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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집도 혹시 몰라요"…내 등기부등본도 불안해졌다 [취재파일]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분양업자로부터 땅을 사, 집을 짓고, 등기까지 나 있는 집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생겼다는 겁니다. 주민들이 꺼내놓는 멀쩡한 등기부등본을 보며, 등기 제도가 설마 그 정도로 무력할까 의심했습니다. 취재를 마친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기사 참고
"10년째 내 집인데 느닷없이 쫓겨날 판"…무슨 땅이길래

종중 (배성재 취파 리사이징)

종중이 잘못했으니, 종중에게 돌려줘라?

시간을 2013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경주 김 씨의 한 종중은 소유 중이던 토지를 한 건설업체에 39억여 원에 팝니다. 토지 매각을 주도한 건 그로부터 2년 전인 2011년 해임됐음에도 종중 회장 노릇을 하던 김 모 씨였습니다.

추후 드러난 사실이었지만, 건설업체가 종중에 실제 지급한 돈은 계약금 3억 5천만 원과 '용역수수료채권' 29억 5천만 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3억 5천만 원은 김 씨가 대부분 개인적으로 사용했고, 29억 5천만 원에 달하는 용역수수료채권은 종중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이후 여러 번 전매를 거친 해당 토지에는 2014년부터 주택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둘씩 입주하기 시작해 모두 48세대 주택이 들어섰습니다. 거래도 자유롭게 이뤄졌습니다. 처음부터 분양받아 10년째 거주 중인 이, 매매를 통해 입주한 이가 섞여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1년. 그 사이 전 종중 회장인 김 씨는 종중 재산 횡령 등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갑자기 종중은 "땅이 김 씨에 의해 2013년 불법 매각됐다"며 48세대 주민 등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말소등기청구소송을 제기합니다. 이때부터 땅 위의 집들은 모두 가처분 대상에 올랐고, 주민들은 거래는커녕 주택담보대출도 받기 힘들어졌습니다.

2023년 11월,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종중의 주장에 손을 들어줍니다. "2013년 이루어진 종중과 건설회사 간의 매매 계약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고, 이후 이뤄진 이전등기 역시 모두 무효"라는 이유였습니다.

주민들은 종중이 맺은 계약으로 인해 땅과 집을 송두리째 빼앗길 판입니다. "종중이 잘못했으니 종중에게 땅을 돌려주라는 판결"이라며 반발하고 나선 건 당연합니다.
 

종중만 만나면 이상해지는 법원 판결

대법원

재판부가 종중의 손을 들어준 근거는 2000년 대법원 판결에 있습니다.

2000년 대법원은 "종중 소유 재산은 종중원의 공동소유에 속함으로, 그 관리 및 처분에 관해 종종 규약과 종중 총회 등 적절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종중 대표자와 부동산을 매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면 무효"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 대법원 2000. 10. 27. 선고 2000다22881 판결). 이후 하위 법원들은 대법원 판단에 따라 종중 재산 처분에 있어 종중 규약과 총회에 무게를 둔 판결을 이어왔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법제가 '절대적 무효화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절대적 무효화 원칙 아래에서는 한 거래에 문제가 있을 때 그 뒤에 있는 모든 거래를 부정합니다. 즉 종중 재산 처분을 무효로 하는 판단이 나오면, 이후 이어온 모든 거래까지 무효가 되는 겁니다. 거래 상대방의 대리권 여부에 상관없이 선의의 제삼자를 보호하는 민법 제129조도 여기에선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대법원이 종중 등 '비법인 사단'에 다소 관대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비법인 사단이란 사단법인의 실체를 이루고 있지만 법인격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단을 일컫습니다. 대표적으로 종중, 종교 단체 등이 있습니다.

내부 규약만 있으면 그 존재가 인정되고 있는데, 그 대표도,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누군지도, 명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종중의 규약·총회를 따라야지만 부동산 거래가 유효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법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종중 땅을 사려는 사람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땅을 팔기로 한 종중 총회가 유효한 것인지, 선임된 대표가 적법한 대표자인지, 대표권이 사라지진 않았는지 파악해야 하는데,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죠. 이대로라면 언제든 종중이 "총회에 문제가 있었다"라며 문제를 제기하면, 소유권을 잃을 처지에 놓일 수 있는 겁니다.

종중 (배성재 취파 리사이징)

선의로 맺어진 거래, 국가가 끝까지 보호하려면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선의로 맺어진 거래만큼은 국가가 끝까지 보호하면 됩니다. 등기의 신뢰도와 직결되는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 만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등기부는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나라가 등기를 낼 때 '형식적 심사주의'를 채택 중인 탓입니다. 쉽게 말해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기만 하면, 그 서류의 진위는 따지지 않고 일단 등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일례로 우리는 일반적인 부동산 거래에서 등기를 할 때 법무사가 한 명만 자리합니다. 법무사 한 명이 매수인과 매도인을 쌍방대리하며 거래를 마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죠. 독일이나 일본 등이 매수인과 매도인 각자의 법무사가 자리해, 제출된 서류의 진위를 따져보며 거래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등기 심사 방식을 바꿔 등기 공신력을 높이자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2022년 대한법무사협회는 "국민들의 억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등기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며 "등기관의 실질적 심사권 부여, 자격자대리인의 본인 확인 절차 강화 등 조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등기 공신력만 높아질 수 있다면, 이미 맺어진 선의의 거래를 보호하고, '절대적 무효화의 원칙'보다는 '상대적 무효화의 원칙'을 앞세울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주택단지 주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매도인에 대한 매매대금반환청구소송'입니다. 각자 직전 매도인에게 소송을 걸어 매매 대금이라도 돌려받자는 취지입니다. 직전 매도인에게 재산이 없다면 그전 매도인에 대해 '매매대금반환청구권'을 대신해서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꼬리를 물고 송사가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 동안 집이 가처분 대상에 오르고, 거래도 못 하고, 주택담보대출도 받지 못하는 등의 피해는 온전히 주민들이 감내해야 할 처지입니다.

취재 중 만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종중 땅 거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사려는 땅이 종중과 연관이 있었던 땅인지를 알아보고 각자 거래를 조심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현실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과연 해당 주택단지 주민들만의 일일까요? "기자님 집 등기부등본도 다시 살펴보시라"는 주민들의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예삿말로 들리진 않았습니다. 이번 사건의 조속한 해결과 함께, 안정적인 등기 제도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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