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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사랑을 아는 우리들에게 《선명한 사랑》 [북적북적]

마침내 사랑을 아는 우리들에게 《선명한 사랑》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404: 마침내 사랑을 아는 우리들에게 《선명한 사랑》
 
그랬던 내가 지금은 사람을 사랑한다. 내 마음이 사랑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수만 가지 마음을 겪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제게는 올해 마지막 [북적북적] 녹음이었습니다. 이번주의 책을 선택할 때까지는 미처 몰랐는데, 올해를 접는 낭독에 어울리는 한 권을 들고 왔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늦가을로 접어들던 지난 11월 10일 출간된 산문집 [선명한 사랑]입니다. 고수리 작가가 썼습니다. 제목부터 선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삶,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쓰고 있는 책입니다. 고수리 작가가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 [관계의 재발견]에 실렸던 글들을 고쳐쓰고 다듬어 펴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에둘러 이야기하는 책들은 많이 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진심과 정성을 다해 정면으로 말하고자 하는 자세의 책을 저는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조금만 삐끗해도 그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운 ‘정공법’을 택해서 사랑에 대해 써 내려간 이 글들이 읽는 이의 마음에도 온기를 머금고 깊숙하게 스며듭니다.  
 
“수리야. 사람을 사랑해라.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 세상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지푸라기조차 안 잡히는 사람도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봐야 할지 몰라 안간힘을 쓰는데도, 지푸라기 하나 못 잡아 우는 삶도 있다. 그렇게 안 살아본 사람은 하나도 모른다. 하나도 몰라도 애써 아는 척 이해하는 척일랑 그런 때 필요한 거야. 사람 앞에 겸허해라.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 사람을 사랑해라.” 
진눈깨비 내리던 겨울, 거리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작가의 말 ‘사랑이라는 걸 선명히 알아’ 中) 
 
나는 그냥 너희랑 올려다보는 하늘을 가장 좋아해. 서안지안하늘색이라고 말하면 너무 싱거울까.그런데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이란 너무나 단순하고 깨끗해서, 나는 그저 너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좋아해.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좋아해. 우리는 매일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고 느꼈어. 아름다운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그렇게 우리는 ‘순간’이라는 시간을 함께 배웠던 것 같아.  
매일 너희를 데리러 갈 때 나는 조그만 사탕을 주머니에 챙겨 가. 만날 때마다 달콤하고 귀여운 걸 하나씩 꺼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거든. 하루는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부스럭 소리가 나자 너희가 “사탕!”하고 동시에 소리치는 거야.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것도 없어” 그랬지. 
그러니까 지안이 “아니야. 아무것도 있어”라 말하더라,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무것도 있는 그 순간이 쿵.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지’ 中) 

이 책 곳곳에 실린 단서들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고수리 작가가 쌍둥이 아이들을 둔 30대 후반의 엄마이고, 그 자신 역시 단단한 사랑을 가르쳐준 엄마, 이모들, 할머니, 동생을 둔 딸, 조카, 손녀, 누나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왠지 이 책에는 아껴둔 것 같지만, 굳이 자주 언급하지 않았어도 든든한 동반자가 옆에 있구나 느껴지는 남편의 아내이자 친구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대사, 자주 듣게 되잖아요. “엄마, 아내, 딸 아닌 나! 나는 어디 있는 거야!” 같은 표현 말입니다. 그런데 [선명한 사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과 관계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실은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한 의도가 거기 껴 있지 않다면, 정성을 다해 서로 똑바로 사랑하고 관계 맺고 있다면, 엄마든 아내든 딸이든 누나든 그 어떤 역할도 ‘나’라든가 ‘한 사람의 인간’이라든가 ‘작가’라는 정체성을 해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분리돼서 이야기될 수 없는 게 실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고수리 작가의 글에서 그가 어디서부터 작가이고, 어디까지는 쌍둥이 엄마인지 나누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인간 고수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향해 정성을 다해 나아가는 삶을 글로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탕을 물고 뛰어가는 너희들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동시에 모든 순간이 그리워졌어. 너무 행복해서 울 것 같은 마음으로 너희가 주워 온 꽃잎이나 은행잎 같은 것들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왔어. 바스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너희가 잠들었을 때 좋아하는 책 사이에 끼워두었단다. 어떤 책인지는 나만 알고 있어. 
서안 지안. 
순간을 간직하는 법은 모르지만, 순간을 그리워하지 않는 법도 모르지만, 나는 아마도 오랫동안 시계를 보지 않을 것 같아. 너희와 함께 보내는 날들은 천 개쯤 다르고 천 개쯤 아름다워서, 꽉 껴안고 만지고 부비고 뒹굴고 간질이고 웃고 소리치면서 누리기에도 모자라니까. 지금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끄럽게 즐겁게 지내다가, 다음 가을이 오면 같이 책장을 펼쳐보자.  
거기에, 아무것도 있을 거야. 
우리의 순간이었던 그 어떤 것이.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지’ 中) 

