 설마 그랬을까 싶기도 한데, 실제로 그랬나요? 우버 도착 시간도 다 통제하고 있던 것 아닌가요?
우버가 언제 올건지는 제가 정할 거였어요. 그래서 배우들도 모르고 크루들도 몰랐어요. 그런데 사실은 저도 몰랐어요. 왜냐하면 우버가 와야 되는 시간이 ‘너무 너무 길다, 진짜 너무 길다, 이거 언제 끝나나’ 이렇게 느껴져야 되기도 하고, 그래도 결국 우버가 오는 순간에는 ‘10초만 더 줘!’ 이런 감정이어야 돼요.

- 무슨 말인지 알아요
네, 그래서 두 감정이 공존해야 하기 때문에 솔직히 어떤 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어요. (...) 그냥 제 안에 있는 시계가 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바라보다가 내가 딱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부른 거예요. 그래서 배우들이 영화에서 좀 놀라잖아요. 진짜 놀란 거예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배우는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가 제 인생 작품 중 하나가 된다면 그 한 장면이 저한테 인생에 제일 어려운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뭔가 마음에 여한 없이 연기하려고 제가 계속 테이크를 하나 더 달라 더 달라고 했는데 감독님이 원했던 거를 다 얻었다 해서 그냥 저도 마무리했거든요. 기술적으로도 침묵 안에서 모든 걸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제가 머리 속에서 로드맵을 그렸고 그거 연습하면서 심리적으로 다 겪어가면서 제 것만 주관적으로 준비하지 않고 그 순간에 노라한테도 열려 있고 치고 받아야 하는 호흡도 있기 때문에 많은 연습을 해 갔지만, 그 순간에 재즈 음악을 같이 연주하듯이 열려 있어야 되거든요. 그 호흡이, 단순하게 앞으로 바라보다가 우버를 보면서 45각도를 돌려야 되는데 그걸 어색하지 않게 연기하려고 하는 그 긴장도가 어마어마 했었던 것 같아요.

  “패스트 라이브즈”는 작은 독립영화사로 시작해서 지금은 미국의 유명 제작사로 자리잡은 A24와 한국의 CJENM이 합작한 영화입니다. 이런 실력있는 스튜디오들과 일한 건 데뷔작을 찍는 셀린 송에게는 행운이었고 큰 힘이 됐을 겁니다. 게다가 ‘뉴욕 인디 영화의 심장’(셀린 송의 표현)이라는 크리스틴 배션이 이 영화의 프로듀서로 합류했습니다.

셀린 송 감독 왼편이 크리스틴 배션 프로듀서 / AFP·연합

“데뷔작을 찍는 제가 필요했던 건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없는 경험을 채워줄 수 있는 프로듀서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크리스틴 배션도 35년 간 영화를 만드셨는데, 당연히 그분의 영화들은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됐었지만, 프로듀서로서 작품상 노미네이트는 처음이래요. 그래서 그 부분이 감명깊고 굉장히 좋아요.” (크리스틴 배션은 한국팬도 많은 “캐롤”의 프로듀서이기도 했고, “패스트 라이브즈”와 이번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놓고 겨루는 “메이 디셈버”의 프로듀서이기도 합니다)

- 이 영화를 35mm 필름으로 찍었는데 그건 누구의 아이디어였죠? 필름으로 찍으면 제작비도 많이 들텐데요
제작비가 엄청 많이 듭니다.(웃음) 그렇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우선은 촬영 감독이 필름으로 일하는 걸 좋아해서 저한테 얘기를 했고요. 저는 이 이야기 자체가 잡을 수 없는 것들을 만질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필름이 필로소피적으로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렇게 케미칼이나, 만질 수 있게 바꾸는, 현상하는, 현상!(셀린은 이 한국어 단어를 생각해낸 게 스스로도 대견한 듯 한번 더 반복했습니다), 현상하는 과정이 이 영화와 깊게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도 필름으로 찍자고 생각했습니다. 

