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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음악감독 정재일 콘서트에 울려 퍼진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커튼콜+] 3월 폐관 앞둔 대학로 소극장 학전 이야기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의 한 아이 울고 서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의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의 한 아이 우뚝 서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아름다운 사람.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객석은 술렁였습니다. 담담하고 따뜻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민기. 하지만 무대 위에 김민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샘플링한 김민기의 목소리에 따라 정재일이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연주했습니다.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정재일 콘서트의 한 장면입니다.

정재일 단독 콘서트 (세종문화회관 제공)

'기생충'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으로 잘 알려진 정재일은 지난해 영국의 유명 클래식 음반사 데카(Decca)에서 앨범 '리슨(Listen)을 발표했고, 지난해 10월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명문 오케스트라인 런던 심포니와 협연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런던 관객들이 기립했던 그 공연과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꾸며졌습니다.

이 날 공연은 '기생충' '오징어게임' OST는 물론이고, 정재일의 피아노 곡, 국악 연주자들과 함께 한 곡들까지, 전방위 음악가로서 정재일의 면모를 유감없이 담았는데요. 공연의 앙코르이자 하이라이트는 바로 김민기의 목소리와 함께 한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김민기 목소리 정재일 반주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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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은 김민기가 1971년에 쓴 곡으로, 김민기 1집에 실렸습니다. 김민기가 다녔던 서울대 미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현경와 영애'가 처음으로 불렀고 이들의 1974년 앨범에도 실려 있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가수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입니다. 노랫말과 선율이 서정적이고 따뜻한데, 그 시대의 아픔이 넌지시 담겨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어두운 비'(혹은 어두운 현실)를 직시하며 슬퍼하고, 세찬 바람도 '더운 가슴으로' 맞으며 나아가고, 눈 내린 산을 올라 우뚝 서는 아이. 청년 김민기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들은 이 노래는 김민기의 암 투병, 학전의 폐관 예정 소식까지 전해진 터라 더욱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민기는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정재일의 공연을 보기 위해 투병 중에 쉽지 않은 외출을 한 겁니다. 조용히 다녀가서 알아본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저는 공연장 로비로 나서다가 안면 있는 학전의 식구와 마주친 덕분에, 그를 따라가서 김민기와 잠시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배우 오디션을 취재하며 그와 인터뷰한 적이 있으니, 4년여 만의 만남이었죠. ▶ 2019년 당시 8뉴스 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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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그는 지팡이를 짚었고 안색이 안 좋아 보였지만, 낮고 친근한 목소리와 너털웃음은 여전했습니다. 공연을 마치자마자 김민기에게 인사하러 온 정재일은 다소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선생님 목소리 허락 안 받고 썼어요' 하며 웃었고, 김민기는 "그거 무단도용이야! 응?" 하고 장난스러운 어조로 응수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재일이 김민기를 얼마나 존경하고 신뢰하는지, 김민기가 정재일을 얼마나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엔 정재일과 '긱스'에서 같이 활동했던 가수 이적도 찾아와 인사를 나눴습니다.

정재일과 김민기, 그리고 학전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 음반(2004)

김민기와 정재일의 인연은 오래됐습니다. 김민기는 아들뻘 정재일에게 자신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1978)'을 마음대로 다시 만들어보라고 맡겼고, 26년 만에 정재일의 감각으로 다시 해석한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 음반(2004)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정재일은 김민기가 이끄는 학전에서 여러 공연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했고 학전 라이브 밴드에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오래전 학전에서 '못 다루는 악기가 없고, 작곡 편곡까지 잘하는 천재 소년' 정재일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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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프로그램 '너의 노래는' 캡쳐

정재일은 김민기가 자신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2000년대 초 '긱스' 시절, 이적이 들려줬던 김민기의 '백구'에 '벼락 맞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정재일은 음악을 멋지고 심오하고 장대하게 하는 데 심취해 있었는데, 김민기의 음악은 '기타 하나 목소리 하나로 100명의 오케스트라를 뛰어넘는 감동'을 줬다는 겁니다. (*2019년 정재일은 JTBC프로그램 '너의 노래는'에서 이적과 함께 김민기와 그의 음악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

제가 공연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사람'도 그랬습니다. 정재일의 기타 하나(원래 곡에 있었던 김민기의 기타 연주와 똑같이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김민기의 목소리 하나로 100명의 오케스트라를 뛰어넘는 감동을 줬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김민기가 곧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민기는 '아름다운 사람'이 오늘 최고의 무대였다고 얘기한 저에게 '학전만 좋아하는 편파 기자'라고 농담을 던지고 떠났습니다. 제가 학전'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학전이 저에게도 특별한 곳인 건 사실입니다. 저에게 학전은 곧 김민기였습니다. 문화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1998년 가을, 학전은 제가 대학로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었습니다. 때론 취재기자로, 때론 관객으로 오랫동안 드나들면서 학전과 연관된 추억이 저에게도 많습니다.

황정민 조승우.... 수많은 스타 배출한 학전의 폐관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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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은 '아침이슬', '상록수' 등으로 7, 80년대 청년문화, 저항문화의 상징이 된 김민기가 1991년 대학로에 연 소극장이자 극단 이름입니다. '학전'은 '배움의 밭(學田)'이라는 뜻이죠. 그 이름처럼 학전은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리는 황정민 김윤석 설경구 장현성 조승우를 비롯해 방은진 배해선 이정은 등 수많은 스타 배우들을 길러냈습니다. 이곳에서 1000회 공연을 한 고 김광석, 그리고 윤도현 나윤선 같은 가수들도 빼놓을 수 없고요. 김민기는 김광석기념사업회 회장이기도 한데, 매년 학전에서는 김광석의 기일인 1월 6일에 '김광석 노래 부르기' 행사가 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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