[선명한 사랑]에는 기본적으로 조금만 툭! 건드려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은 습기가 배어있습니다. 고수리 작가는 선명하게 사랑을 압니다. 사랑이 아닌 것들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국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외국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죠. 사랑이 아닌 많은 것들 사이를 지나왔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또박또박 정면으로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어떤 대목에서도 고수리 작가가 겪어야 했던, 사랑을 훼손하려 한 인생의 시간들에 대해 길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크고 작게 사랑의 훼손을 경험해 본 독자들은 책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사랑이 아니었던 것들의 편린들을 맞닥뜨리며 ‘이심전심’ 이해해 가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만져지지도 않지만, 내가 아는 사랑이란 이런 것.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잘 자라고 이불을 덮어주는 마음. 짙은 어둠도 이불처럼 같이 덮자는 위로와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기도 같은 것. 나도 가족들 곁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이런 마음으로 쓰고 엮은 글들이 여기 담겨 있다.

(‘사랑이라는 걸 선명히 알아’ 中) 

괜찮을까요. 저는 오늘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여기 실린 산문 중의 한 대목에서 고수리 작가는 자신이 열일곱 살 때 자신의 아버지가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던 말을 전해 놓았습니다. 작가의 아버지는 "열심히 살아봐. 그래 봤자 너는 뭘 해도 망할 거야."라고 웃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공부도 연애도 결혼도 다 망할 거야. 아무 것도 못해, 너는." 이라고요. 차분하게.  

사실 말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열일곱 살 짜리 자신의 딸을 이 같은 말로 저주하고 떠나는 아버지의 딸로 시작하는 인생이 어떤 것이었을지, 어떤 시작과 전개였을지, 제가 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고 아주 모른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랑을 선명히 아는 사람이 쓴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따위 저주는 꼭, 비듬이나 뜯어져 나간 입술 껍질처럼 무력하고 또 무기력한 것이로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수리 작가가 이듬해의 지안과 서안에게 펼쳐 보여줄 책장 사이 꽃잎이 이미 바스라져 있다고 해도, 그곳에는 ‘아무것도 있을’ 것과 달리 말입니다. 사랑을 알 뿐 아니라 그 앎을 이렇게 글로 세상에 나눠줄 작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사랑이 종국에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들을 이긴다는 걸 증명합니다. 고수리 작가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고, 아마도 제게, 우리에게 똑바로 다시 한 번 들려주고 싶은 것 같습니다. 
 
깨끗한 기쁨에는 소리가 난다. 참을 수 없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웃음은 손뼉 같은 것. 짝! 마주 부딪쳐야만 소리가 났다. 오목한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서 팡팡 움직여볼 때야 일어나는 소리처럼, 눈과 입과 볼을 움직여 동그란 곡선을 활짝 펼치면서 웃는다. 그걸 보고 마주 웃어주는 것. 그래야만 손뼉을 짝짝! 마주치는 것 같은 기쁨이 일어났다. 웃음은 일인분의 일이 아니었다는 걸, 마스크 너머의 표정을 가늠할 수 없기에 마주 웃을 수 없는 날들이 오래 되고 알았다.

(‘기쁜 우리 겨울날’ 中) 

[선명한 사랑]은 늙어가는 엄마와 이모, 시아버지, 시어머니, 그리고 무럭무럭 커갈 아이들 그 누구도, 그 어떤 소중함도, 사랑도 머물러만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더더욱 매 순간을 벅차게 사로잡고 사로잡힐 줄 아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사랑을 아는, 알아가고 있는, 알고 싶은 모든 분들과 함께 읽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올해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년에도 좀더 사랑을 품고, 함께 책을 읽고 싶습니다.  
 
*유유히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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