   셀린 송 감독은 “패스트 라이브즈”로 데뷔하기 전에 연극계에서 극작가로 10년을 일했습니다. 지난 2019년, 실험적 연극으로 유명한 미국 보스턴의 ‘아메리칸 레퍼토리 극장’에 한국 해녀를 소재로 한 “엔들링스(Endlings)”를 올려 호평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연극을 쓸 때 셀린은 실제로 무대에 올릴지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썼다고 보스턴 한인 매체와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창작 환경 속에서 일하던 셀린에게 미국 주류(主流) 쇼비즈니스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준 것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판타지 드라마 시리즈 “시간의 수레바퀴”에 작가로 합류했을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일을 했죠. TV쇼, 판타지 영화, 주류이기 때문에 굉장히 바라는 게 많았어요. 내가 원하는대로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고. 연극은 그럴 수 있거든요. 연극은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쓰는 게 진실이에요. 그런데 TV쇼를 하면서 ‘아, 팬들이 원하는 거, 스튜디오가 원하는 거, 돈을 벌어야 하는 거’에 대해서 배우게 된 계기라고 생각해요. 재미있었어요."

- 그게 제약이나 간섭으로 느껴지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하나,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 
제약이나 간섭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제약과 간섭 안에서 뭔가를 같이 한팀으로 찾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서 리더십을 배웠던 것 같아요. 그게 제가 감독을 할 때 굉장히 도움이 됐던 경험이에요. 

- 그 작업에서는 리더가 아니셨잖아요?
네. 그런데 저의 리더였던 쇼러너(*show-runner. 헤드 작가이자 제작총괄)가 리더십이 뭔지를 보여줬어요. 그 리더십을 보고 제가 리더십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 그 리더십을 한 단어로 간추리실 수 있을까요?
네, (주저없이) 리스판서빌리티(responsibility). 믿음을 주는 거예요, 리더십은. 리더십은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되는 것도 나한테 달려 있고, 잘 안되는 것도 내게 달려 있기 때문에 너는 걱정하지 마라. 나한테 좋은 아이디어든 나쁜 아이디어든 무조건 가져와야지 내가 알아서, 내가 리스판서빌리티. 네.

에필로그.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아주 짧게 흘러 나옵니다. 이 노래가 나왔을 당시 한국에 살긴 했지만 겨우 일곱 살이던 소녀 송하영이 설마 이 노래를 알았을까 싶어서 누가 선곡했냐고 물어봤습니다.

“김광석 노래는 제가 알던 노래인데, 사실 한국 노래들은 다 당연히 부모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 시절에서 듣던 노래들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여서 넣었습니다.”

- 가사와는 상관이 없나요?
가사도 굉장히 상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목부터 노래 자체가 해성이와 나영이의 이야기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너무 아픈 사랑은…’은 ‘서른 즈음에’가 실려있는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인 김광석 4집(1994)에 실려 있는 곡으로, 1996년 1월 김광석이 세상을 등지기 하루 전 어느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부른 노래입니다. 즉, 김광석이 생전에 부른 마지막 곡이죠.

“패스트 라이브즈” 제작사는 이 영화의 OST에 있는 ‘콰이어트 아이스’(Quiet Eyes)라는 노래를 배경으로 영화의 공식 뮤직 비디오를 내놓았습니다. 이 노래도 아카데미 주제가상 부문 예비 후보로 오르기도 했으니 좋은 곡이죠. 

하지만 이 노래보다 훨씬 더 “패스트 라이브즈”에 잘 어울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광석이 활동했던 동물원 2집(1988)의 ‘혜화동’입니다. 

동물원 2집 앨범 커버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로 시작하는 이 노래에서 김광석은 기타를 치고, 코러스를 넣고, 하모니카를 불었습니다. 

저는 유튜브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공식 뮤비 영상을 준비해놓고 음소거한 뒤 다른 기기에 준비해놓은 ‘혜화동’과 동시에 플레이 버튼을 눌러 패스트 라이브즈 ‘혜화동 뮤비’로 만들어 듣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콰이어트 아이스’ 버전보다 훨씬 더 영화 장면들과 잘 붙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디아스포라 영화가 동양과 서양적 정서 사이의 매우 미묘한 공간에 다소 아슬아슬하게 놓여져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꼭 한번 시도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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