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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③ '피해 금액 25조' 조직적인 인력 · 기술 빼내기…처벌은 '솜방망이'

지난 5년간 기술 유출 피의자 실형 선고율 '5.8%'

SBS 시민사회부 취재팀은 기술코드명 '볼츠만·파스칼'로 불리는 삼성전자 D램 핵심 공정 설계와 기술도 유출 의혹을 비롯해 기술 노하우를 가진 엔지니어 인력이 유출되고 있는 실태와 그 배후 세력의 실체를 추적했습니다. 8뉴스에 이어 [취재파일]을 통해 총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해 보도해 드리겠습니다.

앞서 두 편의 취재파일을 통해 설명했듯이 이번 사건의 핵심은 정부 기관 고위 공무원, 반도체학과 교수, 전 삼성 임원 등이 연루된 이른바 '기술인력 유출 카르텔'이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왜 이런 기술 유출이 반복되는지, 구조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짚어보겠습니다.

"18나노급 D램 '파스칼'도 빼돌렸다"…구속영장은 기각

지난 16일, 삼성전자의 20나노급 D램 공정 기술 '볼츠만'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전 삼성전자 수석연구원, 현 청두가오전 임원 A 씨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이 열렸습니다. 경찰은 이 자리에서 A 씨가 볼츠만보다 한 단계 발전한 18나노급 D램 공정 기술, 코드네임 '파스칼'의 공정 설계 자료 일부를 훔친 정황 자료도 제출했습니다.

'프로세스 레시피'라고도 불리는 공정 설계 자료란 반도체를 생산하는 700개가 넘는 공정에 각각 입력해야 할 수십 자리의 영어와 암호로 된 정보값이 적혀 있는 엑셀 파일입니다. 전문가들은 "공정 설계 자료만 있다면, 이를 토대로 공정 기술도를 만들어 반도체 생산에 돌입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합니다.

A 씨는 "삼성전자에서 빼돌린 게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활용해 자료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는데, 경찰 관계자는 "700개가 넘는 수십 자리의 암호를 암기해 자료를 만들어냈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습니다. 또 "청두가오전이 생산한 20나노급 반도체에서 실제로 18나노급 기술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A 씨가 별다른 범죄 전력이 없고 방어권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수사 기관들은 기술 유출 사건의 경우 피의자들이 서로 진술을 짜 맞춰 증거를 함께 인멸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구속영장이 계속 기각되고 있다고 우려합니다. 실제로 지난해 삼성디스플레이 주요 협력사가 중국 업체로부터 500억 원을 받고 수년에 걸쳐 LCD 생산관리시스템을 빼돌려 넘긴 사건에서도 법원은 구속 영장을 기각했습니다.

'기술 유출' 피해 6년간 25조 원…실형 선고율은 '5.8%'

- 해외 기술유출 적발 건수 -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사건 재판 현황

기술 유출 피해는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국가정보원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8년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약 6년 동안 적발된 산업기술 국외 유출은 116건, 매년 스무 건씩 유출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가운데 3분의 1 수준인 39건이 반도체 분야의 기술 유출이었습니다.

특히 심각한 건 유출된 전체 기술 가운데 32.7%인 38건은 유출 시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 핵심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6년 동안 10건의 국가 핵심 기술이 유출된 걸로 파악됐습니다. 이로 인한 전체 피해 규모는 25조 원이 넘는 걸로 추산됩니다.

- 해외 기술유출 적발 건수 -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사건 재판 현황
하지만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입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기술 유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모두 155명, 이 가운데 29명은 무죄, 36명은 집행유예였습니다.

그럼 실형을 받은 사람은 단 9명, 비율로는 5.8%에 불과합니다. 기술 유출의 피해 규모에 비해 양형기준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석좌교수는 "미국 같은 다른 선진국의 사례를 살펴서 처벌을 강화하고 억제력을 만들지 않으면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4년간 중국 다녀왔더니 회사에 자리가 없어졌대요."

그렇다고 처벌 강화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SBS 취재진은 이번 인력유출 사건 관계자 중 한 명인 헤드헌팅 업체 대표 E 씨를 만났습니다. 20년 가까이 헤드헌터로 일했다는 E 씨는 현재 반도체 업계는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자신이 접촉했던 대기업 직원들의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청두가오전에서 지정한 국내 반도체 대기업의 시니어급 직원을 만났는데, 이 분은 회사 지시로 중국 공장에서 4년간 일하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자리가 없어졌으니 일반 팀원으로 일하라는 거예요. 나이도 50이 다 됐는데 이제 갈 수 있는 곳이 중국밖에 없는 거죠."

"주니어급 직원들은 자신이 기업에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중국에서 최소 3배의 연봉을 약속하니까 아예 제 발로 찾아와서 제발 중국에 가게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인력 빼내기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기업들은 거대 자본을 동원해 연봉 인상, 자녀 국제학교 교육비, 주거비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니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기술 유출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다행히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어제(18일) 국가 핵심기술을 국외로 빼돌리는 경우 최대 징역 18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형량을 강화하고,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초범이라는 점을 주요 참작 사유에서 제외하는 등 판사가 징역형의 집행을 쉽게 유예하지 못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명백한 범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내려지길 기대합니다.

반대로 기술 인력들에 대한 처우 개선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쪽에서는 연봉을 6배 올려주겠다고 유혹하는데 "국가 안보가 걱정되니 남아 있으라"는 말만으로 이직을 막을 수 있을까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사명감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이들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인이 뭔지를 고민해 봐야 하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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