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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김민기가 학전을 떠나며 남긴 인사…"그저 모두 다 감사했습니다"

[취향저격] 학전소극장 폐관 결정, 김민기와 한국현대사 (글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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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은 끝까지 학전이었다.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이 오는 3월 15일 문을 닫기로 했다. 한국예술문화위원회의 지원 방안을 거절했다. 1991년 3월 15일 개관 후 꼭 33년 만이다. 학전 운영이 어렵다는 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었다. 적자는 일상이었다. 폐관 소식이 알려진 건 지난해 10월, 김민기 대표의 암 투병 소식과 함께였다. 김민기는 학전이었고, 학전이 김민기였다.

김민기가 물러난 학전은 학전일 수 있을까. 여기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학전에서 나고 자란 많은 대중문화인들이 소식을 듣고 모였다. 의미있는 공간이 사라질 때 으레 붙이기 마련인 ‘살리기’의 취지는 아니었다. 학전에서의 기억을 공유하고, 다시 알리며, 잘 보내드리기 위한… 그런 거였다. 어쨌든 사람도, 기업도, 공간도 종료의 절차를 밟아야 하니까. 

관이 손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지난해 12월 한국문화예술문화위원회가 3월부터 학전 건물주와 임대차 계약을 맺고 민간 위탁 형태로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체성을 계승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의외긴 했다. 역대 보수정권과 김민기의 관계는 영 좋지 않았다. ‘아침이슬’이 세상에 나온 1971년부터 그의 삶에 탄압이 시작됐다. 

1972년 봄, 서울대 신입생 환영 행사에서 김민기는 ‘꽃 피우는 아이'를 비롯해 자신의 노래를 신입생들과 함께 불렀다. ‘우리 승리하리라’로 번안된 미국 프로테스탄트 포크송인 ‘We Shall Overcome’도 있었다. 대학마다 프락치가 있던 시절, 이 소식이 당국에 보고되자마자 김민기는 연행됐다. 그리고 ‘꽃 피우는 아이’가 즉시 금지곡으로 지정됐고 몇 달 전 나온 데뷔 앨범은 전량 회수됐다.

스프 취향저격 학전
‘아침이슬’을 김민기보다 먼저 취입했던 양희은의 음반으로 이 노래는 살아남았다. 1973년에는 건전가요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1975년 유신의 폭주가 시작되며 공연윤리위원회의 데스노트, 즉 금지곡 리스트의 맨 위에 올랐다. 김민기는 입대했고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노래는 트는 것도, 부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김민기는 그렇게 금지된 이름이 됐다. 1978년 4월, 촉망받는 가수이자 MC였던 이수만이 밤무대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가 한국연예협회의 징계 대상에 오를 정도였다. 도처에 프락치와 밀고자가 있었다는 얘기다. 

박정희는 음악의 힘을 잘 알았던 대통령이다. 1980년대까지 아침마다 온 동네에 울려 퍼졌던 ‘새벽종이 울렸네/새 아침이 밝았네’를 기억하는가. 음악 교사 출신이기도 했던 박정희가 작사/작곡한 노래다. 박정희를 상징하는 새마을운동은 ‘새마을노래’로 국민의 뇌에 문신처럼 새겨질 수 있었다. ‘미인’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신중현에게 유신 찬가를 만들어달라고 했다가 거부당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유신은 김민기에게도 그랬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입대한 김민기를 찾아가 비슷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신중현이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듯 김민기는 “군인 가신 오빠는 몸 성하신지/아빠는 씻다 말고 먼 산만 바라보시네”라는 가사가 담긴 ‘식구 생각’이라는 노래를 건넸다. 중정 요원은 “안 되겠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서울시청 앞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경. 출처 : 서울정보소통광장
5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악연은 계속됐다. 경기도 연곡에서 소작농 생활을 하던 1981년, 신군부가 관제 행사 ‘국풍81’에 그를 동원하려 했다. 물론 거절당했다. 1984년 서울로 올라와 어린이극을 만들었다. 김민기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었다. 그 해 김민기가 기획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앨범 기획자는 김민기가 아닌 ‘민기형’이었다. LA올림픽 탈락선수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엔 양희은이 부른 ‘봉우리’가 쓰였다. 작사/작곡자 없이 발표됐다. 양희은의 1985년 앨범에도 이 노래는 양희은 작사/작곡으로 표기됐다. 그리고 1987년 6월, ‘아침이슬’을 서울시청 앞에 모인 100만 시민들이 합창하며 5공화국이 끝났다.

노태우 정권이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과거의 금지곡들을 해제하는 거였다. 유신 때 금지곡 리스트에 ‘아침이슬’이 가장 먼저 나왔듯, 이번에도 ‘아침이슬 해금'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비록 김민기의 과거는 해금됐어도 그의 창작 활동을, 검열은 가위를 들고 따라다녔다. 탄광촌 아이들이 화자인 <아빠 얼굴 예쁘네요>는 난도질당해 대본과 다른 모습이 됐다. <개똥이>도 그랬다. 1975년 탄생한 음반사전심의제도는 1996년 위헌 판결을 받고서야 6월에 사라졌다. 이 제도는 마지막까지 김민기를 괴롭혔다. 그 해 상반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음반으로 내려 했을 때, 절반 이상을 잘라냈다. 이미 1991년부터 학전 소극장에서 잘만 상영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끝까지 블랙 코미디였다. 

'아침이슬' 수록된 김민기 1집 / 출처 : 연합뉴스
이후로도 김민기의 노래는 한국 사회의 무의식으로부터 소환됐고 또한 불렸다. IMF 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상록수’가 있었다. 세월호 때 ‘금관의 예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아침이슬’이 광장에서 불릴 일이 없으리라 믿었던 2016년에 결국 불렸다. 5공화국의 끝과 박근혜 정권의 끝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그러니 현 정권에서 학전의 맥을 잇겠다 나선 게 의외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제 김민기는 진보와 보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존재가 됐다는 걸 상징하기도 한다. 진보 계열 정권일 때도 그의 음악이 불렸을 뿐 그가 정권에 동참하거나 자리에 앉은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시민단체나 운동권 출신들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그를 고위직에 쓰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제안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성정을 알기에. 그리고 그가 1991년부터 오직 학전을 지켰던 것을 알기에. 가수, 싱어송라이터, 사회운동가 같은 단어보다 그에게 오래 붙은 직함은 학전 대표였다. 그가 인터뷰에 응하거나 발언을 할 때는 대부분 학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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