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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아청소년과 수련을 포기하는 이유는…"

"제가 소아청소년과 수련을 포기하는 이유는…"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준비하던 20대 인턴이 이번 주 전공의 대규모 사직을 앞두고 SBS에 입장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이달 말 인턴 과정을 마친 뒤, 다음 달부터 5대 대형병원 중 한 곳에서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할 예정이었던 예비 레지던트지만,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수련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사명감에 필수과 의사를 선택했음에도, 고민 끝에 꿈을 접은 이유를 알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의사들의 반발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대응과 비판적인 여론이 두렵지만, 그럼에도 의료현장의 현실을 설명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입장문 전문을 공개합니다.

ㅡㅡㅡ

안녕하십니까.

저는 2024년도 Big5 병원 소아청소년과 모집에 합격한 예비 전공의입니다.

하지만 저는 긴 고민 끝에 현실을 인정하고 소중했던 꿈, 소아청소년과 수련을 포기하고자 합니다.

이는 정치적인 행동이나 집단행동을 표명하는 것이 아닌,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저 3월부터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 근무하는 사실에 설레며 인턴 근무 중 틈틈이 소아청소년과 교과서를 읽던, 열정적이던 젊은 의사가 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아청소년과 지원율이 급감하던 2021년도, 저는 첫 병원실습으로 소아청소년과를 접하며, 힘든 시기임에도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꿈의 원동력은 사명감이었습니다.

저렇게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고, 그런 인생이라면 그 어떤 위험하고 힘든 길이라도 버틸 자신이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현실적으로 정말 상황이 안 좋다", "네 성적에는 아깝지 않느냐"라며 말렸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 걸어 다니는 작은 아이를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며 행복해지는 저를 보며,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저의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의대생활 및 인턴생활을 통해 직접 보고 느끼며,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의 미래는 무서웠습니다.

'낮은 수가'라는 경제적인 문제와 '소송 리스크'라는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사태가 심각한 만큼, 국가에서 이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현재의 어둡고도 중대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줄 거라 희망을 잃지 않고, 저는 한 명의 의사로서 묵묵히 저의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근본적인 문제'들은 외면한 채 의대 정원 증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라는 허울뿐인 해결책이 제시되었습니다.

저의 간절한 기대는 결국 스러지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동네마다 소아청소년과가 부족해 '소아과 오픈런'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2020년까지만 해도 소아청소년과는 미달 되지 않았고, 그 이전에는 꽤 경쟁이었습니다.

인기는 왜 갑자기 떨어졌고, 우리는 왜 소아과의사를 만나기가 갑자기 이렇게나 힘들어졌을까요? 지난 5년 동안 660개 소아과가 문을 닫았습니다.

10년 이상을 공부한 전문가들이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포기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특수성으로 검사보다 '진찰 중심의 의료'가 필요하나, 낮은 수가로 인해 이를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때문에 '소아과 진찰료 수가 상승'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되었으나 정작 필수의료를 위한다는 정책에서 제대로 의논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일본은 소아 진찰료가 약 6만 원 수준에 달하며, 심지어 미국의 경우 약 27만 원, 호주는 약 29만 원에 육박하나 우리나라는 최대 2만 2천 원가량입니다.

소아는 성인에 비해 시시각각 상태가 변하여 소송위험이 큽니다.

거기에 소송 패소의 전례가 많고, 만일 패소 시 10-20억을 배상해야 합니다.

한순간에 10대부터 30대까지 노력한 모든 게 날아가고 빚만 생기게 되는데, 이를 사명감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 누가 감당하며 강요할 수 있을까요.

정부는 '낙수 효과'를 부르짖으며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늘리려면 전체 의대 정원 및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소아과 오픈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의사 수의 부족>이 아니라, 이 힘든 환경 속에서 자의로, 또는 타의로 소아청소년과를 폐업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이미 소아과 진료를 볼 수 있는 의사들은 많으며, 이들이 소아과 진료를 포기하게 되는 현실을 개선하여 이들이 다시 본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의사 정원이 늘어나도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소아과를 선택하는 사람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잃지 않고 현실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낙수 효과", 윗물에서 넘쳐흘러 떨어진 물로 아랫물이 채워진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정말 그저 윗물에 머물지 못해, 넘쳐흘러 떨어진 "낙수 의사"란 말입니까? 이러한 주장은 소아청소년과라는 학문과 소아청소년과 의사 전체에 대한 모독입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여전히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꿈꾸고 선택하는 의사들의 노력을 의미 없게 만들고, 꿈을 포기하게 하는 모욕입니다.

지금 이 순간 사명감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 꿈을 꾸고자 하는 사람들마저 소아 진료현장을 떠난다면, 장기적으로 소아 의료의 질이 저하될 것을 어째서 정부는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저희가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이 '밥그릇 싸움'이라고 치부되는 세상에서, 특히 저의 꿈이었던 소아청소년과 수련을 '낙수' 되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유약한 저는 소아과 수련을 선택하고 버틸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하루하루 세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의사로서의 자부심은 허탈함과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최저 시급을 받으며, 근무로 명절 때마다 가족과 보내지 못했던, 주2~3회씩 36시간 연속근무로 한숨도 자지도 쉬지도 못했던, 너무 바빠 2일 동안 라면 한 끼로 겨우 식사했던, 저의 젊음이었자 청춘이었던 26살의 1년이, 누군가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현실 속에서, 저의 의사로서의 사명감은 그 의미를 잃었습니다.

아무 정치색도 정치활동 경력도 없는, 27살 사회초년생인 저는, 언론에 나서는 것도, 익명의 누군가에게 공격당할 것도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누군가는 사명감이 없다며 영영 돌아오지 마라, 의사 면허를 취소시키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이라면, 레지던트 3년 동안 최저 시급을 받으며, 주말 연휴 없이 주 80시간 근무하는 삶, 전문의가 되어서는 법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20여 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삶을, 선뜻 권할 수 있는지 여쭈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그 환경을 '사명감' 하나만으로 버틸 수 있을지 여쭙니다.

일생 대부분을 차지했던 학업, 그리고 평생을 업으로 몸바쳐 일하고 싶었던 소아청소년과 의사라는 꿈을 내려놓고, 다른 길을 고려하게 된 저의 심정은 너무나도 참담합니다.

주변의 반대에도 소아의료라는 빛나는 꿈을 꾸었던 소아청소년과 예비 전공의로서 몰려오는 우울감과 실망감을 감당하기 힘듭니다.

정말로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고 생각하신다면,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면, 소아청소년과 의료진들의 어려움을 바라봐주십시오.

<의대 정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라는 이슈로 소아청소년과 의료진의 목을 조이고 있는 '낮은 수가'라는 경제적인 문제와 '소송 리스크'라는 법적인 문제라는 <근본>을 제발 잊지 말아 주십시오.

소아청소년과 의료진들이 의학적 근거에 따라 오직 환자를 위한 진료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꿈을 응원해주고 빛나는 미래를 함께 그려주셨던 너무나 자랑스러운, 중환의 바다, 본원 소아청소년과 의국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과 다시 한번 죄송한 마음을 전달드립니다.

비록 차가운 현실 앞에서 힘겹게 부여잡고 있던 제 꿈은 손에서 흩어졌지만, 언젠간 유약한 저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만큼, 마음 편히 아이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희망합니다.

그날에 아이들의 울음과 웃음, 행복한 삶을 지켜보며, 다가오는 질병과 죽음에 맞서며 소신껏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개인적인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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