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沒入)
1. 명사. 깊이 파고들거나 빠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몰입'의 정의입니다. 뭔가를 깊이 파고들거나 어딘가에 심각하게 빠져본 경험, 있나요? 저는 한때 1인칭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에 깊게 빠져본 적이 있습니다. 이국의 적을 몰살하는 방식으로, 게임의 설계자가 제게 부여한 '성스러운' 미션을 클리어하면서 환희를 느끼는 악취미에 한동안 지독히도 빠져있었지요. 그 중독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저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난데없이 웬 게임 이야기냐고요. 음악계에 불어닥치는 몰입형 콘텐츠 바람에 대해 오늘은 말해보고자 해서입니다. 요즘 참 놀거리, 즐길 거리 많은 세상이죠? OTT만 켜면 수천, 수만 건의 콘텐츠가 펄럭여 고르다 제풀에 지치기 일쑤. 얼마 전만 해도 20, 30분짜리 유튜브 콘텐츠나마 진득이 봤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 켜자마자 다짜고짜 쇼트폼부터 엄지로 올리며 훑기 바쁘니 30분, 1시간을 봐도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가슴에 남는 것도 어쩐지 없는 것 같고요.
이러한 자극의 대홍수 시대에 음악 콘텐츠도 더한 몰입감을 선사하기 위해 경쟁하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6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 갔습니다. 재즈 피아니스트 윤석철 씨의 공연을 보러요. 그런데 이 공연, 조금 남달랐습니다.
6일부터 17일까지 윤석철, 박새별, 정재형, 샘김, 이진아, 루시드폴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는 일종의 시리즈였는데요. 제목은 '클럽 아크 X 안테나 (Club ARC with Antenna)'. '안테나' 레이블 소속 음악가들이 출동한다는 것 외에도 색깔이 또렷했습니다. 전시와 공연을 융합한 콘셉트였거든요.
▶ 영상 보러 가기 : 공연장에서 마시고, 보고, 듣는 특별한 연말! ��|클럽 아크 X 안테나 TEASER
공연장 안을 가수의 애장품을 전시한 공간처럼 꾸몄어요. 대기실 투어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 가수가 이런 커피를 마시는구나', '이런 악기를 갖고 다니는구나', '이런 음반을 아끼고 즐겨 듣는구나' 하는 즐거운 TMI를 뇌에 담고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죠.
공연장 앞에서는 호텔처럼 체크인을 하면 웰컴 드링크를 주더군요. 음료를 받아 들고 홀짝거리며 공연장 내 곳곳에 포진한 스타의 발자취를 찾아 헤매는 것이 매력 포인트더군요. 전시와 공연의 경계를 허문 융복합적 공간 콘텐츠였습니다. 공연은 오후 8시 시작인데 6시 반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다 있었던 겁니다.
이런 형태의 전시 또는 공연을 위해서는 블랙박스 공연장이 필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블랙박스는 비행기나 자동차에 들어가는 기록 장치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검은 육면체 공간을 말합니다. 정면의 무대를 향해 객석이 줄지어 고정돼 있는 전통적인 공연장 형태를 전문용어로는 프로시니엄(proscenium)이라고 부르는데요. 블랙박스는 이러한 액자 모양의 구조를 깨부숩니다. 덩그러니 시커먼 공간만 있기에 가변형 객석이나 무대를 통해 레고 조립하듯 공연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할 수 있지요.
▶ 영상 보러 가기 : [대극장 A석] 이 극장은 블랙박스입니다. 네? | 세종문화회관
블랙박스 공연장은 형식상 실험적인 공연들을 많이 할 수 있어 요즘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클럽 아크'가 열린 LG아트센터 서울의 'U+스테이지'를 비롯해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경기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극장 1,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 지하의 쿼드 등 많습니다. 연극, 뮤지컬, 음악극, 아트앤드테크(art & tech)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나 공연이 가능한 것이 특징입니다.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이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 내 블랙박스에서 선보였던 지난해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도 그런 '검은 상자' 공간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었지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