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스프] '루저의 마음' 덕분에 숱한 실패를 극복해낸 사연

[스프칼럼] 우리는 모두 실패로부터 진화했다 (글 : 이대한 교수)

스프칼럼 썸네일
연구는 실패의 연속이다. 특히 실험은 더욱더 그렇다. 박사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확실한 한 가지는 “실험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경험상 실험이 계획대로 한 번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게 잡아야 30% 미만이다. 학부 때 배우는 가장 간단한 실험조차도 그렇다. 

스프칼럼(이대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예컨대 코로나19로 인해 일반인들도 친숙해진 PCR(중합효소연쇄반응)은 이론상으로는 매우 간단한 실험이다. 마치 두꺼운 책에서 원하는 부분만을 복사기로 복사하듯, DNA와 복사하고자 하는 부분을 표시해 주는 물질(프라이머), 그리고 DNA 복제효소를 섞은 플라스틱 튜브를 PCR 기계에 넣고 작동시키면 내가 원하는 DNA 서열이 증폭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치 잉크가 떨어진 복사기에서 빈 종이가 출력되는 것처럼, PCR이 끝나고 플라스틱 튜브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보면 텅텅 비어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왜 PCR 같은 간단한 실험이 실패하는 것일까? 그건 실전에선 교과서엔 나오지 않는 변수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실수로 일부 시약을 깜빡했을 가능성, 시약 안에 들어 있는 중요 성분이 잘못 디자인되거나 변성되었을 가능성, 실험 온도와 시간이 부적합했을 가능성 등 실패는 수많은 이유에서 비롯될 수 있다.

문제는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 진짜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기가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트러블 슈팅(trouble shooting)’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꼬꼬마 대학원생에서 독보적인 과학자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간단한 실험에 계속 발목이 잡혔다. 비유하자면 에베레스트를 등산해야 하는데 신발 끈이 엉켜 출발을 못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실험은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실험을 진행하고, 실패하고, 왜 실패했는지 추정해 보고, 다시 실험하고, 또 실패하고, 다른 가능성을 검토하고, 또 수정 실험을 해보는 일의 반복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운 좋게 문제의 원인을 찾아낼 때도 있었지만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도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내지 못한 적도 많았다. 그런 완전한 실패가 닥칠 때면 절망의 늪이 된 실험실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런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패의 시간 속에서 나에게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켜켜이 쌓인 좌절이 체념으로 발효되어 “또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 대신 “어차피 안 될 거야. 되면 그게 실험인가.”라는 루저의 마음으로 실험에 임하게 된 것이다.

성공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실패에 관대해지자 뜻밖에도 실험의 괴로움이 점점 줄어들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실험은 번번이 실패했다. 다만 예견된 좌절은 더 이상 좌절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실패의 원인을 추적하고 새로운 실험을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보는 일의 반복. 그러다 보면 가끔 실패가 끝나고 기적 같은 성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구의 거의 전부에 가까운 그 일을 담담하게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는 연구자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스프칼럼(이대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사실 실패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다. 모든 세포는 끊임없이 실패한다. 생명체의 본업은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더 깊고 인사이트 넘치는 이야기는 스브스프리미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콘텐츠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하단 버튼 클릭! | 스브스프리미엄 바로가기 버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